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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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동락서원(東洛書院)
   경상북도 구미시 임수동 373
   장현광(張顯光) 장경우(張慶遇)
   1610년(광해군 2)
   1676년(숙종 2)
   음력 2월 19일, 8월 20일
   강당-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1호(1985.08.05지정)
1610년(광해군 2) 장현광에 의해 부지암정사(不知岩精舍)로 창건되었다. 1665년(효종 6) 제자들에 의해 서원으로 승격되고, 1676년(숙종 2)에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그러나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32년 사당을, 1970년에는 부속건물도 복구하였다. 복원됨과 동시에 장경우(張慶遇)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1)장현광(張顯光, 1554~1637)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열(烈)이며, 어머니는 경산 이씨(京山李氏)로 제릉참봉(齊陵參奉) 팽석(彭錫)의 딸이다. 경상북도 인동에서 성장하였다.
14세 때인 1567년(명종 22)부터 진사 장순(張峋)에게 배웠고, 18세 때 <우주요괄첩 宇宙要括帖>을 지어 대유(大儒)의 면모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침식을 잊으며 학문에 정진해 23세 때인 1576년(선조 9)에 재능과 행실이 드러나 조정에 천거되었다.
1591년 겨울 모부인의 상중에 전옥서참봉(典獄署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오산(金烏山)으로 피난하였다.
1594년 예빈시참봉·제릉참봉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해에 유명한 <평설 平說>을 지었다. 다음해 가을 보은현감에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12월 관찰사에게 세 번씩 사직을 청했고, 이듬해 2월 또 세번 사직을 청한 뒤 허가를 기다리지 않고 향리에 돌아갔다가 직무유기 혐의로 의금부에 잡혀갔다.
1597년 여러 차례 그를 조정에 추천했던 유성룡(柳成龍)을 만났는데, 그의 학식에 감복한 유성룡은 아들을 그 문하에 보내어 배우게 하였다. 1601년 경서교정청낭청(經書校正廳郎廳)에 임명되었고 여러 번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1602년 거창현감·경서언해교정낭청(經書諺解校正郎廳)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그해 11월 공조좌랑으로 부임해 ≪주역≫ 교정에 참가했고, 형조좌랑에 옮겨졌으나 이듬해 2월 돌아왔다.
1603년 용담현령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곧 의성현령에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몇 달만에 돌아갔다. 1604년 순천군수, 1605년 합천군수, 1607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55세 때 <주역도설 周易圖說>을 지었고, 68세 때 <경위설 經緯說>을 지어 ‘이체기용 (理體氣用)’, 즉 ‘이경기위설(理經氣緯說)’을 제창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김장생(金長生)·박지계(朴知戒)와 함께 여러 번 왕의 극진한 부름을 받았고, 사헌부지평·성균관사업 등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다음해 사헌부장령으로 부임해 왕을 알현했고, 곧 사헌부집의·공조참의로 승진되어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에 참석하도록 부탁받았으나 사양하고 돌아갔다. 이어 이조참의·승정원동부승지·용양위부호군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26년(인조 4) 형조참판에 특제되어 마지못해 사은했고 계속해 사헌부대사헌·부호군에, 1628년 이조참판, 1630년 다시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지중추부사·의정부우참찬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군현에 통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군량미를 모아 보냈다. 그러나 다음해 2월 삼전도(三田渡)에서의 항복 소식을 듣고 세상을 버릴 생각으로 동해가의 입암산(立岩山)에 들어간 지 반년 후에 죽었다. 1655년(효종 6) 의정부좌찬성, 1657년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그는 일생을 학문과 교육에 종사했고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당대 산림의 한 사람으로 왕과 대신들에게 도덕정치의 구현을 강조했고, 인조반정 직후에는 공신들의 횡포를 비판하고 함정수사를 시정하게 하는 등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그는 정구(鄭逑)에게 수학한 적이 있어 퇴계학파로 분류되고 있으나 이기론·심성론 등에서는 이황(李滉)의 학설과 상이한 점이 많았다.
그는 이(理)와 기(氣)를 이원적으로 보지 않고 합일적 혹은 한 물건의 양면적인 현상으로 파악하였다. 그의 <경위설>에서는 이를 경(經)으로, 기를 위(緯)로 비유해 이·기가 둘이 아니고 체(體)와 용(用)의 관계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심성론에서는 도심(道心)을 ‘미발지성(未發之性)’으로, 인심을 ‘이발지정(已發之情)’으로 파악했으나 이미 발한 뒤에도 역시 도심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도심이 인심 가운데 있고 인심이 도심 가운데 있어 별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또한 그는 사단(四端)이 칠정(七情)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칠정 가운데에서 본성을 따라 발현해 거짓되지 않은 것이 사단일 뿐이라 하여 사단의 순수고유한 발현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철학은 명나라의 나흠순(羅欽順)과 이이(李珥)의 이기심성론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남인계열의 학자들 중에서는 매우 이색적이고 독창적인 학설이다.
저서로는 ≪여헌집≫ 11권, ≪속집≫ 5권, ≪성리설 性理說≫ 6권, ≪역학도설 易學圖說≫ 9권, ≪용사일기 龍蛇日記≫ 2권 등이 있다. 성주의 천곡서원(川谷書院), 서산의 여헌영당(旅軒影堂), 인동의 동락서원(東洛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2)장경우(張慶遇, 1581~1654)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옥산(玉山). 자는 태래(泰來), 호는 만회당(晩悔堂). 인동(仁同) 출생. 아버지는 내범(乃範)이며,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로 진위장군 운배(雲培)의 딸이다.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는 10여세의 나이로 할머니를 모시고 금오산(金烏山)·청송 등지를 전전하면서 피란하였다. 1608년 난 후 학교를 부흥시키고자 <학교의식>을 지어서 학교교육의 지침으로 삼았다. 이듬해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서울에서 시행하는 식년과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정구(鄭逑)가 반대파의 모해로 관직을 삭탈당하자 경상도내 유생들을 권유하여 함께 변무소(辨誣疏)를 올렸다. 1612년(광해군 4) 어지러워져가는 조야의 모습을 바로잡고자 ≪저법육설 著法六說≫을 지어 시행하였고, 1621년 이이첨(李爾瞻)의 행패가 심해지자 <청참이이첨소 請斬李爾瞻疏>를 올려 이이첨을 참수할 것을 주장하였다.
1627년(인조 5)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인동의병장에 차정되기도 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의 상에 3년간 시묘하였다. ≪여헌문집≫을 간행하고 ≪제선의절 祭先儀節≫을 만들어 시행하도록 권장하였으며, 화산서당(花山書堂)을 건립하여 후진의 교육에 힘썼다.
1654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영릉참봉(英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저서로는 ≪만회당집≫ 4권이 있다. 뒤에 옥계사(玉溪祠)에 제향되었다.

서원 내의 건물로는 사당인 경덕사(景德祠), 강당(講堂), 동·서재(齋), 3칸의 문루(門樓), 4칸의 고사(庫舍)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학후묘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1)사당
사당인 경덕사(景德祠)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층 맞배지붕 건물로 처마는 겹처마이고 5량 구조의 가구구조이다. 이익공형식의 공포로 짜여 있고, 전면에는 반칸의 툇칸을 마련하고 마루를 깔아 의례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2)강당
강당인 중정당(中正堂)은 중앙 3칸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 홑처마로 되어 있으며, 5량 형식의 가구구조로 되어있다. 지형상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3)동·서재
동재인 근집재(謹執齋)와 서재인 윤회재(允懷齋)는 동재, 서재 구조가 동일한 대칭적 구성의 건물로 각각3칸 규모의 건물이고 2칸 온돌방과 1칸의 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4)기타
강학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존도문(尊道門)은 누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누하주는 팔각석주이고 누상은 원주로 하였다. 정면 3칸, 측면 1칸이고 이익공 형식의 공포로 구성되어 있다. 누상에는 계자각 난간을 둘렀다.

참고-경북서원지
구미시 문화관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