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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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장산서원(章山書院)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1692~1
   이전인(李全仁)
   정조4년(1780)
   
   
   
잠계(潛溪) 이전인(李全仁, 1516~1568)을 봉향하는 곳이다. 본래 장산서원은 정조 4년(1780)에 영천군 임고면 장산리에 창건하였으나 고종 5년 (1868)에 금령으로 훼철되었고, 2007년 4월에 이곳으로 이건 복향하였다. 묘우는 선계묘(善繼廟),강당은 지습당(智習堂),동 서재는 심고재(尋古齋)와 지사재(志思齋),삼문은 초요문(超邀門),그리고 경각과 관리실이 있다. 공의 자는 경부(敬夫)이고 본관은 여주이며 회재 이언적의 아들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약관 때 이미 서천잠(誓天箴)을 짓고, ‘차라리 성인을 배워 미치지 못함이 있더라도 한 가지 기예(技藝)나 선(善)으로 이름을 이루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했다.
중종 34년 (1539) 회재가 전주 부윤으로 재임할 때 나라의 재이(災異)가 있었다. 나라에서 이에 대한 대책을 널리 구하자 회재가 일강십목소(一䗧十目疏)를 지어서 공으로 하여금 서울로 가서 상소하게 하자 중종이 이를 보고 크게 칭찬하며 세 본을 베껴 동궁과 외조(外朝)가 두루 읽어보게 하고, 특별히 품계를 높여 주었다. 인종 원년(1545)에 회재가 강계에 귀양 갔을 때 공은 그곳으로 가서 정성을 다하여 봉승(奉承)하였다. 공은 날마다 부친 곁에서 동정(動靜)과 어묵(語黙)에 대해 관감(觀感)하고 글을 배우며 질의한 것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묶으니, 곧 『관서문답(關西問答)』이다. 그 해 겨울에 회재가 안치(安置)중에 돌아가니 어느 곳에도 의지할 데 없었다. 잠계는 황망 중에도 혼자서 치상(治喪)하고, 예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본래 회재는 이학(理學)에 잠심하고 스스로 온회하였으므로 그의 학문을 아는 사람이 적었고, 또한 제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의 도덕을 천양할 이가 없었다. 몆옹 21년 (1566)에 상제를 마친 공은 두 아들 구암 이준과 치암 이순과 더불어 회재가 남긴 유고를 정리하였다. 회재는 적소에 있을 때 명종에게 상소하려고 지은 『진수팔규(進修八規)』가 있었으나 상소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공은 이를 정서하고, 아울러 자신이 쓴 『헌진수팔규소(獻進修八規疏)』를 나라에 올렸다. 이 글을 읽은 명종은 감복하여 회재의 관작(官爵)을 복직시켰다. 아버지 회재의 관직복작과 동시 판서(判書) 증직이 있었으나 취하지 않고 부(父)의 복작으로 사은소(謝恩疏)를 올렸다. 또한 공은 회재 유고를 가지고 퇴계 이황에게 가서 질정하고 아울러 행장(行狀)을 청하여 받았다. 이때 퇴계는 공의 호가 없음을 알고 ‘잠계(潛溪)’라 지어주었다. 공은 예빈시정에 추증되었다. 장산서원 편액 글씨는 박광보,선계묘 지습당 초요문은 박양보가 썼다. 심고재와 지사재는 박문환, 경각은 최채량이 썼다. 복향 상량문은 권헌조, 복향 기문은 이영원, 봉안문은 이진기가 지었다. 제향은 매년 3월 초경일(初庚日)에 행한다.


묘정비문으로 대체한다.
 
자식 된 자가 부모가 살아있을 때 봉양하고 죽은 후에 장사하고 제사하는 일 등은 당연히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부모의 뜻과 사업을 제대로 소술하여 후세에 전할 수  있는 일은 실로 사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평범한 부모의 志事1 를 계술2 하는 일이야 별로 어렵지 않겠지만 유명한 부모의 지사를 계술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물론 유명한 부모의 지사를 계술하는 일도 어렵긴 하겠지만 대현인 아버지의 뜻과 사업을 계술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문원공 회재 이선생은 스승으로 부터 전수한바 없으시면서도 스스로 洙泗3 의 학에 뜻을 두시어 도와 덕이 융숭하시니 길연히 동방 理學4 의 宗으로 성무에 배향되신 선정이시다.
잠계 이공 선생은 선정의 아들로서 부자간 師弟(사제) 가 되어 父師의 전발5 을 받아 그 도를 영세토록 전하게 하셨으니 앞에서 말한바 대현의 아버지를 소술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 하였는데 공은 충분히 그 어려운 일을 이루신 분이라 하겠다.
공의 이름은 全仁이요, 字는 敬夫이며, 自號하기를 잠계라하셨으니 퇴계선생께서 칭허 하신 것이다.
先鄕은 여주시고 아버지는 즉 문원공이시며 어머니는 양주 石씨 이시니 감포만호 귀동의 따님이시다.
중종 병자(1516) 칠월 사일에 공을 탄생하시니 천부적으로 온화하신 기질과 지극한 효자인지라 어릴적부터 잠시도 부모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셨다 .
어린 나이에도 문원공의 사랑어린 교도를 받아 문예가 숙취하시고 몸가짐을 심히 삼가셨다
일찍부터 과거공부 외에 爲己6 하는 학문이 있음을 아시고 문사에나 과거공부 등에는 아주 초연하셨다.
일찍이 하늘에 맹서하는 箴을 지어셨는데 "차라리 성인 배우다가미치지 못할지언정 한가지 재주로 명성을 얻지는 않겠다  밤낯으로 조금도 게을이 하지 말고 열심히 열심히 하고 조심 조심하여 이 몸이 죽은 후에나 그만 둘 것이다" 하셨다.
후일에 다시또 첨부하여 쓰시기를 "생각이 처음 발생할 때 그것이 천리 쪽으로 발생한 것인지 아니면 인욕 쪽으로 발생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살펴서 천리쪽으로 발생된 생각은 힘써 보존하고 인욕 쪽으로 발생된 생각은 힘써 끊어서 버려야 한다"고 하여 좌우에 붙여두고 인욕을 막고 천리를 보존하는 공무에 메진하여 조금도 게을리하지 아니하서서 학문이 날로 높아지시니 문원공께서 심히 기뻐하셨다.
문원공께서 일찍이 豊沛7 부윤으로 가셨을 때 災異8 를 인하여 일강십목소9 를 올리게 되었는데 특별히 공으로 하여금 서울에 가서 임금님께 올리게 하셨다.
전하께서 친히 다 보시고 크게 장허하시면서 "말과 의론이 강경하여 비록 예전의 서산 진덕수라 하더라도 더 앞서지 못할 것이라"하시고 세 편을 전사하게 하여 동궁에게도 외조에도 두루 보게 하시어 특별히 승진을 명하셨다.
이 상소가 왕을 감동케 하였으니 국가의 행운이지만 공의 수환과능력이 없었던들 어떻게 이 일을 이루어 낼 수가 있었겠는가 그 때가 바로 중종(1539) 기해년이었다
정미년(1547) 가을에 良才壁書10 의 변으로 이기, 윤원형 등에 미움이 되어 강계부로 안치되어 가셨는데 공이 함께 배종하고 가셔서 7년이란 세월을 곁에서 모시면서 자식의 직분을 십분 이행하셨다.
문원공께서 적소에서 어머니 손부인의 부음을 접하시고 평소 입고 계선던 어머니 옷으로 설위하고 예제를 수행하시는데 슬퍼 하심이 날로 깊어지시는 지라 공께서 정성을 다하여 호양하시고 몸소 모든 일을 친히 하시면서 더욱 자식의 직분에 독실하셨다.
그 어려운 중에도 추정11 하는 사이에 조용히 부자간의 문답이 있었으니 크게는 천지음양의 의치와 작게는 사물을 응접하는 도리와 성현들의 辭受12 하신 의리며 학자가 존양13 하는 공부 등을 상세하게 한 편의 책으로 기록하였으니 곧 관서문답이 그것이다.
계축년(1553)가을에 공이 잠시 고향으로 오시게 되었는데 문원공께서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사당과 제사는 전적으로 네가 마음을 다 하기를 믿는다. 그리고 또 학문에 게을리 하지 말아서 멀리 있는 아비의 기대를 위로하라" 하셨다.
조금 후에 바로 강계로 가셔서 모시게 되었는데 문원공께서 옥산별업이란 문서를 손수 써서 주셨으니 "네가 이 머나먼 이역에 같이 와서 주야로 곁에서 온갖 정성을 다하였으니 그 정성이 가상하다. 고향의 집과 토지와 부리는 일꾼들을 모두 네가 관리하며 대대로 지키며 살라" 하셨으니 문원공의 본뜻이 사실상 공에게 전수하신 것이니 그 깊고 먼 뜻을 이 대목에게 확연히 알 수가 있다 하겠다.
이 해 겨울에 문원공께서 적소에서 운명하시니 공이 헐헐단신으로 대성통곡하시며 독자적으로 치상을 하시는데 때 마침 한겨울이고 눈이 와서 빙판으로 변하여 상여가 움직이지 못하자 공이 노천에서 상여 앞에 엎드려 밤낮으로 땅을 치고 통곡을 하는 지라 곁에서 보는 자들이 울지 않는 자 없었다.
주위 사람들도 그 효성에 감동하여 흙을 지고 와서 길을 만들고 간신이 운구하게 되었는데 수천리 길을 백일 가까이 되어서야 겨우 고향집에 돌어와서 장사를 모시고 삼년 려묘를 행하셨다.
복을 끝내신 후에 공이 비탄해 하시면서 이르시기를 "선군자께서 백수노신으로 그 같은 역행에 처하여 계시면서도 전하를 향한 일편단심이 더욱 간절하시어 주역에 있는 진덕수업의 뜻을 취하여 팔조목으로 연의하여 이름 하시기를 진수팔조라 하시고 손수 쓰시어 준비는 다 되었지만 당시는 죄인의 몸인지라 의리가 올릴 수 없다 하시면서 운명직전에 소자에게 부탁하시기를 후일 반드시 상주하라 하시고 한을 안고 운명하셨으니 지금 이 몸이 처형을 당하여 죽는다 한들 무었이 두려워서 상주하지 못 한다면 위로는 충당지언14 에 목말라 하시는 전하를 저버리게 돠고 아래로는 죽음에 임하여서도 왕을 보필하고자 하신 선군의 뜻을 져버리는 것이다. 하시고 상소를 지어 올리시니 그 말과 뜻이 정성스럽고 측은하였다.
명종께서 크게 감오하시어 도신에게 하유15 하시기를 "지금 경주에 살고 있는 이 전이의 상소와 그 아비의 진수팔규를 살펴보니 그 몸이 비록 초야에 있으면서도 그 아비의 진수팔조를 올리고자 한 정성을 잊어버리지 아니 하였으니 참으로 가상한 일이로다. 경들은 이 진수팔조의 뜻을 명심하여 실천하라" 하시고 인하여 문원공의 벼슬을 복직하게 하였다.
공이 다시 두 아들(구암공,치암공)과 같이 문원공의 유고를 정리하여 도산으로 가서 퇴계선생께 교정을 부탁드리고 또 다시 직접 찾아 뵙고 행장을 청 하시기도 하고 혹은 편지를 올려 청 하기도 하셔서 마침내 얻을 수 있었다. 또 다시 비명도 청 하였더니 퇴계께서 고봉에게 사양하시어 고봉 기선생이 비명을 찬하게 되었다.
선조께서 즉위하신 초에 본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문원공의 유문을 수집하여 올리라 하시어 공께서 모두 모아서 올리셨더니 특별히 증직을 하시고 치제하도록 명하였다.
공께서 은혜에 사례하는 상소에서 이르시기를 "신의 아비가 평생동안 학문하신 것이 誠字 한자에 치중하였습니다. 오직 전하께
서 그 정성을 가상히 하시어 그 말을 가납하시고 그 일을 실행하여 주신다면 신의 아비가 죽었다 하더라도 살아 있는 것과 다를 바 없겠습니다.  신이 일찍 아비를 따라 궁벽한 곳에서 숱한 어려움을 지내왔으니 다행하게도 聖主를 만나 위로는 넓고 넓으신 전하의 은혜를 입게 되었고 아래로는 지하에 계시는 아비의 원혼을 위로하게 되었으니 머리가 부서지고 심장을 쪼개서 만 번 죽는다 하여도 이 은혜를 보답하기 어렵사옵니다" 하셨다.
경주의 자옥산은 문원공께서 일찍이 독락당을 지어시고 유연히 즐기시던 곳인데 그 경계의 경치가 골짝과 바위는 기이하고 개울과 못은 맑아서 가히 나의 갓끈을 씻을만한 곳이라 하셨거늘 공이 또한 그 선경에서 거처하시면서 속세를 초탈하는 즐거움이 계셨다.
공이 일찍이 퇴계선생을 되었더니 퇴계선생께서 조용히 말씀하시기를 "그대도 호가 있겠지" 하셨다. 공께서 사양을 하시자 퇴계께서는 그렇게 사양할 일이 아니라 하셨다. 공이 후일에 옥봉과 옥계 둘을 편지로 퇴계에게 품하셨더니 퇴계께서 답하시기를 둘다 좋기는 하지만 선생께서 평일에 비록 산의 이름으로 호 하지는 않으셨지만 후인이 양지할 때 이 산 이름을 취할 것이며, 또 서원을 짖게 되면 나라님으로 부터 산 이름으로 편액이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니 그대가 당연히 이 산 이름을 피하고 이 개울 중에 가장 아끼는 곳을 취하여 호 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다 하시니 공께서 眠川의 면 자도 그 뜻이 潛 자의 뜻을 내포하고 있음으로 자호 하시기를 잠계라 하시고 그로부터 세상과는 인연을 귾고 오직 잠거하는 것을 편하다 하셨다.
공이 여러해를 관북에서 고생하셨기 때문에 편고한 증세를 얻게 되었는데 결국 그 병으로 돌아가시니 수령이 겨우 오십삼세인 무진(1568)년 11월 25일이었다
처음에는 낙동에 모셨다가 다시 옥산 북쪽 영전의 辛坐原에 옮겨 모셨다.  후에 나라로부터 예빈사정을 추증하셨고, 문집이 세상에 전하고 있는데 매산 홍직필이 서문을 지으시고 금곡 송래희가 행장을 하셨으며 성담 송기환이 묘문을 찬 하셨다.
두 아들을 두셨으니 장자에 俊으로 군수를 하셨느데 제식을 겸비하였다. 문원공의 문집 서문을 노소재에게 발문을 허초당에게 묘지문을 이백사에게 각각 청하여 받아왔으며 다시 노소재에게 글을 올려 문원공의 대학 보유를 갱정하신 본지를 변 하였고 또 다시 문원공의 년보를 편집하였으며 유림과 상의하여 옥산서원을 건립하여 제향하였다.
차자에는 淳이니 봉사를 하였는데 도산으로 왕래하면서 예문에 의심나는 부분을 문질하였으니 공께서 가정의 교육이 바르게 하신 일단을 엿볼 수 있겠다.
오호라 공이 선정의 집에 태어 나시어 옥산집에 사시면서 문원공으로부터 가정의 훈도를 착실하게 받았기 때문에 마음을 다스리는데 있어 조심조심하시고 몸가짐에는 근신하시면서 오직을 성인을 배워야지 부귀 같은 것에는 족히 마음의 누가 될 수 없다 하시며 의연히 동심인성16 으로 그 부족함을 증익하였기 때문에 학문이 정실광박하시고 덕행이 군후하셔서 부모를 섬김에 있어 성효를 다하시고 자식 가르침에 바르게 하셨으며 특히 문원공의 대업을 소술함에 있어서는 당시와 후세의 제현으로부터 많은 추증을 받았으니 퇴계께서는 "詩書에 깊고 敎子에 義方으로 하였다" 하셨고 고봉께서는 "父子師弟간에 순순히 교회하고 열심히 받아 깨우치는 모습이 마치 백어와 공자를 보는 것 같다"하셨고 매삼께서는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한 곳을 드러나게 하고 미세한 곳을 천발하였으며 진수팔조를 올려 인군의 마음을 격동하게 하였고 구천의 원혼을 신원하여 주셨으며 가언과 선행을 모아 대현에게 취증17 하여 덕업을 형용함이 유감이 없게 하였으며 종사를 도와 가도를 바로 세워 두었고 유문을 모아 문집으로 발간하여 그 덕업으로 하여금 영천지 무궁하게 하였다" 하였으니 위 4현의 칭송함을 볼질데 채서산이 구봉에게 하신것과 같다고 할 수 있으니 세상에서 전하는 "잠계가 없었다면 회재도 없을 뻔 했다"는 말이 과연
 
임을 알 수 있다 하겠다.
자손들이 대대로 옥산에 살면서 충실하게 세업을 지켜오는데 선대에 관한 문헌이라면 비록 한 조각의 편지나 쓸모없이 된 문건이라도 다루기를 큰 보물같이 하여 깊이깊이 보장하여 두고 좋은 행동에 도움을 주게 하여 선덕을 손상되게 하지 않고자 하니, 옛말에 "단산18 에는 범상한 새가 없는 법이고 현포19 에는 쓸모없는 돌이 없다" 하였는데 여기서 다시 그 말을 증험할 수 있었다.
옛 정조 경자(1780)년에 향중의 장보들이 장산 양지쪽에다 사당을 세우고 공을 제향하였더니 고종 무진(1868)년에 전국 서원을 철폐함에 훼철이 되고 풀속에 묻혀 돌보지 못한지 어언 백여년이 되어 금년 병술년에 도덕산 안태봉 아래에다 복원 개축하고 이름하여 善繼廟라 하였고 강당을 知習當, 동재를 尋古齋, 서재를 志思齋라 하여 서원 모양이 훌륭하게 갖추어짐에 따라 제사를 올리고 도리를 강론하는 장소가 되었다.
다시 묘정비를 세우기로 논의를 정하고 16대 종손과 문노 주덕씨와 같이 잠계공의 유고와 공에 관한 사료들을 싸가지고 나를 한수의 곁으로 찾아와서 새길 글을 청하니 나는 연,허20 와 같은 문장을 쓸만한 솜씨가 못되는 지라 사양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어진이를 높이고 덕을 숭양한다는 뜻으로 쓰고 이어서 명을 하니 왈
 
어버지는 회재시니                 동방의 유현이로다
도학이 높고 깊으시니             공자를 연원하였도다
아버지를 스승하셨기에           성인이 되기로 뜻을 두셨도다
천백번 탁마하여                    낭간21을 이루셨도다
나라집이 무록하여                 부웅께서 귀양을 가셨도다
적소에까지 따라가서              칠년이나 곁에서 모셨도다
아  저기 귀양살이 집이여-      부자 함께 도를 강한 곳이로다
그곳에서 상을 당하시니         빙판의 고향길은 멀기만 하였도다
재넘고 물건너 반장을 하시고  려묘를 삼년이나 하셨도다
부사를 위한 상소는               적심으로 왕을 감동케 하였도다
복관의 기쁨도 얻어서            구천에도 은혜를 입게 하였도다
부사의 유고를 정리하여         영세불추하게 되었도다
아-- 공이시여                      석하22 의 사공을 펼치었도다
저기 옥산을 바라보라            유향이 아직도 남아있도다
장산사에 제사함이여             어찌 타당하지 않으리오
이 높다란 돌에                     명을 새겨 후세에 전하노니
아름답고 특수한 족적이         길이길이 민멸치 않으리로다
 
병술(2006)년 동짓달 상한에 후학 광산 김충호는 삼가 찬한다
 
1. 志事 : 뜻과 사업
2. 계술 : 이어받아 기술하는 것
3. 洙泗 : 공자가 계시던 곳
4. 理學 : 성리학
5. 전발 : 도를 전하는 일
6. 爲己 : 스스로 몸을 닦는 일
7. 豊佈 ; 전주의 고호
8. 災異 : 별스러운 재변
9. 일강십목소 : 하나의 주제로 열가지 조목이 있는 상소
10.良才壁書 : 이기,윤원형 등이 꾸민 괴벽서
11.추정:부모를 모시고 있다는 뜻
12.辭受:사양하고 받아 들이는 일
13.존양:존심양성의 준 말
14.충당지언:충성스럽고 우직한 말
15.하유:아래로 전지 한다는 날
16.동심인성: 어려운 역경을 극복하는 공주
17. 취증: 대현에게 행장이나 비문 같은 것을 받아서 그 덕을 증명한다는 뜻
18.단산: 신선이 산다는 산
19.현포: 곤륜산 중층에 위치한 신선이 사는 마을
20 연.허 :연국공과 허국공 모두 문장이 뛰어난 당 현종 때 사람
21. 낭간 : 좋은 구슬
22.석하: 아버지가 장작을 쪼개면 아들은 매어 나른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