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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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양천서원(良川書院)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읍 내량리 산684-1
   홍관(洪灌) 홍언박(洪彦博) 홍위(洪瑋)
   1747년(영조 23)
   
   2월 27일 기준 가까운 일요일
   
1747년(영조 23)에 칠리탄(七里灘)에 ‘칠탄숙(七灘塾)’이라는 서당을 건립하였고, 1786년(정조 10) 서당의 북쪽에 사당을 세우고 홍언박(洪彦博)과 홍위(洪瑋)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지냈다. 1798년(정조 22) 서원으로 승격하여 홍관(洪灌)을 함께 배향하였다. 그 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88년에 중건하였다. 향사는 2월 27일 기준으로 가까운 일요일에 지내고 있다.
 

1) 홍관(洪灌)
미상∼1126년(인종 4). 고려의 문신‧서예가. 자는 무당(無黨). 시호는 충평으로 남양홍씨 시조 은열(殷悅)의 5세손, 군기감사(軍器監事) 홍덕승(洪德升)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1102년(숙종 7) 사관(史館)의 직사관(直史館)으로서 왕명으로 신축된 집상전(集祥殿: 왕의 정전)의 편액을 썼다. 신라의 김생(金生)의 필법을 본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회경전(會慶殿) 병풍에 《서경》의 무일편(無逸篇)도 썼다고 전하며, 《해동역사(海東繹史)》에는 보문각(寶文閣)‧청연각(淸讌閣)‧보전화루(寶殿畵樓)의 편액도 그의 글씨라 한다.
1111년(예종 6) 2월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고 이듬해는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되었다.
1113년 8월 예부상서(禮部尙書)로서 요(遼)에 정사(正使)가 되어 부사(副使)인 형부시랑(刑部侍郞) 김의원(金義)과 함께 다녀왔다.
1114년 12월 문덕전학사(文德殿學士)가 되고 1116년 7월 청연각학사, 1118년 정월 보문각학사가 되었으며, 청연각에서 《순전(舜典)》을 시강(侍講)하였다. 예종의 명으로 이궤(李軌)‧허지기(許之奇)‧박승중(朴昇中)‧김부일(金富佾)‧윤해(尹諧) 등 학사와 함께 삼한 이래의 사적을 모아 《편년통재속편(編年通載續編)》을 찬진하였다.
1116년 2월 국자좨주(國子祭酒)로서 국자감시(國子監試)의 시관(試官)이 되어 유승단(柳升旦) 등 99인을 뽑았고, 1123년(인종 1)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 임유문(林有文)과 함께 진사를 취하여 변순부(卞純夫) 등 30인을 급제시켰다.
인종 때 수사공 상서좌복야(守司空尙書左僕射)가 되었는데 이자겸(李資謙)의 난을 당하여 도성(都城)에서 직숙(直宿)하다가 변고를 듣고 들어가 왕을 시위하였으며, 왕이 연덕궁(延德宮)으로 옮기게 되자 노병(老病)으로 걷지 못하여 뒤따라가다가 서화문(西華門)에서 척준경(拓俊京)의 난군에게 살해당하였다.
뒤에 순절을 포상하여 추성보국공신 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수태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예부사 상주국(推誠報國功臣三重大匡開府儀同三司守太尉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禮部事上柱國)으로 추증되었다.
 
2) 홍언박(洪彦博)
1309년(충선왕 1)∼1363년(공민왕 12). 고려 후기의 문관. 자는 중용(仲容), 호는 양파(陽坡).
고려의 명필인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관(灌)의 7세손으로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 홍규(洪奎)의 손자이며, 삼사사(三司使) 홍융(洪戎)의 둘째아들이다. 외할아버지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나유(羅裕), 장인은 찬성사 권준(權準)이며, 공민왕의 모후인 명덕태후(明德太后)의 조카이다.
1330년(충혜왕 즉위) 문과에 급제하여, 1348년(충목왕 4) 밀직제학에 제수되고, 1352년(공민왕 1)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가 되었으며, 추성양절좌리공신(推誠亮節佐理功臣)이 되어 남양군(南陽君)에 봉해졌다.
1353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과거를 주관하여 이색(李穡) 등 33인을 뽑았고, 그해 11월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좌정승을 거쳐 우정승이 되었으며, 1356년에 문하시중이 되어 단성양절보리안사공신(端誠亮節理安社功臣)의 호를 받고 남양후(南陽侯)에 봉해졌다. 기철(奇轍)일파를 숙청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고, 1361년에는 다시 문하시중이 되어, 홍건적이 침입하자 피난하자는 여러 사람의 의견에 반대하고 개경을 사수할 것을 주장하였다.
서경이 함락되자 안동파천에 호종하여 개경수복의 방략(方略)을 건의하였다. 피난중 왕에게 절제생활을 권하고, 왕이 환도를 지연시키자 민폐를 줄이기 위하여 농한기에 환도할 것을 주장하여 왕이 이에 따르도록 하였다.
1362년에 지공거가 되어 동지공거 유숙(柳淑)과 함께 과거를 주관하여 박실(朴實) 등 33인을 뽑았다.
이듬해 김용(金鏞)이 주모한 흥왕사의 난 때 피살되었다. 호종공신(扈從功臣) 1등에 추록되고 정승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양파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3) 홍위(洪瑋)
1559년(명종 14)∼1624년(인조 2).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위부(偉夫), 호는 서담(西潭). 군위에서 출생하였다. 
참봉 홍우식(洪禹軾)의 손자로, 증한성부우윤 홍흔(洪訢)의 아들이며, 모친은 홍혼(洪渾)의 딸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1588년(선조 21)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92년 임진왜란을 맞아 부모를 정성껏 보호하였다.
이듬해 이원익(李元翼)이 체찰사로 파견되었을 때 수천언의 척화토적책(斥和討賊策)을 진언(陳言)하여 크게 참고하게 하였다.
1601년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지평‧예조좌랑‧성균관전적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통제영종사관(統制營從事官)으로 선임되어 통제사를 보좌하여 백성을 구휼하였으며, 전비를 강화하는 데 공이 컸다.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춘추관기사관‧세자시강원사서‧정언‧지평 등 요직을 역임하면서 직언으로 시사를 바로잡았다.
광해군대에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관직에서 물러나 후생교육에 힘썼다.
그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에 다시 벼슬길에 나가 병조정랑‧예천군수 등 내외직을 역임하였다. 정경세(鄭經世)‧장현광(張顯光) 등과 친교가 두터웠으며, 저서로는 서담집이 있다.

양천서원은 강당과 사당이 일렬로 위치하고 있는 전학후묘의 형태이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사당인 숭덕사(崇德祠), 강당과 비각, 유정문(由正門)이라 쓰여진 외삼문 등 총 4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경내에는 비석 3기가 있다.
 
참고-경북서원지
군위군 관광군위 http://www.gunwi.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