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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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낙암서원(洛嵓書院)
   경상북도 상주시 중동면 죽암리 산29
   김담수(金聃壽) 김정용(金廷龍) 김정견(金廷堅)
   1745년(영조 21)
   
   음력 3월 중정(中丁)
   
낙암서원은 김담수(金聃壽)와 두 아들 김정용(金廷龍), 김정견(金廷堅)을 배향한 곳이다. 1745년(영조 21)에 설립되어 향사되어 오다가 1870년(고종 7)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단소만 남아있었던 것을 1988년 다시 복원하였다. 낙동강이 멀리 바라보이고 야트막한 산이 뒤를 둘러싼 배산임수형에 위치한다. 낙암은 그 마을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1796년(정조 20)에 건립되었다는 설도 있다. 음력 3월 중정(中丁)에 향사지낸다.

1)김담수(金聃壽, 1535~1603)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태수(台叟), 호는 서계(西溪). 경상도 성주 출신. 아버지는 참봉 관석(關石)이며, 어머니는 순천박씨로 탄(坦)의 딸이다.
어려서는 조식을 사사하였고, 오건(吳健)에게서 ≪심경≫·≪근사록≫을 배웠으며, 황준량(黃俊良)에게서 ≪중용≫과 ≪대학≫을 강의받았는데, 모두 지극한 칭찬을 받았다. 김우옹(金宇顒)·정구(鄭逑)와 도의로 사귀었고, 벗을 사귐에서는 어진 이를 가까이하고 선행을 즐겼으며, 모든 행실이 겸손하였다.
특히 지극한 효성으로 명성이 있었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건강으로 과거를 포기하고 두문불출, 경전공부에 정진하였다. 그리고 항상 가내법규를 엄중히 하여 친척간에 친애함과 불의를 행하지 말 것을 강조하여 우애가 돈독하였다.
1591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선공감참봉(繕工監參奉)을 제수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머니와 함께 가야산으로 피란하였다.
주로 도학을 닦고 후학의 진흥에 힘썼다. 성주의 청천서원(晴川書院)과 상주의 낙암서원(洛嵓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서계일고≫ 3권 1책이 규장각도서에 전한다.
 
2)김정용(金廷龍, 1561~16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 자는 시현(時見), 호는 월담(月潭). 선공감참봉 담수(聃壽)의 아들로서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585년(선조 1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박사를 거쳐, 1586년 예안현감이 되었다. 현감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량미 수송에 공이 커 왕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1607년 예조좌랑·병조좌랑을 지내고, 그뒤 영월군수·풍기군수·이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집안의 효를 이어받아 일생동안 ≪소학 小學≫에 정력을 기울였다. 상주의 낙암서원(洛嵓書院)에 제향되었다.
 
3)김정견(金廷堅, 1576~1645)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훈경(勳卿), 호는 국원(菊園). 아버지는 담수(聃壽)이다. 정구(鄭逑)·정경세(鄭經世)의 문인이다. 1612년(광해군 4)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향리에서 학문 연구에 힘썼다.
먼저 정구에게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배웠고, 뒤에 상주의 정경세를 따라 도학을 닦았는데, 임진왜란의 와중에서도 경의(經義)의 연마에 힘쓰고 후진양성에 노력하였다. 상주의 낙암사(洛嵓祠)에 제향되었다.

서원 가장 높은 자리에는 사당인 상덕사(象德祠)가 있고, 내삼문은 소수문(昭修門)이라는 솟을대문으로 세웠다. 강당은 서원을 복원하며 지은 것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이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 경북서원지
신종우의 인명사전 http://www.shinjongw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