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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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섬계서원(剡溪書院)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 조룡445-1전
   김문기(金文起) 김현석(金玄錫) 장지도(張志道) 윤은보(尹殷保) 서 즐(徐 騭)
   1802년(순조 2)
   
   3월 중정(中丁)
   
1802년(순조 2)에 창건되었으며, 1868년(고종 3)에 대원군의 명으로 헐어서 걷어치우고 그 자리에 애석한 마음을 새겨 비를 세웠다. 1914년에 그곳에 강당만을 세웠다가 1959년에는 이 고을의 선비 이만영(李晩永) 박원동(朴元東) 이현돈(李鉉墩) 등이 각지 유림에서 재건의 호소문을 내고 본손인 김연식(金淵植) 철규(喆圭) 석규(錫圭) 정연(貞淵) 정수(正洙) 등이 사방에서 모금하여 1961년에 봄에는 본당인 세충사(世忠祠)를 다시 세워 종전의 주향만 봉안 하고 별묘까지에는 힘이 미치지 못하여 본당을 가로막아 동에는 삼현(三賢)을 향배하여 춘추로 향사하고 있으며 지금 이만영의 상량(上樑) 송문(頌文)이 있다.
1456년에 단종(端宗)이 세조(世祖)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박팽년(朴彭年) 등과 같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고 순절하고 1978년부터 사칠신(死七臣) 시비로 의견이 분부했던 이조판서(吏曹判書)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를 주향(主享)으로 하고, 맏아들 영월(寧越)군수 여병재 현석(如甁齋 玄錫)공을 배향(配享)하고, 동별묘(東別廟)에 장지도(張志道), 참봉(參奉)을 지낸 윤은보(尹殷保), 서즐(徐騭)을 배향하였다.

1)김문기(金文起, 1399~1456)
조선 전기의 문신. 초명은 효기(孝起).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白村). 충청북도 옥천 출신.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당대에는 본관을 김해(金海)로 사용하였으나, 후대에 이르러 그 후손들이 김수로왕(金首露王)의 후손인 김해김씨와 구별하기 위하여 김녕(金寧)과 경주(慶州)로 사용하는 두 파로 갈려졌다. 아버지는 관(觀)이다.
1426년(세종 8)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해 3년 동안 시묘하였다. 1430년 예문관검열, 1436년 사간원좌헌납을 거쳐, 1445년에 함길도도절제사인 박종우(朴從愚)의 천거로 함길도도진무(咸吉道都鎭撫)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1447년에 이질로 군무에 장기간 복무할 수 없게되자 내직으로 들어와 1448년에 겸지형조사(兼知刑曹事)에 임명되었다.
1450년 병조참의를 거쳐, 1451년(문종 1) 함길도도관찰사에 임명되자 임지에 가서 안변·정평 등지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1453년(단종 1)에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형조참판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외직인 함길도도절제사로 나갔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차사원(差使員)과 힘을 합쳐 유시에 따라 온성의 읍성을 축조하는 공사에 공을 세웠다. 그 해 또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다음 해인 1456년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주동한 단종 복위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모두 주살당할 때, 그도 이 사건에 관련되어 군기감 앞에서 처형되었다.
단종 복위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 6인의 절의(節義)를 ‘사육신’이라 했으며, 사육신의 사실은 남효온(南孝溫)이 쓴 ≪추강집 秋江集≫의 육신전(六臣傳)에 실려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그 뒤 1691년(숙종 17) 국가에서는 육신을 공인해 복관시켰고, 뒤따라 1731년(영조 7)에는 김문기를 복관하고 1757년에 충의(忠毅)란 시호를 내렸다.
또한 1791년(정조 15)에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여러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 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할 때, 그는 삼중신(三重臣 : 閔伸·趙克寬·金文起)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고, 성삼문·박팽년·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하위지(河緯地) 등 6인은 ≪추강집≫의 육신전대로 ‘사육신’에 선정되었다.
≪어정배식록≫은 정조가 내각과 홍문관에 명령해 ≪세조실록≫을 비롯한 국내의 공사 문적을 널리 고증해 신중히 결정한 국가적인 의전(儀典)이다. 이 때 김문기에게는 앞서 1453년 계유옥사 때 사절(死節)한 이조판서 민신과 병조판서 조극관과 같은 판서급의 중신이라는 이유로 삼중신이란 칭호를 내린 것이었다.
그의 사실을 기록한 ≪백촌유사 白村遺事≫ 3책이 전하며,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의 섬계서원(剡溪書院)에 향사되었다.
1977년 7월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사육신 문제를 규명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여러 차례 논의한 끝에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顯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 묘역에 그의 가묘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이 문제를 놓고 일부 학자들 사이에 찬반 양론이 벌어져 신문 지상에 그들의 논설이 게재되기도 하였다.
 
2)김현석(金玄錫)
김문기의 맏아들이며, 병자사화 당시 영월군수 부자가 동시 순절하였다.
 
3)장지도(張志道)
옥산 장씨, 수원 부원군 을포의 손자로 지례에서 태어나 고려 공민왕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기거주지의 주사에 오르고, 조선 건국 후 소감으로 조선초기 정치적 혼란과 정권을 둘러싼 골육적 참극을 바라본 나머지 환멸을 느껴 낙향한 후 육영에 헌신한 학자였다.
 
4)윤은보(尹殷保)
절효 윤은보는 서질(徐騭)과 함께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세충사(世忠祠)와 삼현별묘로 2개의 사우가 있으며 , 3칸의 강당, 3칸의 고사(庫舍) 등이 있다. 1914년에 강당만을 세웠다가 1961년에 봄에는 본당인 세충사(世忠祠)를 다시 세워 종전의 주향만 봉한 하고 별묘까지에는 힘이 미치지 못하여 본당을 가로막아 동에는 삼현사(三賢社)를 따로 사우를 내어 향배하여 춘추로 향사하고 있다.
참고-우리사이닷컴 http://www.wooricy.com/wooricy
김천시 문화관광 http://www.gimcheon.go.kr/culture/intro.htm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