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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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남계서원(南溪書院)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읍 대북리 750
   유성룡(柳成龍) 이호민(李好閔)
    1583년(선조 16)
   
   4월 셋째 해일(亥日)
   
유성룡이 1583년(선조 16)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남계서당을 건립하였는데, 1621년(광해군 13) 후학들이 중수하고 서애의 위패를 모셨으며, 남계서원으로 승격시켰다. 1787년(정조 11)에 이호민(李好閔)을 추가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에 전국의 서원을 일제히 정리하고 철폐함에 위패는 하회로 옮겨 모시고 서당으로 격하되었으며 6.25 사변으로 소실되었다. 1990년에 유림의 의해 복원하기로 결의하여 1991년에 복원되었다.

1)유성룡(柳成龍, 1542~160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안동 출신. 자온(子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작(公綽)이고,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 중영(仲郢)이며, 어머니는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김성일(金誠一)과 동문수학했으며 서로 친분이 두터웠다.
1564년(명종 19) 생원·진사가 되고, 다음 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한 다음, 1566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춘추관기사관을 겸직하였다.
1568년(선조 1) 대교, 다음 해 전적·공조좌랑을 거쳐 감찰로서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어 부수찬·지제교로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춘추관기사관을 겸한 뒤,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그 뒤 정언(正言)·병조좌랑·이조좌랑·부교리·이조정랑·교리·전한·장령·부응교·검상·사인·응교 등을 역임한 뒤, 1578년 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직제학·동부승지·지제교로 경연참찬관 (經筵參贊官)·춘추관수찬을 겸하고, 이어 이조참의를 거쳐 1580년 부제학에 올랐다. 1582년 대사간·우부승지·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에 승진해 왕명을 받고 <황화집서 皇華集序>를 지어 올렸다.
1583년 다시 부제학이 되어 <비변오책 備邊五策>을 지어 올렸다. 그 해 함경도관찰사에 특별히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어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다가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예조판서로 동지경연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제학을 겸했으며, 1585년 왕명으로 <정충록발 精忠錄跋>을 지었고, 다음 해 ≪포은집 圃隱集≫을 교정하였다.
1588년 양관대제학에 올랐으며, 다음해 대사헌·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왕명을 받아 <효경대의발 孝經大義跋>을 지어 바쳤다. 이 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있자 여러 차례 벼슬을 사직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소(疏)를 올려 스스로 탄핵하였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 해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관련되어 죽게 된 최영경(崔永慶)을 구제하려는 소를 초안했으나 올리지 못하였다. 1591년 우의정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이어 좌의정에 승진해 역시 이조판서를 겸하였다.
이 해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서인 정철(鄭澈)의 처벌이 논의될 때 동인의 온건파인 남인(南人)에 속해 같은 동인의 강경파인 북인(北人)의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하였다.
왜란이 있을 것에 대비해 형조정랑 권율(權慄)과 정읍현감 이순신(李舜臣)을 각각 의주목사와 전라도좌수사에 천거하였다. 그리고 경상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을 이일(李鎰)로 교체하도록 요청하는 한편, 진관법(鎭管法)을 예전대로 고칠 것을 청하였다.
1592년 3월에 일본 사신이 우리 경내에 이르자, 선위사(宣慰使)를 보내도록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아 일본 사신이 그대로 돌아갔다. 그 해 4월에 판윤 신립(申砬)과 군사(軍事)에 관해 논의하며 일본의 침입에 따른 대책을 강구하였다.
1592년 4월 13일 일본이 대거 침입하자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軍務)를 총괄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고, 이듬해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 그 뒤 충청·경상·전라 3도의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하였다.
이 해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해 군사를 총지휘했으며, 이여송이 벽제관(碧蹄館)에서 대패해 서로(西路)로 퇴각하는 것을 극구 만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권율과 이빈(李薲)으로 하여금 파주산성을 지키게 하고 제장(諸將)에게 방략을 주어 요해(要害)를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다.
그 해 4월 이여송이 일본과 화의하려 하자 그에게 글을 보내 화의를 논한다는 것은 나쁜 계획임을 역설하였다. 또 군대 양성과 함께 절강기계(浙江器械)를 본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및 성곽의 수축을 건의해 군비 확충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소금을 만들어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할 것을 요청하였다.
10월 선조를 호위하고 서울에 돌아와서 훈련도감의 설치를 요청했으며, 변응성(邊應星)을 경기좌방어사로 삼아 용진(龍津)에 주둔시켜 반적(叛賊)들의 내통을 차단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1594년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 紀效新書≫를 강해(講解)하였다. 또, 호서의 사사위전(寺社位田)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군량미를 보충하고 조령(鳥嶺)에 관둔전(官屯田)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는 등 명나라와 일본과의 화의가 진행되는 기간에도 군비 보완을 위해 계속 노력하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들의 탄핵으로 관작을 삭탈당했다가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도학(道學)·문장(文章)·덕행(德行)·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 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묘지는 안동시 풍산읍 수리 뒷산에 있다. 안동의 병산서원(屛山書院)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서애집 西厓集≫·≪징비록 懲毖錄≫·≪신종록 愼終錄≫·≪영모록 永慕錄≫·≪관화록 觀化錄≫·≪운암잡기 雲巖雜記≫·≪난후잡록 亂後雜錄≫·≪상례고증 喪禮考證≫·≪무오당보 戊午黨譜≫·≪침경요의 鍼經要義≫ 등이 있다.
편서로는 ≪대학연의초 大學衍義抄≫·≪황화집 皇華集≫·≪구경연의 九經衍義≫·≪문산집 文山集≫·≪정충록≫·≪포은집≫·≪퇴계집≫·≪효경대의 孝經大義≫·≪퇴계선생연보≫ 등이 있다.
그런데 그의 저서에 대해 문인 정경세(鄭經世)가 <서애행장 西厓行狀>에서 “평생 지은 시문이 임진병화 때 없어졌으며, 이제 문집 10권과 ≪신종록≫·≪영모록≫·≪징비록≫ 등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라고 한 것을 보면 대부분이 없어졌음을 알 수 있다.≪징비록≫과 ≪서애집≫은 임진왜란사 연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2)이호민(李好閔, 1553~163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효언(孝彦), 호는 오봉(五峯)·남곽(南郭)·수와(睡窩).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증조부는 호조판서·적개좌리공신 연안군(延安君) 숙기(淑琦), 할아버지는 홍문관수찬 세범(世範)이다. 아버지는 이천현감(伊川縣監) 국주(國柱)이다., 어머니는 정경부인으로 비안박씨(比安朴氏) 사직 여(旅)의 딸이다.
이호민은 1579년(선조 12)에 진사가 되었다. 1584년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85년에 사관(史官)으로 발탁되었다. 응교·전한을 역임하였다. 집의·응교를 겸하였다. 1592년에 이조좌랑으로 임진왜란을 만나 의주까지 왕을 호종하였다.
요양(遼陽)으로 가서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명나라의 군대를 끌어들이는 데에 크게 공헌하였다. 상호군(上護軍)·행사직(行司直)을 거쳤다. 1595년에 부제학으로 명나라와의 외교문서를 전담하여 초안하였다. 1596년에 참찬관(參贊官)을 거쳤다.
이호민은 1599년에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사은사(謝恩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1년 예조판서로 인성왕후(仁聖王后)의 지문(誌文)을 다시 썼다. 대제학·좌찬성을 지냈다. 1604년에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다. 그 뒤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가 되었다.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었다.
이호민은 1608년에 선조가 죽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즉위를 반대하고 적서의 구별 없이 장자를 옹립하여야 된다는 입장론(立長論)을 주장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고부청시승습사(告訃請諡承襲使)로 명나라에 가서 입장론을 내세웠다. 광해군이 공을 세운 것에 대하여 포상하려 하였다. 그러나 <고부시공로사차 告訃時功勞辭箚>를 올려 이를 사양하였다.
이호민은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옥사에 연루되었다. 1614년 정온(鄭蘊) 등이 영창대군 살해에 대한 항의를 하다가 귀양을 가게 됐다. 그러자 <청환수정온보외차 請還收鄭蘊輔外箚>를 올려 이들의 방면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1615년(광해군 7) 정인홍(鄭仁弘) 등의 원찬론(遠竄論)에 봉착되어, 7년간 교외에서 대죄(待罪)하였다. 인조반정 후에 구신(舊臣)으로 우대를 받았다. 죽은 뒤에 청백리에 올랐다.
이호민은 문장에 뛰어났다. 임진왜란 때에는 왕명으로 각종 글을 많이 작성하였다. 그가 지은 교서(敎書)의 내용이 간절하여 보는 이의 감동을 자아냈다고 한다. 그러나 문장보다는 시에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다.
의주에 있을 때에 적의 수중에 있는 서울을 삼도의 군사가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 시 <용만행재하삼도병진공한성 龍灣行在下三道兵進攻漢城>은 절창으로 널리 애송되었다. 지례(知禮)의 도동향사(道東鄕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오봉집≫ 16권이 있다.

남계서원은 전면에 강당과 후면에 사당이 위치하여 전학후묘의 형태인 서원의 일반적인 배치를 따르고 있다. 경덕사(景德祠)인 사당과 존성당(尊性堂)인 강당, ‘진도문(進道門)’이라고 쓰인 외삼문 등 총 3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참고-경북서원지
군위군 관광군위 http://www.gunwi.g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