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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9대서원 - 도동서원


 
작성일 : 12-09-14 17:12
도동서원의 자료정리 성과ㆍ현황ㆍ과제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7,119  


도동서원의 자료정리 성과ㆍ현황ㆍ과제
 
백 지 국
(영남대 국사학과 박사과정)
 
 
達城 道東書院의 연혁
 
道東書院은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구지서로 726)에 위치한다. 寒暄堂 金宏弼(1454-1504)과 寒岡 鄭逑(1543–1620)를 배향하고 있다.
김굉필을 향사하는 최초의 서원은 그가 죽은 뒤 60여 년 후인 1565년(명종 20)에 謫所인 전라도 순천에 건립된 玉川書院이다. 이후 그의 고향인 현풍에서도 김굉필을 향사하는 서원 건립이 추진되어1568년(선조원년) 비슬산 계곡에 雙溪書院이 건립되었다. 이 서원에 대한 자료는 전혀 남아있지 않은 탓에 건립과정이나 운영 등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은 알 수 없다. 다만 창건 당시 文籍에 의하면 다른 여타의 서원과 마찬가지로 鄕中士林 뿐만이 아니라 감사를 비롯한 지방관의 적극적인 협조 하에 건립된 것을 알 수 있다. 1573년(선조 6) 경상감사의 狀啓에 의하여 <雙溪>의 賜額과 함께 서적을 하사받았다.
쌍계서원은 任亂으로 폐허가 되었지만 당시 전란으로 인한 향촌사회의 피폐와 물력의 부족으로 10여 년 동안 중건되지 못하였다. 이후 1604년(선조 37) 현풍현 오설리 송림 보로동으로 옮겨 중건하였다. 이때 서원명을 甫老로 改名하였다. 1610년(광해 2)에 봉안하였으며, 같은해 도내 유생들의 啓請으로 <道東>으로 再賜額되었다.
도동서원의 중건에 대해서는『道東書院重刱事蹟』을 통해 개략적인 과정을 파악할 수 있다. 도동서원은 이 시기 여타의 서원과 마찬가지로 김굉필의 내외손 및 一鄕士林의 공동협력 하에 감사 및 本邑과 인근 수령 등 官의 적극적인 협조로 성사되었다. 특히 김굉필의 외증손이자 당시 영남학파를 영도 해 갔던 정구와 감사의 역할이 컸다. 정구는 중건초기 區劃施措에 애를 섰으며 白鹿洞規를 모범으로 한 道東院規를 제정하고 매 朔望에 諸生에게 강마하기도 하였다. 한편 1604년(선조 37) 먼저 중건역사를 관장할 원장으로 郭赾을 천거하였고 1607년(선조 40) 안동대도호부사로 재직당시 영남학파의 중심인사였던 대구도호부사인 鄭經世와 합천군수 呂大老와 함께 重建求助通文을 내기도 하는 등 도동서원 중건을 실질적으로 관장하고 있었다.
1677년(숙종 3) 생원 郭壽夏 등이 상서를 올려 서원 중건을 실질적으로 주관하였고, 초기 운영의 기본방향을 마련하였던 정구의 從享을 청하였다. 이때의 상서에서는 정구를 비롯하여 裵紳과 朴惺의 배향을 청하였지만 정구만 윤허를 얻어 1678년(숙종 4) 3월 26일 봉안하였다.
한편 도동서원은 김굉필 당시 그와 道義之交가 있었던 현풍 출신의 곽승화ㆍ배신ㆍ곽율ㆍ원개 등 4인을 배향하기 위해 院傍에 별도로 別祠(미사액)를 건립하였으나 대원군 서원철폐 때 훼철되었다.
도동서원 중건 이후 서원내의 변화나 정치ㆍ사회적 활동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다른 서원들과 마찬가지로 조선왕조의 서원진흥책에 힘입어 활발히 활동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제향자인 김굉필이 1610년(광해 2) 동방5현으로 文廟從祀되고 영남학파를 영도하던 정구의 從享으로 그 영향력은 더욱 증대되었을 것이다. 중건초기「尋院錄」에 의하면 첫 등재자인 정구 이후로 張顯光․許穆․李潤雨등 당시 한강문인을 비롯한 경상도 각 지역의 대표적인 인사들이 來訪하였다. 이후에도 영남의 남인계 중요인사들의 내방이 끊이지 않았으며, 또한 부임 지방관을 비롯한 인근 지방관들도 관심에 따라 서원에 내방하면서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현풍사림들은 유학자로서 명망이 높았던 김굉필과 정구를道統淵源을 삼는 동시에 도동서원을 중심으로 지방유림들을 결집시키고, 나아가 안동․경주․상주권 등 도내 유림세력과 협조체제를 유지하였다. 이후 도동서원은 경상도 중부지역의 대표 首院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며 김굉필을 향사하는 대표 서원으로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 철폐 훼철 되지 않고 존속할 수 있었다.
현재 도동서원에는 서원의 정문인 水月樓, 喚主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만든 강당인 中正堂, 각각 정면 3칸, 측면 1칸의 유생 기숙사로서 동재인 居仁齋, 서재인 居義齋, 內三門, 板木을 보관하는藏板閣, 典祀廳 등이 있다. 경내 건축물 중 1963년 1월 21일 강당ㆍ사당과 이에 딸린 <道東書院講堂祠堂附墻垣>이 보물 제350호로 지정(1963.01.21.)되었는데 그 모습이 매우 아름다워 토담으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후 2007년 10월 10일 서원 전면에 위치한 신도비, 은행나무 등을 포함한 서원 전역을 사적 제 488호로 지정되어 보존ㆍ관리되고 있다.
 
 
소장자료의 전래와 현황
 
1) 도동서원은 이른바 동방5현의 首賢으로 문묘에 배향된 暄堂 金宏弼을 향사하는 서원으로 안동의 도산ㆍ병산서원, 경주의 옥산서원, 상주의 도남서원 등과 함께 대구ㆍ성주를 중심으로 하는 경상도 중부권을 대표하는 서원이다. 대원군의 사원철폐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함으로서 옥산ㆍ도산서원 등에는 질적ㆍ양적인 면에서 미치지 못하지만 여타의 서원에 비해서는 소장 자료가 비교적 많이 남아있는 편이다.
 
2) 도동서원은 경상도 중부권을 대표하는 서원이었던 만큼 많은 서적들을 소장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존 하는 자료의 부족으로 그 구체적인 목록은 알 수 없다. 다만 서원의 교육 목표 및 내용과 관련 된 서적을 중심으로 수집ㆍ보관ㆍ출판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중정당 벽에 걸려있는 「道東院規」의 내용을 통해 도동서원이 수집하거나 출판하였을 서적들의 성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院長迎請朋徒, 不廢勸講. 冬春五經四書與伊洛諸性理之書, 夏秋史學子集. 任其所讀, 夫入院之士, 雖不能不爲科擧之事, 而科擧之外, 亦有古人, 所謂爲己之學者. …(「道東院規」)
 
원규의 기록을 통해 추정되는 도동서원의 도서 목록은 여타의 다른 서원과 마찬 거론된 기본적인 유교경전과 역사책, 학자들의 문집, 과거시험에 대비한 서적들을 수집ㆍ보관ㆍ출판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밖에 도동서원에서는 나라로부터 책을 하사 받거나 혹은 기증 등의 형식으로 여러 서적들을 소장 하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3) 서원 관계 자료는 필사원본과 고문서로 나눌 수 있는데 현재 도동서원의 경우 고문서는 거의 소실되어 남아있지 않다. 따라서 중건 초창기인 17세기 자료는 거의 없고 대부분이 18세기 이후의 것이다. 다만 서원 초창기의 상서ㆍ소지 등 문서와 19세기 중반 이후의 일부 통문이 『道東重刱事蹟』ㆍ『各處通文謄草』각 1책으로 묶여 보관되어 있다.
 
 
자료조사 현황과 기타 기록자료
 
1) 광복이후 도동서원 소장 자료에 대한 최초의 조사작업은 1969년 국회도서관에서 수행하였다. 국회도서관에서는 성균관대의 이춘희 교수를 중심으로 당시 전국에 산재하고 있는 서원 소장 도서의 목록을 조사ㆍ정리하여 『李朝書院文庫目錄 : 李朝書院文庫目錄考』를 간행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 전국에 남겨둔 47곳의 서원 중 1969년 당시 대한민국에 존속하고 있는 서원은 모두 36곳이었다. 이 중 강원도의 褒忠祠와 忠烈書院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실재 현존 서원 수는 34곳이 된다. 지방별로 보면 경상도가 14곳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경기도 11곳, 충청도 5곳, 전라도 3곳,강원도 3곳 순이다. 34곳의 서원중 실지 답사하여 서책의 유무를 확인한 곳은 17곳, 서신에 의해 확인 한 곳은 서원이 4곳으로 총 21곳의 서원에서 장서(藏書)를 보유하고 있었다.
도동서원의 경우 95種 529冊을 보유하고 있었다. 구체적인 목록은 국회전자도서관에서제공해주는『李朝書院文庫目錄 : 李朝書院文庫目錄考』의 원문DB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2) 1997년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에서『道東書院誌』를 발간하면서 도동서원에 소장된 자료를 조사하였다. 조사당시 도동서원의 경우 고문서는 거의 유실되어 남아있지 않았다. 다만 서원 초창기의 상서ㆍ소지 등 문서와 19세기 중반 이후의 일부 통문이『道東重刱事蹟』ㆍ『各處通文謄草』각 1책으로 묶여 보관되어 있다. 서원에 소장된 자료는 대부분 18세기 이후의 것으로 특히 20세기 이후의 단편적인 경제관계 자료가 다수 조사되었다. 일반적으로 각 서원에는 서원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한 고왕록이 있는데 도동서원의 경우 확인되지 않았다.
 
3) 2005년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에서는 달성군 일반동산문화재 다량소장처 실태조사 수행 시 도동서원에 소장된 자료도 함께 조사되었다. 1997년 조사 때 보고된 자료를 외에 고서 10종 26책과 책판1종 71판, 제기 및 현판이 28건 등이 추가로 조사되었다. 고서는 『景賢錄』ㆍ『御定奎章全韻』ㆍ『春秋左氏傳』ㆍ『五經百篇』등의 內賜本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景賢錄』71판이 장판각에 소장되어 있었다.
이 밖의 유물로 조선시대부터 대대로 전래되어온 祭器와 현판 등이 조사되었다. 현판은『道東書院』ㆍ『居仁齋』ㆍ『居義齋』ㆍ『水月樓』ㆍ『喚主門』ㆍ『中正堂』등 총 18개이며, 제기는 궤, 보, 상준, 용작, 작, 점, 촛대, 희준 등 총 8종 30점이 있었다. 이외에 벽화 2점과 內賜本을 담은 함 2개를 조사할 수 있었다.
 
4) 도동서원에 소장된 자료는 전적 등의 유물은 관리인의 금고에 보관 중이며, 책판은 장판각에 보관 중이다.

[-1] 도동서원 보존관리시설

수 장 고

수장고 면적

10 

금 고

1 

항온항습시설

감시카메라

(일반/적외선) 

감시모니터

녹 화 기

-

감 지 기

(열선/적외선/화재)

경 보 기

-

무인경비시스템

자동소화시설

(스프링클러 등) 

소화기

소화전 2, 소화기 4

상근관리인력

1 

비상근관리인력

1 




소장자료의 종류

1) 고서
『道東重刱事蹟』: 현재 도동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자료의 경우 서원 건립 초창기인 17세기 자료는 거의 없고 18세기 이후의 것이며 특히 20세기 이후의 자료가 다수이다. 따라서 서원의 역사를 정리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다만 서원 중건 초창기의 상황은 서원 유생들의 상서를 모은 『도동중창사적』을 통해서 일부 파악할 수 있다.
『各處通文謄草』 景賢錄 / 01-0003~0005 景賢續錄補遺 / 01-0007
道東書院土地臺帳 / 01-0006 成化十六年庚子式年司馬榜目/ 01-0008
御定奎章全韻 / 01-0002 御定奎章全韻 / 01-0001 五經百篇 / 01-0012~0016
育英齊完議節目 / 01-0011 全韻玉篇 / 01-0009~0010 春秋左氏傳 / 01-0017~0026
 
2) 고문서
서원의 조직ㆍ운영 관계자료 : 서원운영에 참여했던 인사들을 알 수 있는 자료로는『院任案』,『入院錄』,『參祭錄』,『謁祠錄』,『焚香錄』,『敦事錄』,『執事分定記』,『尋院錄』등이 있다.
경제관계자료 :『土地案』,『奴婢案』,『院屬案』,『月次鐵物錄』및『田畓案』,『院田收稅記』,『傳掌記』등과 20세기 이후 경제와 관련한 단면적인 자료가 있다.
건물 중수 관련 자료 : 『重修物力都摠』ㆍ『補院稧案』등이 있다.
기타 : 도동서원과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향촌사회 연구에 중요한 자료인 현풍현 『鄕案』2책과 최초의 향안 작정 시 제정된 것으로 보이는 「鄕案設立初定規謄草」가 소장되어있다. 이 자료는 향약적인 요소를 전혀 가미하지 않은 대표적인 향규로 중요한 자료라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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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동서원 고문서 목록 :『도동서원지』원문DB 서비스 - http://www.kstudy.com/
 
3) 책판
景賢錄 김굉필(金宏弼) 저, 김하석(金夏錫) 편
 
4) 현판 : 도동원규 : 도동 서원의 원규는 1. 향사(享祀)의 날짜를 정하는 방법. 2. 원장의 자격과 임무, 3. 유사(有司)의 자격. 4. 원생의 입학 자격. 5. 자리의 순서. 6. 교육 방법과 내용, 7. 선생을 맞이하는 예절. 8. 금지사항을 8 개조로 나누어 자세히 규정하고 있다. 가장 엄격히 지켜졌던 마지막의 금지사항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1. 노자(老子)와 열자(列子)와 장자(莊子) 및 불교에 관한 책과 바둑과 장기 놀이를 해서는 안 된다.(莊列老釋之書, 碁局博奕之戱, 皆不得入院)
2. 제주(祭酒)이외 술을 빚어서는 안 된다.(淸酌之外, 不得釀酒)
3. 제수(祭需)이외 소를 잡아서는 안 된다.(尹祭之外, 不得殺牛)
4. 신분이 천한 하녀는 재(齋)와 당(堂)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婢子,不得出入齋堂).
 



 


각종 문집에서 산견되는 도동서원 관련 기사.
「한국고전종합DB」(한국고전번역원) 및 『영남문집해제』(영남대민족문화연구소, 1988)에
수록된 도동서원 관련기사는 다음과 같다.
金世濂, 『東溟集』, 卷 3, 詩 「道東書院。示居接儒生」.
南東道, 『敬庵集』, 卷 4, 「道東別祠三賢奉安」.
安鼎呂, 『晦山集』, 卷 7, 「道東書院謁寒暄金先生」.
禹成圭, 『景齋集』, 卷 10, 「諭道東書院講儒」.
禹倬, 『尙賢錄』, 卷 2, 「道東書院常享」.
李承熙, 『大溪集』, 卷 34, 「道東書院遺墟」.
李祥奎, 『惠山集』, 卷 8, 「道東精舍士林」.
李栽, 『密庵集』, 卷 14, 「道東書院」.
鄭逑, 『寒岡集』, 卷 11, 「道東書院奉安」.
鄭逑, 『寒岡集』續集, 卷 4, 「道東書院院規」
鄭逑, 『寒岡集』別集, 卷 2, 「書道東書院額板下」.
鄭宗魯, 『立齋集』, 卷 31, 「道東書院傍祠常享祝」.
 
3) 소장자료 발간
 
① 『景賢錄(幷)續』木板本(重刊,後刷) : 道東書院 , 1969
② 『李朝書院文庫目錄 : 李朝書院文庫目錄考』李春熙 著. 國會圖書館, 1969
③『道東書院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著. 嶺南大學校出版部, 1997
④『달성군 일반동산문화재 다량소장처 실태조사』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달성군, 2005
 
 
5. 달성 도동서원 소장자료 활용방안
 
1) 도동서원은 1997년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에서 발행한 『도동서원지』를 통해 소장 자료를 조사ㆍ정리 하여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며 연구자와 일반인들의 접근성을 높였다. 하지만 이후에 조사된 자료는 보고서를 통한 목록만 공개 되고 있어 지속적인 조사ㆍ연구 작업이 요구된다. 특히 조사된 자료들은 간행 및 원문DBㆍ색인 작업등을 통해 그 활용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 고문서 중에는 독자적으로 그 자료적 가치가 높은 것도 있지만 다른 문서와 연관하여 이용 될 수 있는 활용도가 높은 자료들도 존재한다.그러나 대부분의 문서들이 개별화 되어있어 문서간의 상호연관성을 찾는 것은 매우 힘들며 필요한 문서를 찾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문서의 DB 작업은 반드시 필요한 작업일 것이나, 그러나 전문 인력의 부족과 재정적 지원 및 많은 시간이 소요되므로 지자체 및 서원자료 소장자의 적극적인 지원과 전문연구가의 협조가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이 밖에 고문서를 보존하는 시설뿐만이 아니라 이용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서의 훼손을 방지하고 이들은 적절하게 정리하는 대책과 활용하는 방안을 함께 연계시켜야 할 것이다.
 
2) 조선시대 서원은 선현에 대한 제사와 향촌사회 교화와 여론의 형성 외에도 지식의 전달을 위해 서적을 출판하고 문고를 두어 서책과 문헌을 보존하여온 도서관적 기능도 담당하였다. 서원의 사고는 우리나라 도서 및 인쇄, 서적의 집산(集散) 보존 등 출반문화와 도서관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일반인에게 우리나라 도서관의 역사를 비롯하여 출판ㆍ인쇄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교육의 장으로서 서원사고는 그 활용가치가 높다.
한편 도동서원의 경우 유물전시관이 마련되어 있으나 제반시설의 지원이 요구된다.
 
3) 현재 유교문화원형 사업은 매체기반형 사업을 중심으로 활성화되고 있으며 장소기반형 사업과 체험지향형 사업은 잠재적 가능성은 높지만 아직 본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도동서원의 경우 유교문화유산으로도 의미가 있지만 건축학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역사적ㆍ공간적 가치를 지닌 도동서원을 중심으로 한 장소 기반형 + 체험 지향형 문화산업으로의 활용이 기대된다.
도동서원의 공간을 활용한 체험 및 체류형 에듀테이먼트는 통해 방문객에게 서원에 대한 바른 이해 및 상품개발을 통해 지역관광산업 활성화ㆍ다양한 원 소스 멀티유즈(OS) 개발 등 을 기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