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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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구양서원(龜陽書院)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거촌3리
   변안열(邊安烈) 변경회(邊慶會) 변극태(邊克泰)
   1908년
   
   2월 하정, 8월 하정
   
1908년 3월 사림이 변씨일가 충효열(忠孝烈) 3개 탁절사(卓節事)를 정단(呈單)하고 7월에 봉화군 유생 78인이 정포(旌褒)를 정장(呈狀) 하였다.
1914년 문중공의로 세덕사를 건립하고 변안열, 변경회를 보양하다.
1924년 후손(後孫) 주관으로 묘우, 강당, 서재등을 신축하고 사림의 공의에 따라 구양리사로 승격되어 매년 2월 8워렝 사림이 제향하다.
1984년 후손 변교우(邊敎雨)가 자비로 중수하고 규모를 확장하여 묘우, 전사청 동서재 삼문, 문루, 주사, 기타 부속건물을 신축하고 경내의 조경 진입로, 주차장등을 신설하였다. 이에 사림이 도통(道通)이 답래(踏來)하여 서원으로 승격되고 11월 10일 유림이 운집하여 대은선생을 주벽으로 하고 백산, 봉은 양 선생을 배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변안열(邊安烈 1334~1390)
자는 충가(忠可), 호는 대은(大隱)으로 원주변씨 시조이다. 변(邊)씨는 본래 자성(子姓)이었으나 은(殷)나라 미중(微仲)의 후손으로 미중이 송(宋)에 봉(封)하여 진후 평공(平公)에 이르러 아들 어융(御戎)의 자(字)가 자변(子邊)으로 이에 연유하여 자손이 姓으로하였다. 대대로 농서(隴西)의 변(汴)땅에 살았으나 송말(宋末)에 바다를 건너 東으로 와서 취성(取城)에 거주하니 지금의 황주(黃州)땅이다. 고려 고종(高宗)때에 휘(諱)여(呂)가 충절이 있어 상장군(上將軍)에 제수(除授)되고 태천백(泰川伯)에 봉하여졌다. 그 후 여(呂)의 자 휘(諱)윤(允)은 진사로 서해도 안찰사(按察使)되고, 안찰사가 휘(諱) 유(宥)를 낳으니 공부의랑(工部議郞)이었으며 유(宥)의子 휘(諱)제(制)는 검교참의정사(檢校參議政事)였고 제(制)의 子 휘(諱)눌(訥)은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이며 눌(訥)의子 휘(諱) 석(碩)은 문과통례(文科通禮)로 문장에 명성이 높았고 그 제(弟)순(順)은 원(元)나라에서 벼슬하여 심양후(瀋陽侯)에 봉(封)하여졌고 고려조에서는 삼중대광문하찬성사(三重大匡門下贊成事)를 추증되었으며 순(順)의子 휘(諱)양(諒)은 公의선고(先考)이시다.
세습(世襲)으로 심양후(瀋陽侯)가 되고 고려에서는 성근익조공신호(誠勤翊祚功臣號)와 벽상삼한삼중대광문하판삼사사(壁上三韓三重大匡門下判三司事)에 증직(贈職)되었으며 부인은 곽(郭)씨이시다.
公은 원통(元統) 三年 甲戌年(1334) 4월 갑자(甲子)에 瀋陽에서 出生하였다.
지정(至正) 十一年 辛卯年(1351) 1월에 十八歲로 무과(武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그 해 바로 형부상서(刑部上書)로 승진하였다.
12월 경자(庚子)에 원(元)나라 장공주(長公主)가 고려 강릉대군(江陵大君)에게 출가(出嫁)하여 고려로 환국(還國)시 수장(首將) 배행(陪行)하여 조정에서 벼슬을 하게 되었다.
壬辰年에 공민왕(恭愍王)이 외척(外戚)인 판추밀(判樞密) 원의(元顗)의 따님으로 처(妻)를 삼게하여 원주(原州)로 사적(賜籍)하니 원(元)씨의 본관이 원주(原州)이기 때문이다.
壬寅年(1362)에 안우(安祐)를 따라 홍건적을 격파하고 공훈이등(功勳二等)에 판소부감사(判小府監事)가 되고 안우(安祐)와 더불어 경도(京都)를 수복하여 공훈일등(功勳一等)에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제수(除授)되고 추성보조공신호(推誠補祚功臣號)를 받았다.
이어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승진하고 다시 전직(轉職)하여 지삼사사밀직사사(知三司使密直司事)가 되었다.
癸丑年(1373) 8월 의용우군(義勇右軍)을 총괄하게 되고 甲寅年(1374) 9월 최영(崔瑩)과 함께 탐라(耽羅)를 평정 판밀직사사 지문하부사(判密直司事 知門下府事)가 되고 평리(評理)로 전직되었다.
乙卯年(1375)에 상왕(上王)이 즉위하고 공이 부원수(副元帥)로 심왕(瀋王)을 격파한 공으로 수충양절선위 익찬공신호(輸忠亮節宣威 翊贊功臣號)를 받았다. 丙辰年(1276)에 양광전라도지휘사 겸 조전원수(楊廣全羅道指揮使 兼 助戰元帥)로 출전하였다가 11월에 부령(扶寧)등행(登幸)안산(安山)에서 나세(羅世) 조사민(趙思敏) 유실(柳實)등과 같이 병사를 독려 왜구(倭寇)를 대파하여 노획함이 많아 승전보를 올리니 왕이 백금 한 덩이와 말안장과 의 복을 하사(下賜)하고 개선(凱旋)하니 도당(都堂)이 천수사(天壽寺)에 나희(儺戱)를 열어 영접하고 公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승진하였다. 丁巳年(1377) 3월 경기도총사(京畿道摠使)에 제수되어 왜구를 격파하고 4월에 서강(西江)에 침입하자 최영(崔瑩)과 더불어 격파하였다. 5월에 수원(水原)양성(陽城)에서 왜구(倭寇)를 격파하고 8월에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해주에서 왜(倭)를 격파하고 최영(崔瑩)과 더불어 해평(海平)에서 왜(倭)를 격파하였다.
庚申年(1380)왜(倭)가 대병(大兵)을 일으켜 침입하여 하삼도(下三道)주군(州郡)을 도륙(屠戮)하고 인민을 살해하여 지나는 곳에서 피바다가 되어 왜구의 환란(患亂)이 있은 이후로 이런 일은 없었다.
왕이 이성계(李成桂)를 양광,전라,경상,삼도순찰사(楊廣,全羅,慶尙,三道都巡察使)로 公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命하여 공격하게 하니 운봉인월역(雲峰引月驛)에서 크게 격파하여 냇물이 붉은 빛이 되어 六,七日동안 變하지 아니하였으며 말 一千六百餘 匹과 병장(兵仗)을 무수히 노획하고 승전(勝戰)을 보고하니 王이 크게 기뻐하고 궁에서 빚은 술을 내려 위로 하였다. 10月에는 위세를 떨치고 개선(凱旋)하니 王이 命하여 최영(崔瑩)이 백관을 거느리고 채색(彩色)한 누각(樓閣)을 지어 천수문(天壽門)에서 마중하고 이성계와 公에게 각각 황금(黃金) 五十兩을 하사하였다.
壬戌年(1382) 4월에 단양(丹陽)에 왜적이 침입하자 공이 도원수(都元帥)로 한방언(韓邦彦)과 더불어 격파하고 八千餘名을 참하고 말 二百餘匹을 노획하였다. 5월에는 또 한방언(韓邦彦)등과 더불어 왜구를 안동(安東)에서 격파하니 三千餘名을 참(斬)하고 말 六十匹을 노획하여 공훈록(功勳錄)에 오르고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에 封해졌으며 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戊辰年(1388)에 이성계(李成桂)와 요양(遼陽)정벌에 나아가 위화도(威化島)에 일러 의거(義擧) 회군하였다. 6월에 왕이 강화도(江華島)로 추방되니 통곡하고 두문불출하였다.
公이 목은 이색(牧隱 李穡)과 더불어 정비(定妃)의 교지를 받들어 왕자(王子)를 옹립하였다.
9월에 상왕(上王)을 여흥으로 옮기자 사사로이 알현(謁見)하고 나와 영입(迎入)할 계획을 세우니 이후 왕실의 믿음과 조정의 명망이 매우 높았다.
이성계가 아들을 시켜 포은(圃隱)과 公을 초청하여 술을 권하고 노래 하여가(何如歌)를 부르니 포은(圃隱)이 단심가(丹心歌)로 公은 불굴가(不屈歌)로 화답 하였다.
己巳年(1389) 이색(李穡)과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우왕(禑王)의 아들 창왕(昌王)을 옹립(擁立)하였다. 이에 공은 영삼사사(領三司事)에 승진하였다. 같은 해 11월에 대호군(大護軍)김저(金佇)가 밤에 이성계(李成桂)의 집에 들어가 모해(謀害)하려고 하다가 도리어 잡혀 국문(鞠問)에 불복(不服)하다가 칼로 발바닥을 가르고 불로지지자 묻는 대로 자복하니 이것을 구실로 公을 연루시켜 드디어 옥사가 이루어졌다.
이에 상왕(上王)을 강릉(江陵)으로 옮기고 王子 창왕(昌王)을 강화도(江華島)로 추방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하였다.
庚午年(1390) 1월에 낭사(郎舍) 윤소종(尹紹宗) 이첨(李詹) 오사충(吳思忠)등이 疏로 논죄(論罪)할 것을 주청(奏請)하여 公을 사형(死刑)으로 다스리도록 청(請)하자 王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다만 삭탈관직(削奪官職)하였다. 다음날 또 상소(上疏)하니 왕이 오히려 관대(寬大)히 하여 한양(漢陽)으로 유배시키도록 하였다. 다음날 또 성문(城門)밖에서 도적이 겁탈(劫奪)이 있고 궁궐(宮闕)뜰에 여우가 출현하는 것이 공의 소행이라고 면전(面前)에서 아뢰고 물러나온 후로 다섯 차례나 더 상소(上疏)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성석린(成石磷)이 대역죄(大逆罪)로 논계하니 王이 부득이 그 소를 헌사로 보내 유배지(流配地)에서 국문(鞫問)하지 말고 죄를 다스리라 하니 평리사(評理事)가 아뢰기를 대신(大臣)이라 하여 그 죄를 문초(問招)하지 아니하고 극형(極刑)에 처함은 불가(不可)하다 하여 王이 좌사의(左司議) 오사충(吳思忠) 집의(執義) 남재(南在)에게 命하여 가서 국문(鞫問)하도록 하니 일행이 벽제역(碧蹄驛)에 이르러 공이 이미 피화(被禍)되었음을 들었다.
이해 4월 회군(回軍)의 공을 기록하여 교서(敎書)에 말하기를 변안열(邊安烈)은 몸은 이미 죽었으나 장의 회군(回軍)한 功은 잊을 수 없다하고 녹권(錄券)을 추가로 하사하고 직첩을 환급, 묘지(墓地)를 하사(下賜)하여 양주(楊州) 주엽산(注葉山)의 언덕에 의관장(衣冠葬)으로 장사(葬事)하였다.
辛未年(1391) 9월에 무고로 이초(彛初)의 사건에 연루(連累)시켜 훈적(勳籍)을 삭탈(削奪) 하고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였으나 壬申年(1392) 이성계(李成桂)가 즉위(卽位)하면서 의를 들어 가산(家産)을 다시 환급(還給)하고 公의 배위(配位) 진한국부인(辰韓國夫人) 원씨(元氏) 사이 三男 一女를 아들은 다시 벼슬길에 오르게 하고 딸은 이방번(李芳蕃)에게 출가하였다. 그 후 辛卯年(1591) 후손이 발의하여 진산(晉山) 우복(愚伏)정경세(鄭經世)가 신도비(神道碑) 비문(碑文)을 찬술하였다.
甲申年(1824) 삼남의 유림이 한 목소리로 발문하여 운봉(雲峯)인월역(引月驛)에 선생(先生) 수훈(樹勳)의 땅에 사원(祠院)을 건립하여 제향(祭享)하기로 논의가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5년이 지난 戊子年에 선생을 위하여 충절(忠節)이 포은(圃隱)과 더불어 다를바 없으므로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추가로 배향(配享)할 것을 논의 하였으나 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庚午年(1930) 자손들이 평북태천(平北泰川)에 송곡서원(松谷書院)을 세우고 公을 봉안고유(奉安告由)하였다.
己酉年(1969) 신도비(神道碑) 제막식(除幕式)에 박정희대통령(朴正熙大統領)이 고유(告由) 하다.
丁亥年(2007) 자손들의 공의(公議)에 의해 전(前) 국사편찬위원장(國史編纂委員長) 이성무 박사(李成茂博士)가 찬술(撰述)한 박정희대통령(朴正熙大統領) 고유(告由) 기념비(紀念碑)를 세우다.
 
2)변경회(邊慶會 1549~1639)
자(字)군우(君遇) 호(號)백산(栢山) 시조(始祖) 대은(大隱) 변안열(邊安烈)先生의 七代 孫으로 己酉年(1549)에 출생하였다. 1592년에 공이 임공(任公)흘(屹)과 금공(琴公)윤선(胤先)과 더불어 의병을 창의(倡義)하니 公을 소모장(召募將) 겸 운량감(運糧監)으로 추대(推戴)하였다. 공이 향내(鄕內)에 글을 지어 깨우치고 가자(家眥)를 전부 팔아 백미(白米)300석과 콩50석을 사서 진중(陣中)에 수송헌납하고 공의 삼종숙(三從叔) 충장공(忠壯公) 응정(應井)이 이문(移文)으로 호남에 큰 흉년으로 군민을 같이 먹여야할 때 도움을 청(請)하므로 또 집과 토지를 팔아서 피곡500석을 영천(榮川)과 순흥(順興)에서 사서 호군에 군량으로 실어 보내 호군이 크게 이겨 公을 세우고 영진(嶺陣)이 공을 세운 것도 다 공의 노력(努力)이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평정된 후 조정(朝庭)은 公에게 조산대부(朝散大夫) 장악원(掌樂院)직장(直長)의 직첩을 내렸다.
丙子年(1636)에 성하지맹(城下之盟)이 있자 서향하여 통곡(痛哭)하고 두문(杜門) 자취를 감춘 후 몰(歿)하였다. 성품이 지극한 효성으로 백세(百歲)의 모부인(母夫人)을 섬기고 모부인(母夫人) 병환(病患)에는 후원(後園)에 단을 쌓고 항상 하늘에 축수하였는데 효자가 하늘에 축수(祝壽)하던 터가 남아있다.
대질(大耋)에 통정대부(通政大夫) 호군(護軍)에 승진(陞進)하고 향년(享年)은 九十一歲에 호(號)를 백산(栢山)이라하였다.
 
3)변극태(邊克泰 1654~1717)
자(字)여화(汝和) 호(號)봉은(鳳隱) 시조(始祖) 대은(大隱) 변안열(邊安烈)先生의 11代 孫으로 벽산공의 현손(玄孫)이다.
公은 풍채(風采)가 뛰어나고 심성(心性)은 성실(誠實), 친절(親切)하여 힘써 배우고 천성(天性)이 지극한 효자(孝子)였다. 공이 동자 때에 어머님의 상을 당하여 복중(服中)에 있어 바깥 여막(廬幕)에 기거(起居)하였다.
그 해에 큰 흉년(凶年)이 들어 어느 날 밤에 강도(强盜) 여러 명이 父公 침실(寢室)에 들어와서 창과 둔기가 교차하는데 맨몸으로 뛰어들어 흰 칼날의 위험(危險)을 무릅쓰고 도적에게 크게 부르짖어 말하기를 “나를 죽이고 아버지를 상(傷)하게 마라” 하고 도적이 좌를 치면 좌로 막고 우로 치면 우로 막아 살과 뼈가 거의 끊어지는 창상(創傷)을 온몸에 입고도 부친(父親)을 위하여 생명을 구걸(求乞)하는 말이 입에서 끊어지지 않으니 도적(盜賊)들도 역시 본받을 만한 효행(孝行)에 버려두고 물러갔다. 도적이 물러간 뒤 많은 의원(醫員)이 모여들어 침과 약을 갖추어 치료하였으나 쇠 독(毒)이 더욱 극에 달하여 명이 경각(頃刻)에 있는데 어떤 의원(醫員)이 말하기를 팔을 끊어야 목숨을 얻을 수 있다하니 公이 야단을 치며 말하기를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요, 내 훼손된 상처가 부모를 위한 것이니 가히 내 한 몸을 살기 위하여 내 사체(四體)를 훼손할 수가 있겠는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팔을 자를 수 없다고 하였다. 치료(治療)한 지 수월(數月)에 부공(父公)의 꿈에 홍의인(紅衣人) 상제(上帝)명이라며 용뇌(龍腦)라는 약을 주며 말하기를 바르고 부치며 또 마시면 살 수 있을 것이다. 또 말하기를 걱정하지 말라 이 사람은 효자(孝子)이니 죽지 않는다. 그 후손도 반드시 번창(繁昌)할 것이다.
꿈을 깬 후에 그 약을 구하여 바르고 부치니 과연(果然) 14개월 후에 소생(甦生)하니 양팔 아래 흉터가 패여 피리모양과 같고 전신 곳곳이 완전하지 아니하였다. 또 公의 집에 효구(孝狗)가 나니 사람들이 동생(蕫生)의 개에 비유하였다. 정묘(正廟) 丙辰年(1796)에 사림(士林)이 예조(禮曹)에 정문(呈文)하고 관찰사(觀察使)가 조정에 아뢰어 순묘(純廟) 戊辰年(1808)에 조봉대부(朝奉大夫)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증직(贈職)되었다.

1)대지(垈地) : 676평
2)건물(建物) : 한식목조 흑개와 한시담장
3)묘우(廟宇) : 숭절사(崇節祠) (四間半)
4)강당(講堂) : 염수당(念修堂) (八間)
5)동재(東齋) : 온습재(溫習齋) 四間半
6)서재(西齋) : 무민재(懋敏齋) 四間半
7)삼문(三門) : 유정문(由正門) 三間
8)전사청(典祀廳) 一間
9)장서각(藏書閣) 二間
10)대문(大門) 五間
11)주사(廚舍) 七間
12)기타부속건물(其他附屬建物) 三間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