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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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웅연서원(熊淵書院)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웅연
   다의당 채귀하, 나재 채수, 출재 채소권, 우담 채득소
   정종 을묘(1795)
   
   매년 4월 3째주 일요일
   
웅연서원은 산북면 서중리 웅연동에 있으며, 정종 을묘(1795)에 인천채씨 4현을 모신 웅연세덕사로 창건되어 다의당 채귀하, 나재 채수, 출재 채소권, 우담 채득소의 4현을 봉안하고 4년후인 무오(1798)에 서원으로 선액되었다가 고종 무진(1868)에 조령(朝令)에 의하여 훼철되고 현재는 유허비만 있다.
 

1) 채귀하(蔡貴河)
 자는 청일(淸一)이요, 호는 다의당(多義堂)이며 관은 인천이니 상서(尙書) 원길(元吉)의 아들이다. 여말에 포은 정몽주선생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호조전서를 지내셨다.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의 충절로 두문동에 들어가 스스로 맹서하기를 동비아사(東非我士)어니 수경재답(雖更再踏)이리오. 서망수양(西望首陽)하니 인망일심(忍忘一心)가 하고 날마다 채미도(採薇圖)를 바라보며 그 뜻을 굳게 하였다. 이태조가 호조판서로 여러번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시(諡)는 정의(貞義)이며 평산의현(平山義峴), 대구서산(大邱西山), 개성숭양(開城崇陽) 등 제서원(諸書院)에 배향되었다.
1392년 정몽주가 조영규(趙英珪)에게 살해됐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울면서 “세상일은 끝났도다”며 관복을 벗고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두문동에 머물다가 조선 개국 세력에 쫓겨 뿔뿔이 흩어질 때 채귀하는 예성강 포구인 벽란진을 건너게 됐다.
이때 함께 강을 건넌 여덟 전서(典書·조선의 판서 직책)가 있었다. 호조전서를 지낸 채귀하·변숙(邊肅)·이맹운(李孟芸)·박침(朴沈)·조안경(趙安卿), 공조전서를 지낸 서보(徐輔)·박심(朴諶)·박녕(朴寧)이 이들인데, 이들이 벽란진을 건넌 것을 두고 당시 사람들은 팔전도(八典渡)라 불렀다.
이때 벗들과 헤어지며 지은 채귀하의 시가 몇 편 전하는데, 그중에 ‘도진분로(渡津分路·나루를 건너며 길이 갈리다)’가 있다. “다 함께 두문동을 나와서/ 배를 잡아 앞다투어 나루를 건넜네/ 고려의 국록을 아직 잊지 못하는데/ 어찌 이씨의 신하가 되겠는가/ 바다를 건너겠다는 노중련의 절개 같고/ 고사리를 캐던 백이숙제와 한가지일세/ 나라 잃은 우리들의 원한을/ 답답하여 강물의 신에게 물어보노라.”
 
1982년 다의당 기리는 의현사 마련
채귀하가 벽란진을 건너 다다른 곳은 수양산 줄기인 평산의 목단산(牧丹山)이었다. 정확한 주소지는 황해도 연백군 목단면 아현리 다의현이다. 채귀하가 다의당이란 호를 가진 것도 이 지명에서 유래됐다. 그런데 채귀하보다 목단산에 먼저 들어와 살던 이가 있었는데, 그가 목은 이색(李穡)이다. 이색은 목단산의 서쪽 탁영대에, 동쪽 배록동에는 신황의(申黃衣)가, 가운데 다의현에 채귀하가 살았다. 채귀하는 이곳에 머물며 이색과 시문을 주고받았는데, 이색에게 보낸 글귀 중에 “망국의 한을 품은 몸이/ 죽지 않고 다시 무엇을 구하겠습니까”라는 대목이 보인다. 그는 다의현에서 송경(松京·개성)을 바라보며 이렇게 읊기도 했다. “하루 종일 산막에서 대사립 달아놓고/ 멀리 송악을 바라보니 저문 구름 어둡구나/ 가을 바람에 궁궐 터는 기장 밭이 된 듯하여/ 예로부터 외로운 신하는 눈물만 흘리네.”
채귀하는 목단산 다의현에서 백이숙제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고 살던 모습을 그린 채미도(採薇圖)를 보면서 절의를 지키다 생을 마쳤다. 그리고 목단면 의현리 불곡산에 묻혔다.
채귀하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두문동으로 들어가기 전에 맏아들 영(泳)은 고향에 돌아가서 조상의 제사를 지내고 고려 임금을 받들라 했고, 둘째 부(浮)는 평양으로 가서 아비와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살라 했고, 셋째 동양(東陽)과 넷째 명양(明陽)은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맏아들 채영(蔡泳)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고향 마을인 대구시 후동에서 얼마간 떨어진 팔공산 자락 미대동에 터를 잡고 살았는데, 그 후손들이 번창하여 인천군 채수를 배출하고 경상북도 인천 채씨의 맥을 형성하게 됐다. 남북 분단이 길어지면서 다의당의 묘소를 오래도록 찾지 못하게 된 인천 채씨 문중에서는 1982년 삼한시대에 축조된 대구 북구 검단동 검단토성 안에 다의당을 기리는 의현사(義峴祠)를 마련했다. 그리고 대구시 서변동 채영의 묘소 위쪽에 단소(壇所)를 만들어 시조를 모시고 있다.
 1740년(영조 16) 영조는 개성에 나가서 그들의 충의를 가상하게 여겨 고려충신부조현(高麗忠臣不朝峴)의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저서로는 《다의당실기》가 있다.
 
2) 채 수(蔡 壽 )1449년 ~ 1515년)
자는 기지(耆之)요, 호는 나재(懶齋)이며 관은 인천(仁川)이니 부사(府使) 신보(申保)의 아들이다. 세조 무자(1468)에 생원하고 다음 해에 갑과(甲科)에 장원, 전시(殿試)에 장원, 모두 삼장장원(三場壯元)을 함으로써 조선 이래 이석정과 함께 두 사람 뿐이었다. 수찬(修撰) 지제교(知製敎), 응교(應敎), 도승지, 관찰사, 한성좌윤, 대사성, 호·예·형조 참판 등 내외직을 역임하고 어릴 때부터 독서를 즐겨 산경지지(山經地誌) 패관인설(稗官人說)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으며, 시문과 명필로써 세인을 놀라게 하였다. 또한 도승지로 입시하여 천변의 득실을 극언하며 병자의 원옥을 말하니 왕이 이에 감오하고 수백인을 방면하였다. 병자(1504)사화에는 단성에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에 참여하였고 67세에 졸하였다. 시는 양정이며 임호서원에도 배향되었다.
 
3) 채소권(蔡紹權 ; 1480~154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인천(仁川). 초명은 김수동(金壽童)의 이름을 딴 수동(壽童)이다. 자는 효중(孝仲), 호는 졸옹(拙翁). 정국공신(靖國功臣) 지중추부사 수(壽)의 아들이다.
1504년(연산군 10) 진사가 되고, 1506년 별시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1511년(중종 6) 정언이 되었다.
1520년 홍문관부응교와 장령을 거쳐 사간·사헌부집의·홍문관 전한과 시독관(侍讀官)·동부승지가 되고, 1523년 좌부승지에서 승지가 되었다.
다음해 대사간에서 홍문관부제학이 되어 시폐오조(時弊五條)를 상소, 정령의 잦은 변개에 따른 폐단과 사족(士族)의 전가사변(全家徙邊)의 옳지 않음과 정신이 어둡고 쇠약하여 늙고 병든 자가 감(監)·시(寺)에 시위소찬(尸位素餐)하고 있음을 개탄하고, 사기(士氣)의 추향이 날로 낮아져서 문예(文藝)를 버리고 무거(武擧)에 나아가는 자가 점차 늘어나고 있으며, 향위(鄕圍:鄕試의 試場)에서의 시험부정의 속출을 지적하였다.
1528년 청주목사가 되고, 1531년 경기도관찰사, 1533년 대사헌·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다음해 한성부좌윤·형조참판이 되었으며, 1535년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김안로(金安老)의 처남이나 평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김안로가 정유삼흉(丁酉三兇)으로 몰렸을 때 홀로 큰 화를 입지 않았다. 그가 조정에 있을 때는 이현보(李賢輔), 주세붕(周世鵬)과 뜻이 맞았으며, 귀향하여서는 황준량(黃俊良)과 친교하였다.
愛日애일당에 이회재 운을 미루어 차운한다
堂追次李晦齋韻
삼조에 벼슬하고 팔순을 누려서 
급류에 용퇴는 세상에 잘 없다 
산림에 높은 취지는 도홍경(陶泓景)이요 
암학(巖壑)에 은거는 정자진(鄭子眞)이라 
그대는 명홍(冥鴻) 같이 날개를 펼치고 
나는 마른 물 붕어같이 비늘을 씻는다 
높은 정자 벽에 농(聾)이라 호(號)하니 
문득 세상 소리 귀에 들리는 것이 두렵다. 
- 채소권(蔡紹權), 『농암집(聾巖集)』
 
4) 채득소(蔡得泝)
자는 영이(詠而)요, 호는 우담(雩潭)이며 관은 인천이니 간사 유부의 종자이다. 선조 갑진(1604)에 출생하여 청음 김상헌 문인으로 유일로 별제에 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자천대에 은거하였다. 인조 무인(1638)에 효종이 번양에 있을 때 서로 만나 지우가 되고 을유(1645)에 봉가동환(奉駕東還)하여 자천대 석면에 새기되 숭정일월(崇禎日月) 대명천지(大明天地)라 하여 채미의 굳은 뜻을 보였다. 세상에서는 대명처사라 칭하였다. 사후에 임금으로부터 치제문위조(致祭文慰弔)하고 정종조에 집의에 증직되었다. 삼강록, 존주록, 배신록 등에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