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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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춘천서원(春川書院)
   경상북도 김천시 부향면 파천1리 248
   송시열(宋時烈)
   1756년(영조 32)
   
   불향
   
1756년(영조 32) 개령 사인(士人) 이경찬(李景瓚)이 독서당으로 창건한 것을 수령 김재학(金在鶴)이 사계 김장생의 후손으로 서원의 일에 관여하면서 송시열(宋時烈)을 독향으로 모셨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에 따라 강당만을 남기고 모두 훼철되었다. 현재 향사는 지내지 않고 있다.

1)송시열(宋時烈, 1607~1689)
조선후기의 학자·명신으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송갑조의 아들이며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으로부터 사사받았다. 27세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635년에는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어 훗날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일체의 관직을 사양하고 향리에 낙향하여 10년간 학문에만 몰두하던 중 1649년에 효종이 즉위하자 기용되어 북벌 계획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이후 송시열의 정치 생활은 북벌·예송과 관련하여 부침(浮沈)을 계속하였다.
조정에 나아가기보다는 향리에 은거한 기간이 대부분이었으나 사림의 중망 때문에 서인의 거두로, 혹은 노론의 영수로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1689년의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하면서 유배와 사약을 받은 이후, 송시열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 간의 칭송과 비방이 무성하였다. 그러나 1716년의 병신처분과 1744년의 문묘 배향으로 그의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은 공인되었고 영조 및 정조대에 노론의 일당 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역사적 지위는 더둑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송시열의 서원 제향은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 대대적으로 추진되어 청주의 화양서원을 비롯, 수원 매곡서원, 영동의 초강서원, 제주의 귤림서원, 강릉의 오봉서원, 경주의 인산서원 등 전국적으로 약70여개 소에 이르며 사액(賜額) 서원만도 37개소가 된다. 저서로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1868년 강당만을 남기고 모두 훼철되었다. 원래는 현재보다 더 넓은 대지에 건물이 7동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3칸 규모의 강당만 남아 있다. 서원으로 올라가는 길옆에는 하마비가 남아 있다.

참고-경북서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