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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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작성일 : 12-10-25 10:42
서원 바로알기(23) - 복원으로 새로 태어난 서원들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1,987  


제주 橘林書院, 울산 鷗江書院, 대전 崇賢書院

제주의 귤림서원은 지난 2004년 복원을 마치고 현재 지역사회에서 전통교육의 장으로 활용중이다. 귤림서원은 제주지역의 서원으로 지난 2004년 제주시 이도1동 오현단 내에 강당 1동(77.6㎡)과 사당 1동(23.7㎡) 등을 복원하고 2005년에는 오현단 내에 제주 출신으로 조선시대 문관인 고득종과 제주유림 김진용을 기리는 상현사를 복원했다.
귤림서원은 현종 8년(1667)에 제주판관 최진남이 제주에 유배 왔다가 숨진 충암 김정의 묘를 옮긴 뒤 만들어진 조선시대 제주지역의 유일한 서원이다. 1665년 판관 최진남이 1578년 판관 조인후가 충암 김정을 모시기 위해 가락천(산지천)에 동쪽에 있던 충암묘를 지금의 위치로 옮겼으며, 경내에 장수당(공부하는 방)이라는 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1682년에 충암묘와 장수당을 합해 귤림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귤림서원에는 520년에 유배된 충암 김정, 1601년 ‘소석유, 길운절의 난’을 수습하기 위해 어사로 파견되었던 청음 김상헌, 1534년에 제주목사로 부임했던 규암 송인수, 1614년에 유배되었던 동계 정온과 1689년에 유배된 우암 송시열 등 5명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제주시는 귤림서원에서 한문교실과 서예교실 등을 운영하고 있다.
울산 최초의 사액서원인 구강서원은 지난 2006년 복원됐다. 구강서원은 조선 효종 10년(1659) 배두첨 등 11인이 처음 창건발의를 했고, 이후 부지변경과 화재 등 우여곡절 끝에 19년이 지난 1678년 울산 최초의 서원이 완성되었다. 지금의 반구동 서원마을이 그곳이다. 처음 발의 때 55명의 지역 유지들이 내놓은 기금에다 담배·소금·명태 무역을 통해 모아진 건립자금이 보태졌고, 청량면 영취산에서 구한 재목(材木)도 서원건립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듬해(1679) 위패봉안식이 거행되었는데 앞서 3년간의 공사비와 뱃놀이까지 포함된 봉안 기념행사에 쓴 비용만 1만 냥이 넘었다고 한다.
서원건립 4년 후인 1682년(숙종8)부터는 사액을 청하는 움직임이 크게 일었다. 사액서원의 특권이 컸던 만큼 많은 비용과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세 번의 실패 끝에 4번째인 1694년(숙종20)에 사액서원이 되었는데, 세 번째와 네 번째의 청액 활동비로만 각각 2만7635냥과 2만5779냥이라는 거액이 들었다.
건립 이듬해인 숙종 5년(1679)에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와 회재 이언적(晦齊 李彦迪)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숙종 20년(1694)에는 ‘구강서원’이라는 사액(賜額·왕의 교지)을 받았다.
원래의 서원부지는 아파트 건립으로 없어졌으나 지역 유림들이 1990년부터 ‘구강서원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 반구동 산 171-1 제2학성공원 부지 800평을 매입해 울산시에 기부채납하고 시는 유림들이 기부채납한 부지를 포함한 1200평에 2001년 3월부터 23억여원을 들여 서원 복원공사에 들어가 2년 8개월만인 지난 2006년에 개원했다.
대전의 대표적인 서원인 숭현서원은 진나 1998년 복원돼 현재까지 지역의 문화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회덕의 충절지사인 충암 김정, 수천(守天) 정광필, 규암 송인수를 배향하는 사우로 출발하여 회덕의 용두록(龍頭麓)에 세워졌다. 이 사우가 정확히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시기가 가장 늦은 송인수가 을사사화의 여파로 1547년(명종 2)에 죽은 것을 기준으로 볼 때 16세기 후반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우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자, 1609년(광해군 1) 송남수(宋譜壽)가 다시 건립하여 삼현서원(三賢書院)이라 하였고, 그해에 유생들이 조정에 청액(請額)하여 숭현(崇賢)이라 사액되었다.
맨처음 배향된 세 사람을 비롯하여 1641년(인조 19)에 죽창(竹窓) 이시직(李時稷)과 야은 송시영을 위한 별사(別祠)가 서원 안에 따로 지어져 배향되었다.
또한 기호성리학파의 대표적인 사람들이 숭현서원에 추가로 배향되었다. 즉 기호학파의 종사(宗師)인 율곡의 수제자로서 예론(禮論)의 대가인 사계 김장생이 1646년에 배향되어 유림의 학문 중심지의 역할을 했다. 여덟 명의 유학자를 배향하고 있어 팔현묘라고도 불렸다. 1994년에서 1998년에 걸쳐 복원됐다.                         



갈 수 없는 그리운 北韓의 賜額書院들

조선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47개 사액서원만 남겨 놓고 전국의 서원을 훼철할 때 훼철되지 않았던 47개 서원 중 지금은 가 볼 수 없는, 그래서 그 자취마저 확인할 수 없는 북한에 있는 서원은 무려 11개에 달했다. 훼철되지 않았던 서원의 사분의 일이 넘는 수이다. 전쟁에 대한 공포와 억울한 젊은이들의 피로 얼룩졌던 경인년(庚寅年)을 보내고 신묘년(辛卯年) 새해를 맞아 이 땅에 다시 평화와 공존의 아침이 밝아오기를 기대하며 북한에 있는 사액서원(賜額書院)들에 대해 알아보자 .
북에는 개성 숭양서원을 비롯해 황해도에 배천 문회서원(文會書院), 장연 봉양서원(鳳陽書院), 평산 태사사(太師祠), 해주 청성묘(淸聖廟)가 있고 함경도에 북청 노덕서원(老德書院), 평안도에 영유 삼충사(三忠祠)와 안주 충민사(忠愍祠), 영변 수충사(酬忠祠), 평양 무열사(武烈祠), 정주 표절사(表節祠)가 있다. 배천의 문회서원은  조선 중기에 배천지방 유림(儒林)에서 이곳 출신인 현유(賢儒) 안당(安煽)·신응시(辛應時)·오억령(吳億齡) 등과 이이(李珥)·성혼(成渾)·조헌(趙憲)의 위패를 모셔 지방 학문의 진흥을 도모하기 위해 창건하였다. 1568년(선조 1)에 문회(文會)라는 사액(賜額)을 받았으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1606년 중건하고, 당시 사신으로 온 명(明)나라 주지번(朱之蕃)이 쓴 편액을 받았다. 1680년(숙종 6) 박세채(朴世采)가 송시열(宋時烈)과 상의하여 주자(朱子)의 남강현학규(南康縣學規)를 본떠, 서원을 동서의 양사(兩祠)로 조성하였다. 장연의 봉양서원은 1695년 문순공 박세채(文純公 朴世采)를 모시기 위해 지어졌고, 1696년 사액을 받았다. 평산 태사사는 황해북도 평산군 산성리 태백산성 내에 있던 옛 사우이다. 태백산성사우(太白山城祠宇) 또는 성황사(城隍祠)라고도 한다.
고려 초기 개국 공신인 장절공 신숭겸(壯節公 申崇謙)과 충절공 유검필(忠節公 庾黔弼), 무공공 복지겸(武恭公 卜智謙), 무열공 배현경(武烈公 裵玄慶)을 모시기 위해 지어졌다. 그들 가운데 평산 출신인 신숭겸과 유검필을 성황신(城隍神)으로 여겨 사당을 성황사라 불렀으나 뒤에 산성 이름을 따서 태백산성사우로 고쳤다. 1796년(정조 20) 삼태사사(三太師祠)라는 이름으로 사액을 받았으나 뒤에 태사가 네 명임이 밝혀져 태사사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해주의 청성묘는 황해남도 해주시 수양산 기슭 태백산성 내에 있던 옛 사우이다. 수양사(首陽祠) 또는 이제사(夷齊祠), 청성사(淸聖祠)라고도 불렸다. 1687년(숙종 13)에 백이숙제를 모시기 위해 지어졌고, 원래 이름은 이제묘(夷齊廟)이다. 1701년 청성묘라는 어필(御筆) 편액을 받았다.
함경도 북청의 노덕서원은 1627년 문충공 이항복(文忠公 李恒福)를 모시기 위해 지어졌고, 1687년 사액을 받았다.
평안도 영유의 삼충사는 1603년 평안도 영유(永柔)에 제갈량을 모시기 위해 사당을 지어 와룡사(臥龍祠)라 불렀고, 1661년(현종 2) 사액을 내렸다. 1695년(숙종 21) 송나라 충신 악비를 와룡사에 배향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750년(영조 26) 송나라 말기의 충신 문천상을 함께 배향하도록 하는 한편, ‘삼충사’라는 사액을 내렸다.
안주의 충민사는 1681년 충장공 남이흥(忠壯公 南以興)을 모시기 위해 지어졌고, 1682년 사액을 받았다. 영변의 수충사(酬忠祠)는 청허 휴정·송운 유정을 모시기 위해 지어졌고, 그해 사액을 받았다. 서원 철폐령 때 남은 서원 및 사우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승려를 모신 곳이다. 평양의 무열사는 평양직할시에 있던 옛 사우이다. 1593년 평안도 평양에 명나라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을 모시기 위해 지어졌고, 그해에 사액을 받았다. 나중에 명나라 장수 이여송·양원(楊元)·이여백(李如栢)·장세작(張世爵)을 함께 배향했다. 정주의 표절사는 조선 순조 때 홍경래의 난으로 죽은 충렬공 정시(忠烈公 鄭蓍)를 비롯한 7의사를 모시기 위해 지어졌고, 1824년 사액을 받았다. 북한에 있는 대표적 서원인 개성 숭양서원은 현재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28호다. 1573년(선조 6) 개성유수 남응운(南應雲)이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고 서경덕(徐敬德)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개성 선죽교 위쪽 정몽주의 집터에 서원을 세우고 문충당(文忠堂)이라 하였다가 1575년(선조 8) ‘숭양(崧陽)’이라는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1668년(현종 9) 이후 김상헌, 김육(金堉)·조익(趙翼)·우현보(禹玄寶) 등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경내에는 사당, 강당, 동·서재, 내·외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