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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1-14 13:20
거제반곡서원 사액 상소문 4件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1,490  
   거제반곡서원7.bmp (530.8K) [42] DATE : 2012-11-14 13:20:08



2012년 11월 12일 (월) 09:27:27 뉴스앤거제

☞ 차례 : 1. 반곡서원 거제유림(儒林) 사액 상소문 2件 2. 거제우암서원
(巨濟尤庵書院,반곡서원) 창건, 사액상소문 2件 外.

1. 반곡서원 거제유림(儒林) 사액 상소문
1). 거제서원의 사액 상소는 현재 전해지는 글이 총 4편이 있다. 1690년대 초 거제우암서원 사액을 청하는 상소를 시작으로, 1706년 숙종 32년 3월 27일. 우부승지 허지(許墀) 등의 거제서원 사액 상소 件과 1862년
철종13년에 거제 유림에서 2차례, ①윤8 월 18 일 이병우(李秉瑀)等 356명(三百五十六人), ②11월 10일, 김호근(金濩根)等 178명(一百七十八人)등이 거제 반곡서원의 사액(임금이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
린 서원. 흔히 서적, 토지, 노비 등도 동시에 하사 함)을 청원하는 상소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논의 끝에 이를 거절함으로서 끝내 사액을 받지 못한 서원으로 남게 되었다. 다음은 반곡서원의 명칭의 변경에 대해 살펴보면, 처음 서원을 세울 때는 '거제우암서원(1690년대초~1704년)'으로 창건 후에는 '거제서원(1704년~1750년대)' 불리다가 '거제반곡서원'을 거쳐 '반곡서원'으로 확정되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주] 명칭변경 : 거제우암서원(169?~1704년)> 거제서원(1704년~1750년?)> 거제반곡서원> 반곡
서원.
 
2). 1862 년 윤8 월 18 일, 철종13년.
[慶尙道儒生 李秉瑀(이병우)等三百五十六人疏陳 盤谷書院 宣額之請賜批 疏略曰臣等所居自古稱海
左之鄒魯家服詩禮士習弦誦若有先賢先儒爲百世之師則俎豆而享祀之┾宇,而依歸之殆徧一道指不勝
,若夫先正臣文正公宋時烈之祀前後所創環一省而有十行焉而巨濟之盤谷書院爲最重焉何者先正以
名世之賢遭不世之遇出膺徵召以明大義於天下爲已責嗚呼,學精道大惟茲海島一區幸覿盛德光輝荒陋
之俗遂變文明之域始也,創舍揭影旋又拓堂妥靈儼然規볭之重爲嶺外大儒院而原其創始之初故判書 文
淸公臣金鎭圭首主是院揭處之儀享禋之祝皆出指意而宣額之請雖格不行文淸之殫誠效力則至矣,故領
議政臣金昌集忠賢系曺士流領袖爲國殄瘁乃其家傳衛道守死乃其天得純實之資堅確之操惟義是視丙申
一疏爲聖祖爲先正痛斥犯分悖倫之徒大定國是人士觀感於焉益深故왋享兩臣於先正之祀其後追配諸賢
若故左議政 文忠公臣閔鎭遠故參判臣李重協是已至若近歲贈領議政正文公臣金洙根追配以其家學之
正素有淵源位望之隆不啻山斗卓然遠紹以重儒術乃爲竝世之所欽仰嗚呼斯院妥享之規模義諦有如是謹
嚴而尊重亦可知矣,臣等不避猥越相率齊籲伏願特降宣額之命俾重院貌而慰士情則斯文幸甚批以公議
愈久愈好爾等退修學業]

경상도 유생 이병우 등 356명 소진(진술), 반곡서원의 사액을 청하니 하교를 내려 주소서.
"간략하게 아룁니다. 신(臣) 등이 예로부터 사는 곳에는, 바다 곁에 공자와 맹자의 학문인 시경과 예
절로서 집안의 의복을 갖추어 입고, 선비의 풍습인 거문고를 타며 시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후세의 스승이 되는 옛 유학자의 지혜를 담아 제기 그릇을 올려놓고 준칙에 따라 사당에서 제
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과 마음에 대부분 두루 미치나 한 가지 도리로 삼아 백성을
끌어안지 못함이 이와 같아 저 선대의 어진학자인 신하, 문정공 송시열의 제사 전후에 한번 살펴서
옥고리를 만들고자 하옵니다. 열 줄의 글을 올려 거제의 반곡서원이 이에 가장 중요하다 생각하고
허락하소서. 어떤 이는 선대의 어진 분이시고 세상에 알려진 대로 나쁜 일을 당하셨다 하지만 대대
로 드문 분을 만났으며, 심중을 드러내 벼슬을 주어 불렀고, 大 명나라 대의는 천하에 있다 하시어
그 대의를 그만두는 것에 탄식하셨다. 이러한 도리를 정성으로 배우는 이 곳 거제 섬 한 구역에 다
행이 크고 훌륭한 덕이 아름답게 빛나는 풍속으로 두루 변하여 비로소 문명의 땅이 되었으며, 비로
소 주문을 버리고 구슬 같은 자태를 높이 세우게 되었습니다. 좋은 자리에다 돌아가신 분의 위패를
엄숙하게 모시고 있습니다.
중한 법도로써 학식이 높은 선비의 서원을 고개 넘어 세웠습니다. 이에 의거하여 처음으로 새로 창
설하여 옛 판서 문청공 신(臣) 김진규 수주(우두머리)를 여기 올바른 법식으로 내걸은 서원에다 제
사를 올리며 축원하고 있습니다. 모두 태어나 그 뜻을 새기며 사액을 내려줄 것을 청하며, 비록 격
식이 문청공의 지극한 정성에 다하지 못했더라도 그 효력(규칙)이 힘써 다하도록 모범을 삼겠습니
다.
예전의 영의정 신하 김창집, 충성스럽고 현명한 분에게 제사를 지내니, 나라를 위해 남김없이 다하
도록 이에 조정인사의 영수에게 원컨대, 그 도성(거제)에서 전하여 내려오는 좋은 도리(道理)를 목
숨으로 지키고자 청하옵니다. 순직하고 참됨이 하늘에 이르고 굳고 확실한 생활을 지탱하며, 오직
의리에만 관심을 가져 지조를 지키고자하니, 병신년(1856년), 성조(聖祖)와 선대의 어진 분을 위해
글을 올립니다. 어른께 버릇없이 도리에 어긋난 일 일까봐 살펴 고민하다, 다만 나라의 근본이 되는
방침이라 결단하여 거제의 인사들이 눈으로 보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느 사이에 더욱 중히 여겨
예전부터 빈 술잔에다 양 신하(김진규, 김창집)를 제사 올리며 선대의 어진 신하를 축원하였습니다.
그 뒤에 여러 어진 분(제군자 諸君子)을 추후에 배향하니 이와 같습니다. 옛 좌의정 문충공 신(臣)
민진원, 예전의 참판 신(臣) 이중협, 요 몇 해 사이에 이와 같이 이미 이루어진, 추증한 영의정 정문
공 김수근을 추후에 배향하였습니다.
그 대대로 이어져 오는 올바른 학문은 본디 사물의 근원이 높은 지위와 명망에 있을 뿐 아니라, 탁
월한 태산북두(세상사람에게 존경받는 인물)이라 소개하며, 중한 선비의 기예에 이내 인간이 사는
곳에서 함께 아울러 받들게 되어 공경하여 우러러 사모하고 있습니다. 아 ~ 이 서원에서 사물의 근
본에 관한 본보기로서 제사를 안치하니 이와 같은 근엄함과 그리고 존중함을 있으니 가히 알 만한
것입니다. 신(臣) 등은 외람되나 숨길 수가 없어 서로 질서정연하게 엎드려 고하고자 합니다. 원컨
대, 특별히 사액을 소중한 서원의 사당에다 하사하여 베풀어 주소서. 선비를 위로하는 그 뜻인 바,
(거제)유학자들이 다행이도 심히 임금님의 대답을 기다리니 의논하여 주시고, 오래될수록 더욱 좋
다 하지만 이러한 거제인들이 물러나 학문을 연마하게 하여 주소서."
3). 1862 년 11 월 10 일, 철종13년 / 위 1번 글과 거의 동일 함.
[慶尙道儒生 金濩根(김호근)等一百七十八人上疏請 巨濟 盤谷書院 宣額賜批.
疏略曰夫先正臣文正公宋時烈之祀前後所創設環一省而有十所焉而巨濟 盤谷書院爲最重,焉何者先正
以名世之賢遭不世之遇出膺徵召以明大義於天下爲已責尊主庇民措斯世日月之上及乎弓훬抱痛群吠四
起蒼黃去國白首遜荒自北轉南而巨濟實爲赤舃信處之地嗚呼先正學精道大繼往開來功化所被夫豈易量
哉故判書 文淸公臣金鎭圭首主是院揭處之儀亨禋之祝皆出指意而宣額之雖格不行文淸之殫誠效力於
斯院則至矣鎭圭以法家拂士早自得師大見賞於文正不問而知爲先生弟子而蔚然爲聖朝名臣者也若夫故
領議政 忠獻公臣金昌集 忠賢係胄士流領袖純實之資正直之論百劫風波少無摧抑而惟義是視丙申一疏
爲聖祖爲先正痛斥犯分悖倫之徒固已扶植彝倫大定國是辛丑大策宗社奠安式克今休昌集則慘被構誣遂
適遐澨是府又爲其涪州則人士觀感於焉益深왋享兩臣於先正之祠亦有年所其後追配諸賢若故左議政
文忠公臣閔鎭遠故參判臣李重協至近世以贈領議政 文正公臣金洙根追配嗚呼斯院妥享之規模義諦有
如是之謹嚴難愼則體貌之隨以尊重居可知矣.臣等特以百世公議不避猥越相率更籲伏願聖明誕降宣額
之命俾重院貌而慰士情斯文幸甚批以所請依施爾等退修學業]
(청원에 의하여 임금님께 청하는 바, 저희 무리들이 물러나 학문에 전념케 하도록 허락하여 주소서)
[주] 사액(賜額) : 임금이 사당(祠堂), 서원(書院), 누문(樓門) 따위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
리던 일. 1550년(명종 5) 이황(李滉)이 풍기군수로 부임해 와서는 조정에 상주하여 명종(明宗) 임금
의 친필로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편액(扁額)을 받는데 이를 사액(賜額)이라고 함. 임금이 이
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린 서원. 흔히 서적, 토지, 노비 등도 동시에 하사 함.
● 참고 : 전국 반곡서원(盤谷書院)
① 경남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 [거제유림]
② 전북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 2가210번지. [서필원(徐必遠)]
③ 강원도 강릉시 교산 [허균(許筠) 허난설헌]
2. 거제우암서원(巨濟尤庵書院,반곡서원) 창건, 사액 상소문
 차례 : 1). 개요 2). 거제우암서원 사액 상소 件. 3). 송시열선생 화상. 4). 거제서원 사액
을 청하는 상소(巨濟書院請額上疏) 件.
1). 개요 : 이 글 상소문은 1689~1694년 거제 서상리 일대에 귀양 온 김진규 선생의 문집에서 발췌
하여 번역한 글입니다. 그러므로 1690년대 초에 이 상소문이 서울로 전달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결
국 전국 사원의 폐단이 심한 때라 사액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1704년 거제 반곡서원이 공식적
으로 창건되었지만, 사실은 그 이전부터 간결한 사당과 서재, 강당이 존재 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당시 김진규 선생이 거제에서 유배생활을 하였으므로 그 때 상황을 가장 정확히 기록
한 것으로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송시열 선생이 귀양살이 하던 곳에서, 반곡서원이 세워졌
음을 알 수 있는 귀한 자료이기도 하며, 거제 반곡서원의 창건 과정을 잘 나타낸 상소문입니다. 그
리고 송시열선생의 화상 기록(3번)엔 당시 거제 반곡서원으로 선생의 "초상화"를 보내 서원에다 모
셨음을 알려 줍니다.
 
2). 거제우암서원 사액 상소(巨濟尤庵書院賜額)
代嶺南儒生請巨濟尤庵書院賜額 영남유생을 대신하여 "거제우암서원" 사액을 청하는 상소. 竹泉
集卷之二十二 죽천집22권, 김진규(金鎭圭) 거제유배 1689년~1694년. 송시열(宋時烈) 거제유배 :
기미년1679년 3월25일~ 경신년1680년 5월15일.
"삼가 엎드려 아룁니다. 문(文)을 숭상하고 배움터를 마련하고 가르치기 위해, 상소문을 올립니다.
어찌 직무 담당자가 아니라하여 불가하다 하겠습니까? 오히려 황벽한 지역이니 달리 생각해야 하
고, 어진 덕을 숭상하는 정사를 칭찬해야 하며 어찌 한번 행할만한 것인데도 아니라하여 불가하다
하겠나이까? 또한 아주 훌륭하신 분을 융숭하게 기리는 것은 당연하며, 이제 참으로 배향할 장소가
있으니, 달리 생각하여야 하며 또한 중히 여겨 융숭하게 기리게 해야 합니다. 그 준칙을 평미레질
하듯 하는 것은 불가하니 일정한 격식으로 살펴 주십시옵소서. 본 경상도 거제현을 여러모로 홀로
생각해보니, 멀리 동남쪽 바다 중에 있고 서울에서 멀리 동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임금의 덕화가
두루 미치지 못하고 육지에 줄 이은 고을과 풍속과는 원래부터 다릅니다. 또한 거제민의 업(業)이라
면 오직 산밭을 개간하고 바닷고기 잡으려 그물질 하지만 습속에 의하면, 그곳은 점차 재목이 될 기
세가 있는 곳입니다. 또한 모든 선박에서 총을 소지하거나 활을 몸에 지니지 않고는 왕래하지는 못
하는 것은 응당 위급한 상황에 반드시 대비함이며, 변방을 방어하기 위해서입니다. 경제적인 상황
은 겨우 끼니를 이어갈 수 있을 뿐이며, 여기는 언행이 거칠고 무식하며, 한없이 어리석어 무슨 일
로 문학을 알아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대개 이삼백년 오랜 옛날부터 이른바 하늘이 버린 황폐한 땅
입니다(잦은 왜구의 침략). 이에 이르러 지나치지 아니했는지 살필 뿐입니다. 다행이도 기미년
1679년(숙종5년)에 있을 때 유교적인 대접을 잘 받았습니다. 어진신하 문정공 송시열, 덕망이 높은
으뜸의 유학자가 이 땅에 귀양을 와서, 읍치의 동쪽 "반곡"이라는 곳에서 우거하며 해를 보냈습니
다. 고을 사람들은 비로소 위대한 군자를 뵈올 수 있었으며, 당신의 크고 훌륭한 덕을 본받을 수 있
게 되었으며, 덕을 사랑하여 우러러 보고 스승(송시열)에게 교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선생은) 영가
구역(촘촘한 그물을 노래함)을 노래하는 동쪽 사람 같을 뿐 아니라,, 이후 마침내 북쪽으로 돌아간
후에도 유생들의 추모가 그치질 않았습니다. 그 골짜기 입구에서 집을 지어 학문을 닦고 연구하는
장소가 되어 이미 여러 집들이 무너져 엉망이 되었고 요 근년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니) 또한 개탄스
러워, 서로 대책을 강구하다 말하길, 우리의 땅이 비록 외지고 치우쳐 멀리 있다하나 우리 거제인들
도 임금의 백성입니다. 스스로 조급함을 물리치며, 단순하고 경솔하게 이리저리 흩어져 돌아가는
형편이라, 어찌 달게 여기겠습니까? 때마침 어진 이(송시열)가 가르치다 남긴 열매가 이로부터 있게
되었습니다. 마땅히 보고 느끼는 도리가 있어야만 하니, 이전에 송시열이 서재로 사용했던 곳이 비
록 버려져 있으니 이제 어찌 동의하지 못하겠습니까? 마침내 자금을 보내 그 근심이 참되게 이루어
졌습니다. 송시열 화상을 구해 얻고는, 물 아래(거제도)로 가져다 돌려보내 주었습니다. ①처음에는
몇 개의 서까래로 집을 지어 화상을 모신 사당을 만들었고 학문을 갈고 닦는 장소로 우러러 의지하
기 시작했습니다. 행동거지로서 체면이 서질 않고 모아들이는 것이 받아들이기 어려웠으나 ②옛날
에 우거하던 배소 곁으로 끝내 옮겨 갈 수 있었습니다.(현재 장소) 그 제도를 점점 확장하고자 ③사
당을 짓고 그 화상을 받들게 되었고, 또한 이에 ④널빤지로 위패를 만들고 ⑤서재와 강당을 지어 서
원의 격식을 간략하게 갖추었습니다. ⑥학장을 뽑아 배치하고 학생을 뽑아 모아 시와 글씨를 과제
로 공부하게 하고 매우 열심히 행하니 거문고를 타며 시를 읊는 소리가 서로 들리고 끊임이 없었습
니다. 이는 모두 언행이 서투르고 무식해 어리석었으나, 이로부터 거의 나쁜 풍습이 사라졌습니다.
옛날부터 내려 온 이러한 것들, 천한 그 풍습, 미개한 문화를 깨우치기에 이르러, 이제 눈을 씻어 바
라보면, 새삼스러워지게 되었습니다. 공자와 맹자가 들어와 있는 것처럼, 방불케 하여, 마침내 거제
민을 바로 세우게 되었습니다. 신의로써 선비의 학문은 가히 자랑할 만하며, 현자가 지나간 곳에는
그 덕화(德化)가 신묘합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보자면 이 지방은 예전에 저쪽(일본)과 같은 황벽
한 곳이었으나, 송시열로 인해 도학(유교)이 정대(옳고 바름)한 일이며, 광명(光明)이었습니다. 참으
로 근래의 거제유림은 아주 뛰어나, 즉 우리 성조는 문을 숭상하고 학문을 일으켜 어진 이를 기리고
덕을 숭상하여 정치로써 교화시키고 있습니다. 마땅히 그것을 특별히 생각하여 융숭히 하고 있으
니, 이렇게 주장하는 바, 어떠하십니까? 그런 즉 서원의 사액을 내리는 은혜를 널리 베풀어 하사하
소서. 유생을 격려하고 제사용 그릇을 올려 빛나게 하소서. 조금 늦춤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신 등은 진실로 조정에 아룁니다. 사당과 서원의 설립을 금함이 거듭되고 있으나 전날 유생이 진솔
하게 한말에 따르면, "이미 크게 이름난 어진 분에게는 당연히 다른 본보기가 있어야 한다." 다른 사
람보다 하는 말씀이 뛰어나게 우수한 분이 송시열이라, 어떻게 하시렵니까? 즉 가히 크게 이름난 현
자를 말함이옵니다.
여러해 전에 중신이 비록 이를 금한다고 밝히고는, 거듭 청한다고 하지만, 유생의 그 말을 긴히 다
른지역과 비교해보겠습니다. 예전에 선대의 어진 신하 송준길서원을 상주에서 설치하였고, 특별히
사액을 허락하였습니다. 고 영의정 신하인, 김육서원은 가평에 있으며 또한 사액이 허가되었습니
다. 물론 송시열과 더불어 양 신하의 어짊에 어떤 차이가 있었습니까? 양 신하의 사당과 서원은 이
외에도 사액을 내렸습니다. 이미 앞서 여러 곳, 상주와 더불어 가평은 편애에 얽매여 민첩하게 설치
했습니다. 금하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지금 어찌하여 송시열 혼자 서원의 설치를 불허하옵니까?
더군다나 본 고을에서 서재를 지었고, 이미 유생은 10여년 전부터 묵고 있으며 선대의 어진이의 초
상화를 존경하여 받들고 있습니다. 또한 선대의 중신(重臣)의 신청을 하고 있고, (그리고) 진실로 조
정의 명령과 법령을 어겨 죄를 범함이 아니지 않습니까. 또한 더군다나 본 고을은 궁벽하고 누추하
며 외진 곳입니다. 상주는 아니지만, 변경에서 내왕하는 큰 마을이 되었습니다. 가평은 서울에서 뻗
어나간 행정구역 가까운 곳에 있으니 비교하기가 그렇지 않습니까? 또한 선대의 어진 신하 정몽주
와 이언적은 사당과 서원이 이미 많습니다. 울산에 있는 즉 그 바닷가 서원에도 사액을 내렸습니다.
선대의 어진신하 김굉필과 조광조의 사당과 서원 또한 이미 많습니다. 아주 먼 국경인 희천(평안북
도)에도 사액을 내렸습니다. 이제 본 고을이 궁벽하고 누추하며 외진 곳이라 하더라도 아마 울산보
다 넘치게 비할 바가 아닙니다. 희천, 또한 어찌 사액을 허락 했습니까? 이곳과 비교하니 부끄럽습
니다. 신 등이 삼가 조정을 생각하는 바, 연해 거듭되는 사당과 서원의 폐단을 없애고자 한다지만,
딱 잘라 금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되질 않습니다. 모든 서원은 본래 선비가 책을 읽고 토론을 진심
으로 하기 위함입니다. 특히 한가지 일 때문이 아니니, 선현들의 제기 그릇을 올리게 해주십시오.
근래에는 그 실상이 없으며 그 명성도 의심스러우나, 선현의 향사가 중요한 것이라 여기고 이를 행
하고 있습니다. 또한 학문을 닦고 연구하는 일을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곳에는 한 고을에 두세 개
의 사당과 서원이 있어 고을에 있는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진실로 조정에
서 금함이 있어야 합니다. 돌아보면, 이를 그렇게 놔두어서도 아니 됩니다. 현인을 존경하고 학문을
닦고 연구해야 하며 그 실상이 있도록 아울러야합니다."
또한 본 경상도 70여 고을에, 송시열을 위해 향사한 곳이 없습니다. 본 고을 사방의 경계 안에 전부
터, 이곳은 하나의 사당과 서원이라도 일찍이 없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창건하고자 합니다. 이런
이유로 고을 사람들은 드문드문한 큰일이 생겨 기쁘고 즐거워 서로 일하고자 뒤쫓습니다. 빨리 기초를 다져 끝내고 서로 의논하니 어찌 남에게 폐해를 끼치겠습니까? 아마 본 서원은 다른 곳보다 뛰
어난데도 오른쪽 내용과 같이 표창(사액)이 없고 허락하지 않으니, 고로 한 도(道)의 수백 명의 유생
이 뜬소문에 일어나 합동으로 청하옵니다. 궁궐 아홉 개 문에서 서로 뒤쫓아 우러러 부르짖습니다.
삼가 엎드려 바라옵니다. 임금의 총명(聰明)이 그곳을 향해 진심으로 마음을 써서 근심하였고, 높은
도리에 특별히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전하나, 누차 살펴보니 비슷한 법식이 이미 있는데도 빨리 설
치하지 못하였습니다. 본 서원은 실제로 효과가 있으며 폐단이 없으니 속히 예조에서 명하여 임금
의 성지(聖旨)를 우러러 여쭈어주십시오. 특별히 빛나는 편액을 내려 주십시오. 유학자(유학의 도)
가 큰 도를 밝히기에 이르도록 멀리서 온 사람들을 크게 위로해 주시면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겠나
이다.
[伏以右文興學之化。何莫非所當務者。而尤宜加意於荒僻之地。褒賢尙德之政。何莫非所可行者。
而亦 宜致隆於卓絶之人。今苟有地之所宜加意而又重以人之可以致隆者。則其不可槩以常格也審
矣。竊惟本道之巨濟縣。邈在東南大海中。不但去京師絶遠。未霑王化。其與陸地列邑。風氣旣殊。
習俗亦異。居民所業。唯是墾山田網海魚。其稍有材氣者。亦不過挾弓銃操舟楫。以應邊防待變之
須。以資其餬口而已。是以貿貿蚩蚩。不知文學之爲何事者。盖二三百年之久。古所謂天荒。諒不至
此之甚矣。何幸向在己未歲。先正臣文正公宋時烈以宗儒碩德。來謫玆土。寓居于邑治之東盤谷者經
年。邑人始獲見大君 子盛德之儀。其景仰而薰炙者。盖不啻如東人之咏歌九쑩矣。及其北還之後。
儒生追慕不已。築室於其谷口。爲講學之所。已而屋宇頹廢。至于頃年。又慨然相與謀曰。吾土雖僻
遠。吾輩亦天氓。豈可甘自暴棄爲鹵莽滅裂之歸。而先正遺化實在於此。尤宜有觀感之道 前所築
之書室雖廢。今豈可便已。遂資送其勤而誠者。求得宋時烈畫像於洛下而齎歸。初搆數椽影堂。欲以
爲瞻依講劘之所。旋以其體貌之不尊。聚集之難容。移就舊寓之傍。稍拓其制度。作祠而奉其像。又
造安位板。又作講堂書齋 略備院宇之規。擇置學長。選聚生徒。課讀詩書甚勤。絃誦之聲。相聞而
不絶。盖其貿貿蚩蚩者。從此庶幾丕變。昔之來此者。陋其俗而至譬於蠻貊。今則拭目改觀。彷彿如
入鄒魯而適建閩。信乎儒術之可尙。而賢者過化之妙也。由是觀之。此地之荒僻旣如彼。而時烈道學
之正大事業之光明。實卓絶於輓近儒林。則以聖朝右文興學褒賢尙德之政化。其宜加意而致隆也當何
如哉。然則顯頒恩額於書院。使章甫激勸而俎豆光輝。有不容少緩矣。臣等固亦知朝家有疊設祠院之
禁。而前日儒相之陳白。旣以大名賢當有別 優異爲言。則如時烈者。卽可謂大名賢。年前重臣雖
請申明此禁。其言較緊於儒相。而其後先正臣宋浚吉書院之設於尙州。特許賜額矣。故領議政臣金堉
書院之在加平者。亦許賜額矣。毋論時烈與兩臣之賢之如何。兩臣祠院之此外賜額者。前已屢處。則
尙州與加平。便係疊設。而不拘禁令矣。今豈獨於時烈而以疊設不許此院哉。本縣書室之築。旣在
儒相陳白十餘年前。先正遺像之尊奉。又先於重臣之申請。則固非違犯朝令。而又本縣之窮荒僻
陋。非尙州之爲通區大都。加平之近在邦畿者比 耶。且先正臣鄭夢周 李彦迪之祠院旣多矣。而在蔚
山則以其濱海而賜額。先正臣金宏弼, 趙光祖之祠院亦多矣。而在깖川則以其絶塞而賜額矣。今本
縣之窮荒僻陋。盖不啻過於蔚山,깖川則又安可許於彼而靳於此耶。臣等抑又念朝家以祠院之稠疊爲
巨弊而禁斷者無他。盖書院本爲士子之藏修講讀。不專爲俎豆先賢也。而近來無其實而擬其名。藉重
於先賢之享祀。而未有講學之事。又或於一邑而有二三祠院。以致貽弊州縣。此固宜朝家之有禁也。
而顧此則不然。講學尊賢。並有其實] "[且本道 七十餘邑。旣無爲時烈享祀之處。本縣四境之內。前
此未甞有一祠院。而今始肇建。故邑人喜其爲稀闊之盛擧。樂튉相役。핀底完訖。又安有貽弊之可論
哉 盖本院之異於他所。不可無表章之典也如右。故一道數百儒生。聞風而起。合辭以請。相率仰籲
於九閽之下。伏願聖明軫念於向所云加意致隆之道。而仍察不拘疊設之已有近例。本院之有實效而無弊端。亟命禮官仰稟明旨。特宣華扁。以之丕闡斯文。大慰遠人。不勝幸甚]
3). 송시열선생 화상(宋時烈先生畵像)
거제유생이 받드는 우암 송시열선생의 "화상"을 남쪽으로 내려 보내면서, 서문을 쓴다(送巨濟儒生
奉尤齋先生畵像南下序). 북헌거사집(北軒居士集)初年錄김춘택(金春澤).
거제 선비들이 현재 받들어 지키는 곳에 보내주어 편안케 하리라. 푸른 바다 위 대숲 사이에 나는
바다의 신령이 황홀하게 나타나 절하는 그 곳이 있다는 것을 들어 안다. (화상畵像을 보고) 선비에
게 물으니 말하길, "이분이 그 어르신이다" 예전에 여기서 고생을 했는데(귀양살이) 이제는 무엇을
하려고 돌아오는가? 어찌 지금 이때에, 예전 그때 그림을 그렸는가? 공자가 뗏목을 타고 구이(九夷)
에 살려고 했음을 탄식한다. 물러난 늙은이가 가서 있게 된 곳은 사람 사는 곳이 아니었고, 사특한
재앙이었다. 이것 또한 그때 그렇게 하도록 시킨 사특한 일이었다. 선비가 잠시 답(答)하며 말하길,
"이것은 선생의 초상이다."
[生也今有所奉持。而往將安之。於滄海之上竹林之間。吾知其有海神者恍惚出拜。問生曰。是叟
也。昔嘗厄于此。今何爲而來哉。豈今之時猶昔之時乎。孔子有乘桴居夷之嘆。抑叟之所適。非人之
厄之耶。是亦時之使然耶。生姑答之曰。此先生之像也]
[주] 거이(居夷) : 공자가 구이(九夷)에 살려고 했음을 말한다. 논어(論語) 자한(子罕)에 “공자가 구
이에 살려 했다.” 하였다.
4). 거제서원 사액을 청하는 상소(巨濟書院請額上疏).
숙종 32년 3월 27일, 1706년 康熙(淸/聖祖) 45년. 거제서원(巨濟書院)의 사액을 청하는 상소를 거
두는 일(請額上疏捧入)의 문제로 이진휴(李震休,1657~1710년, 남인)와 갈등이 있었으므로 체면(遞
免, 직위 해제)해 주기를 청하는 허지(許墀) 등의 상소.
○ 우부승지 허지의 상소(右副承旨許墀上疏) 거제서원 사액 상소 미처리로 문제로 인한 상소.
"대개, 관아의 수석을 맡아, 영남의 상소를 거두어들이는 관리로서 양쪽 측(파당, 남인 소론)의 바른
등용이 있어야 합니다. 경멸을 당하는 수모에 번거롭게 되었습니다. 그러함에 이르니 신은 놀라 견
디지 못하였습니다. 소위 영남의 상소라 하여, 즉 거제서원의 사액을 청하는 일입니다. 상소를 제출
하는 날, 이미 물러간 뒤였습니다. 재차 제출하는 날에는 신이 또한 굳게 거절했사옵니다. 그리고
한쪽편의 관리가 애써, 주로 봉입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수석이 이제 도착하여, 함께한 신하가 없
다고 살펴보지 않았고, 더구나 이런 잘못을 꾸짖는 상소가 있음에도 (알리지 않은 것은) 신이 어찌
감히 잘못이 없다고 스스로 고하겠나이까? 그런데도 편안하기만 하겠습니까? 빨리 직위를 해제하
여 주시길 엎드려 빕니다. 어찌 사사로운 정으로 생긴 일이겠습니까?"
[大槪, 首席以院僚之捧入嶺疏, 混擧在直兩僚, 諉以受侮見輕, 臣不勝瞿然之至也。所謂嶺疏, 卽巨濟
書院請額事也。納呈之日, 旣已退却, 再呈之日, 臣又牢拒, 而右僚力主擔當捧入矣。到今首席, 不諒
臣無與, 而乃有此咎責之疏, 臣何敢自謂無失, 而晏然而已乎? 伏乞亟賜遞免, 以安私分事]
○ 동부승지 홍중하[1658(효종 9)∼? ]의 상소(及同副承旨洪重夏上疏)
대개, 신은 거제현 서원의 사액을 청하는 상소를 본원에서 거두어들인다면 그것은 가벼이 보이는
것이며, 고위관리(오래된 신하)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관원을 교체하여 주시기 바라옵니다.
이를 어찌 사사로운 정으로 하는 일이겠습니까? 임금께 장계를 올립니다.
[大槪, 臣於本院捧入巨濟縣書院請額之疏, 其所見輕, 與長僚無異, 乞賜遞改, 以安私分事。入啓]
대답하길, 모두 빠짐없이 상소를 살펴보라. 너희는 그것에 핑계대지 말고, 되도록 빨리 직무(그 일)
를 잘 살피도록 하라.
[答曰, 省疏具悉。爾其勿辭, 從速察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