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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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양산서원(陽山書院)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 296
   홍 노(洪 魯) 홍귀달(洪貴達) 홍언충(洪彦忠)
   1710년(숙종 36)
   
   3월 중정(中丁)
   
이 고을은 부림홍씨(缶林洪氏)의 세거지로 1710년(숙종 36) 고려말의 충신 홍노(洪魯)와 조선조 좌참찬 겸 양관 대제학(朝鮮朝 左參贊 兼 兩館 大提學) 홍귀달(洪貴達), 이좌좌랑(吏曹佐郞)을 역임한 대학자 홍언충(洪彦忠)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분 선생의 영위(靈位)를 봉안하였다. 묘우(廟宇)를 비롯하여 유생 강학을 위한 흥교당(興敎堂)을 중심으로 입나재(立懦齋), 구인재(求仁齋), 읍청루(挹淸樓), 반무당(半畝塘) 등의 부속 건축물로 그 규모가 방대하였으나, 1868년(고종 5) 조정의 서원 철폐령으로 묘우를 비롯한 전 건물이 훼철(毁撤)되는 비운을 겪었다.
그 후 1897년(光武元年)에 현 규모의 강당을 중건한 후 1989년에 중수를 하고 강당 후정에는 장판각(藏板閣)을 지어 경재선생실기(實記)목판과 조선조 후기 사학자인 홍여하(洪汝河)가 수찬한 휘찬려사(고려사)[彙纂麗史(高麗史)] 목판(경북유형문화재 251호)을 보존하고 있다.

1)홍노(洪魯, 1366~1392)
본관은 부림(缶林). 자는 득지(得之), 호는 경재(敬齋). 조부(祖父)는 홍연으로 감무(監務)를 지냈으며, 부친은 진사(進士)인 홍민구이다. 경재(敬齋)의 처는 위씨인데 위신철의 딸이다. 아들은 홍재명이다. 홍로(洪魯)는 7세에 ≪효경(孝經)≫을 능통하게 읽을 정도로 총명하고 부지런했다. 장성해서는 성리학과 고금의 가례 및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등을 깊히 연구했다. 문장이 날로 늘어나자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득지(得之)의 문장은 참으로 콩과 쌀같이 이로운 물건이다.”라고 칭찬했다. 과거(科擧)에는 뜻이 없었으나 22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25세인 1390년(공양왕 2)에 대과에 급제했다. 포은(圃隱)의 추천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고, 문하사인(門下舍人)으로 승진되었다. 당시 조박(趙璞)과 오사충(吳司忠)이 이색(李穡)과 조민수(曺敏修)를 죄로 다스려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자, 그들을 적극 변호하여 사태가 더 진행되지 못하게 하였다. 나라가 점점 혼란해지자 병을 핑계로 사임하고 고향인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로 돌아와 부모 봉양과 독서와 사색으로 일관했다. 마을 이름은 원래 대식(大食) 혹은 대야(大夜)라 했으나, 경재(敬齋)가 대율(大栗)로 고치고 작은 서재를 지어 경재(敬齋)라 했다. 1392년 “신은 나라와 더불어 함께 망하겠습니다. 죽은 자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라는 말을 남기고 운명했다. 그의 무덤은 부계 동쪽 시현 간좌지원에 있다. 세인이 말하기를 “공의 학문의 연원은 포은에게서 얻었으며, 출처의 바름과 지절의 굳음, 소박한 학문 등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고 하였다. 군위군 부계면 남산면의 제2석굴암 위쪽 계곡 옆에 척서정(陟西亭)을 지어 후손들이 경제의 절의 정신을 추모하며 제향했다. 척서정 옆에 양산서원(陽山書院)을 세워 그의 절의와 학덕을 기리었으나 대원군(大院君) 때 철폐되고 현재는 양산서당으로 복원되었다. 가훈(家訓)을 비롯하여 시 몇 수가 남아 있다.
 
2)홍귀달(洪貴達, 1438~150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겸선(兼善), 호는 허백당(虛白堂)·함허정(涵虛亭). 사재감정 순(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득우(得禹)이고, 아버지는 증 판서 효손(孝孫)이며, 어머니는 노집(盧緝)의 딸이다.
1460년(세조 7)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464년 겸예문에 등용, 예문관봉교로 승직하였다. 1466년 설서가 되고 선전관을 겸하였다. 이듬해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공조정랑에 승직하면서 예문관응교를 겸하였다.
1469년(예종 1) 교리가 되었다가 장령이 되니 조정의 글이 모두 그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사예가 되었을 때 외직인 영천군수로 전출하게 되자, 그의 글재주를 아낀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의 반대로 홍문관전한과 예문관전한이 되었다. 이어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직제학·동부승지를 거쳐 충청감사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이어 도승지로 복직했으나, 연산군의 생모 윤비(尹妃)를 왕비에서 일반인으로 폐하고 쫓아내는 모의에 반대하다가 투옥되기도 하였다.
1481년(성종 12)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리고 1483년 ≪국조오례의주 國朝五禮儀註≫를 개정하고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그 뒤 형조와 이조의 참판을 거쳐, 경주부윤·대사성·지중추부사·대제학·대사헌·우참찬·이조판서·호조판서 겸 동지경연춘추관사 등을 역임한 뒤 좌참찬이 되었다.
15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직전에 열 가지 폐단을 지적한 글을 올려 왕에게 간하다가 사화가 일어나자 좌천되었다. 1500년 왕명에 따라 ≪속국조보감 續國朝寶鑑≫·≪역대명감 歷代名鑑≫을 편찬하고,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504년 손녀(彦國의 딸)를 궁중에 들이라는 왕명을 거역해 장형(杖刑)을 받고 경원으로 유배 도중 교살(絞殺)되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에도 능했으며, 성격이 강직해 부정한 권력에 굴하지 않았다. 모두들 몸을 조심하라 했으나, 태연히 말하기를 “내가 국은을 두터이 입고 이제 늙었으니 죽어도 원통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중종반정 후 신원(伸寃 : 원통함을 풀어버림)되었다. 함창의 임호서원(臨湖書院)과 의흥의 양산서원(陽山書院)에 제향되고, 저서로는 ≪허백정문집 虛白亭文集≫이 있다.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3)홍언충(洪彦忠, 1473~150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직경(直頃), 호는 우암(寓菴). 득우(得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효손(孝孫)이고, 아버지는 참찬 귀달(貴達)이며, 어머니는 김숙정(金淑正)의 딸이다.
1495년(연산군 1)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해에 또다시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부정자에 이어 정자·저작·박사 등을 역임하였다. 1498년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일으키기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하고, 질정관(質正官)·부수찬·이조좌랑 등을 역임한 뒤 병으로 사임하였다.
1503년 수찬(修撰)으로 복직해 교리(敎理)가 되고, 그 해에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글을 올려 임금을 간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가 다시 진안에 유배되었다. 이어 아버지 귀달이 경원으로 유배될 적에 또다시 해도(海島)로 이배되었다.
집안사람들은 그가 유배의 명을 받았을 때 몸을 피할 것을 권했으나 왕명을 어길 수 없다 해 조용히 길을 떠났다. 해도에 이배 중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풀려났다. 중종이 불러 직강(直講)을 제수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시와 술로 생을 보냈다.
천성이 신중하면서 솔직하고 재기가 있어 어릴 때에 이미 학문에 깊이 통달하였다. 문장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예서(隷書)를 잘 썼다.
그는 문장으로 정순부(鄭淳夫)·이택지(李擇之)·박중열(朴仲說) 등과 함께 당대의 사걸(四傑)이라 불렸다. 상주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자만사 自挽辭≫가 있다.
 

양산서원은 강당과 사당이 일렬로 위치하고 있는 전학후묘의 전형적인 배치를 따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축물로는 강당과 문서고, 전사청 등 총 3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소실된 사당의 초석이 남아있다.
 
양산서원에는
참고-경북서원지
군위군 관광군위 http://www.gunwi.go.kr/
문화재청 http://www.cha.go.kr/
신종우의 인명사전 http://www.shinjongwoo.c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