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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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봉산서원(鳳山書院)
   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 금산리 584
   노수신(盧守愼) 심희수(沈喜壽) 성윤해(成允諧) 김홍미(金弘微) 조우인(曺友仁) 정호선(丁好善) 황익재(黃翼再)
   1688년(숙종 14)
   
   음력 3월 하정(下丁)
   기영회도(耆英會圖)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19호(1986.12.11지정)
본 서원의 전신은 명종년간에 신잠목사가 세운 상주의 18개 서당의 하나인 봉산서당(鳳山書堂)으로 이곳은 노수신이 생전에 이곳에서 지역의 유생들을 위해 강학을 하던 곳으로 소재 선생이 시호를 받아 나라에서 선생의 사당에 치제를 하니 이곳의 유생들이 생전에 선생이 강학을 하시던 서당을 서원으로 승원(陞院)하기로 하여 1688년(숙종 14) 노수신(盧守愼)을 주벽으로 하고 배향에 심희수(沈喜壽), 성윤해(成允諧) 세분을 모시고 서원으로 출발하였다. 봉산서원은 오래전부터 서당이 있던 곳으로 소재선생이 고향에 오시면 자주 들리던 곳에 서당을 짓고 서원으로 하였다. 후에 추배로 김홍미(金弘微), 조우인(曺友仁), 정호선(丁好善), 황익재(黃翼再)를 더하여 칠현을 모시게 되었다. 1770년(영조 46), 1841년(헌종 7) 두 차례에 걸쳐 중수하였으나,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1923년 단(壇9)을 건립하였으며, 1975년도에 복원하여 오늘까지 음력 3월 하정(下丁)일에 원근의 유림을 봉청하고 위 일곱분 자손들의 협조를 받아 향사를 지속하고 있다.

1)노수신(盧守愼, 1515~1590)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이재(伊齋)·암실(暗室)·여봉노인(茹峰老人). 우의정 숭(嵩)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 홍(鴻)이다. 1531년 17세에 당시 성리학자로 명망이 있었던 이연경(李延慶)의 딸과 결혼하고, 장인의 문하생이 되었다.
1541년 27세 때 이언적(李彦迪)과 최초의 학문적 토론을 벌였다. 154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한 뒤로 전적(典籍)·수찬(修撰)을 거쳐, 1544년에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가 되고, 같은 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인종 즉위 초에 정언이 되어 대윤(大尹)의 편에 서서 이기(李芑)를 탄핵해 파직시켰으나, 1545년 명종이 즉위하고,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이조좌랑의 직위에서 파직, 1547년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그 후 양재역벽서 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죄가 가중됨으로써 진도로 이배되어 19년간 섬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동안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했고, 진백(陳柏)의 <숙흥야매잠 夙興夜寐箴>을 주해하였다.
이 주해는 뜻이 정명(精明 : 정교하고 명확함.)해 사림 사이에 전송(傳誦 : 전하여 외워옴)됨으로써 명성이 전파되었다. 또한 ≪대학장구 大學章句≫와 ≪동몽수지 童蒙須知≫ 등을 주석하였다.
1565년 다시 괴산으로 이배되었다가 1567년에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나와 즉시 교리(校理)에 기용되고, 이어서 대사간·부제학·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 등을 지냈으며, 1573년에는 우의정, 1578년에 좌의정을 거쳐 1585년에 영의정에 이르렀다.
1588년에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으나, 이듬해 10월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에 정여립을 천거했던 관계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는 시·문·서예에 능했으며, 경일(敬一) 공부에 주력할 것을 강조하고 도심미발(道心未發)·인심이발설(人心已發說)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양명학(陽明學)도 깊이 연구한 탓에 주자학파의 공격을 받았다. 또한 승려인 휴정(休靜)·선수(善修) 등과의 교분을 통해 학문적으로 불교의 영향을 입기도 하였다.
학문에서는 그가 일찍이 옥당(玉堂)에 있을 때 경연에서 ≪서경≫을 강함에 인심도심(人心道心)의 설명이 주자설과 일치했으나, 진도로 유배되어 그 당시 들어온 나흠순(羅欽順)의 ≪곤지기 困知記≫를 보고 난 후는 전설(前說)을 변경해 도심은 미발, 인심은 이발이라고 해석하게 되었다.
한편 그의 덕행과 업적의 성과는 매우 다양해, 인군과 백성들, 그리고 많은 동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가 진도에 귀양갔을 때 그 섬 풍속이 본시 혼례라는 것이 없고 남의 집에 처녀가 있으면 중매를 통하지 않고 칼을 빼들고 서로 쟁탈하였다. 이에 예법으로써 섬 백성들을 교화해 드디어 야만의 풍속이 없어졌다.
또한 아버지의 상을 당했을 때 대상 후에 바로 흑색의 갓을 쓰는 것이 죄송하다고 생각해 백포립(白布笠)을 쓰고 다니기를 국상(國喪) 때와 같이 했는데, 그 뒤 직제학 정철(鄭澈)이 이를 본받아 실행했고, 뒤에 교리 신점(申點)이 주청해 담제(禫祭) 전에는 백포립을 쓰도록 제도화시켰다.
그는 온유하고 원만한 성격을 가진 문신이자 학자로서 사림의 중망을 지녔으며, 특히 선조의 지극한 존경과 은총을 받았다.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봉산서원(鳳山書院), 진도의 봉암사(鳳巖祠),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소재집≫ 13권 8책이 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며, 뒤에 문간(文簡)으로 고쳤다.
 
2)심희수(沈喜壽, 1548~16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백구(伯懼), 호는 일송(一松) 혹은 수뢰루인(水雷累人). 장령(掌令) 순문(順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지동녕부사 봉원(逢源)이고, 아버지는 정자(正字) 건(鍵)이다. 어머니는 이연경(李延慶)의 딸이다.
노수신(盧守愼)의 문인으로, 1570년(선조 3)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 해 이황(李滉)이 죽자 성균관을 대표하여 장례에 참여하였다. 157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보임되고 1583년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89년 헌납(獻納)으로 있을 때 정여립(鄭汝立)의 옥사가 확대되는 것을 막으려다 조정과 뜻이 맞지 않아 한때 사임했다가 이듬해 부응교(副應敎)가 되었다. 1591년에는 응교로서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동래에서 일본사신을 맞았으며, 이어 간관이 되어 여러 차례 직언을 하다 선조의 비위에 거슬려 사성(司成)으로 전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의주로 선조를 호종하여 도승지로 승진하고, 대사헌이 되었다. 때마침 명나라 조사(詔使)가 오자 다시 도승지가 되어 응접했는데 이는 그가 중국어를 잘 했기 때문이다. 이 해 겨울 형조판서를 거쳐 호조판서가 되어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의 접반사(接伴使)로서 오래도록 서도(西道)에 있었으며, 송응창을 설득하여 관서의 기민 구제(飢民救濟)에 진력하였다.
1599년 예문관제학·예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가 되고,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고서 안으로 사명(辭命 : 왕명의 전달)을 장악하고 밖으로 외국 사신의 접대에 힘썼다. 좌찬성·우찬성 등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1606년 성균관에서 익명의 투서가 나왔는데, 선조가 이를 색출하기 위해 유생들의 심문을 고집하자 그 불가함을 말해 뜻을 관철시켰으며, 그 해 가을 좌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을 추숭하려 하자 예전(禮典)에 어긋남을 강력하게 표하여 논의를 중지시켰다.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다시 좌의정으로 재상에 올랐다. 그러나 권신 이이첨(李爾瞻) 등이 국정을 장악하여 임해군(臨海君)을 극형에 처하려 하자 그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가 일어나 부원군 김제남(金悌男)이 죽고 이이첨 등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옥사의 주모자로 몰아 해치려 하자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 등과 강력하게 그 부당성을 논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듬해 영창대군의 처형은 인륜에 어긋나며, 그 가해자인 강화부사 정항(鄭沆)을 참수하라고 주장하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산 정온(鄭蘊)을 적극 변호, 귀양에 그치게 하였다.
1615년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있을 때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허균(許筠)과 중국 야사(野史)에 나타난 종계문제(宗系問題)로 다투다가 궐외로 축출되고 이듬해 폐모론이 다시 일자 둔지산(屯之山)에 은거하여 ≪주역≫을 읽고 시를 읊으며 자신의 지조를 지켰다.
1620년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다. 저서로 ≪일송집≫이 있다. 상주의 봉암사(鳳巖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3)성윤해(成允諧,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화중(和仲), 호는 판곡(板谷). 상주 출신. 아버지는 참봉 근(近)이며, 운(運)의 조카이다.
원통산(圓通山) 밑에 집을 짓고 서책과 자연에 묻혀 일생을 보냈는데, 만년이 된 1583년(선조 16) 이이(李珥)·정지연(鄭芝衍)·이후백(李後白) 등의 추천으로 왕자사부(王子師傅)·태인현감 등의 관직이 내려졌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조헌(趙憲)의 상소에 숨은 선비 중에 언론과 풍지(風旨)가 바르고 굳센 최고의 인물이라고 평가되었다. 상주의 봉산서원(鳳山書院)과 물계의 세덕사(世德祠)에 제향되었다.
 
4)김홍미(金弘微, 1557~160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창원(昌遠), 호는 성극당(省克堂). 예강(禮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郞) 윤검(允儉)이고, 아버지는 옥과현감(玉果縣監) 범(範)이며,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이다. 조식(曺植)과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1579년(선조 12) 진사가 되고, 1585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에 발탁되고, 홍문관정자·저작(著作), 예문관검열 등을 거쳐 부수찬을 역임하였으며, 당시 형인 홍민(弘敏)과 함께 사림으로 영예를 누렸다.
1589년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남인으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되었다. 그 뒤 복관되어 1592년 임진왜란이 시작될 무렵에는 경상좌도도사가 되고, 이어 교리 겸 시강원문학을 거쳐 이듬해 경연관·응교·사간·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597년 승정원동부승지로 있을 때,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李舜臣)을 탄핵하여 파면하게 하고 원균(元均)을 통제사로 삼게 하는 데 가담하였다. 그 뒤 좌부승지·훈련도감제조를 거쳐, 형조참의·대사간·이조참의·승문원부제조 등을 역임하다가 1598년 관직을 사퇴하였다.
그 이듬해 다시 청송부사(靑松府使)를 거쳐 1604년 강릉부사로 부임하였는데, 이듬해 큰 비가 내려 백성이 많은 재난을 당하였다. 이에 약한 몸을 이끌고 수재로 죽은 자의 조문과 굶주린 자의 진휼에 힘써 직무에 충실하다가 병이 악화되어 관직에서 물러났다.
 
5)조우인(曺友仁, 1561~162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여익(汝益), 호는 매호(梅湖)·이재(㶊齋). 경상도 예천 출생. 우부승지 계형(繼衡)의 증손자며, 몽신(夢臣)의 아들이다.
1588년(선조 21)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0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다가 1616년(광해군 8)에는 함경도 경성판관을 지냈다.
1621년에는 제술관(製述官)으로 있으면서 고궁(古宮)이 황폐하고 폐허가 되어 있음을 보고 느낀 바를 글로 지어 광해군의 잘못을 풍자하였다가 필화(筆禍)를 입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후 인조의 등극으로 풀려나 상주(尙州)의 매호에서 은거하며 여생을 마쳤다.
시·서예·음악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그의 가사집 ≪이재영언 㶊齋詠言≫에는 <매호별곡 梅湖別曲>·<자도사 自悼詞>·<관동속별곡 關東續別曲>·<출새곡 出塞曲> 등 4편의 가사작품이 실려 전한다.
<매호별곡>은 1624년경 그가 노경에 은거하던 상주군 사벌면 매호리에서 자연을 벗하며 한가롭게 살아가는 은일사(隱逸士)의 정경을 노래한 것이다.
<자도사>는 광해군이 간신배들에게 둘러싸여 못된 정사를 하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풍자하였다가 옥고를 치른 그의 나이 61~63세 때인 1621~1623년에 지은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이다.
<관동속별곡>은 만년에 정철(鄭澈)의 <관동별곡>을 읽고 느낀 바가 있어 전날 젊었을 때에 유람하였던 관동지방 여행소감을 추억하며 정철의 <관동별곡>과의 중복을 피하여 지은 기행가사이다. 이 가사의 서문에는 <속관동별곡>이라고 하여 이 작품의 이름은 두 가지로 불린다.
<출새곡>은 1616년 가을에 경성부사로 제수되어 이듬해 봄에 변방의 산천풍토와 봄놀이를 두루 즐긴 뒤, 서울의 흥인문을 떠나 임지인 경성에 다다르기까지의 노정에서 얻은 견문과 임지에서의 봄놀이, 그리고 변방 목민관의 고독감 등을 노래한 기행가사이다. 저술로는 문집 ≪이재집 㶊齋集≫과 가사집 ≪이재영언≫이 있다.
 
6)정호신(丁好信, 1571~1633)
조선 중·후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사우(士優), 호는 동원(東園). 병조판서 옥형(玉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찬성 응두(應斗)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윤복(胤福)이며, 어머니는 사헌부감찰 한경상(韓景祥)의 딸이다. 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과 교유하였다.
1601년(선조 34) 진사가 되고, 이 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이어 이조정랑·직강·사예·전적·지평·정언·수찬·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1609년 승문원판교로 춘추관편수관을 겸하여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장령·사간을 거쳐 강원도관찰사로 부정을 범한 춘천부사 이원엽(李元燁), 양양현감 신경우(申景遇)를 파직시켜 지방의 관기를 바로잡았다. 1613년 집의·전한을 지내고, 1616년 사인으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가 득세, 계축옥사를 일으켜 영창대군(永昌大君)·김제남(金悌男) 등을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이 대두되어 정세가 크게 혼란하자 상주목사로 나가면서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은퇴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이후 다시 기용, 안변부사로 있을 때 이괄(李适)의 역모를 알리는 고변서에 그 이름이 기재되었으나, 아우 호서(好恕)가 정주목사로서 이괄의 사자를 베고 군사를 일으켜 근왕(勤王)을 함으로써 화를 면할 수 있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파수대장(把守大將)으로 좌도의 병사를 거느리고 죽령(竹嶺)에 진을 쳤다가 강화가 성립되어 철수, 이듬해 병으로 사임하였다.
 
7)황익재(黃翼再, 1682~174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재수(再叟), 호는 백화재(白華齋). 희(喜)의 10대손이며, 집(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재윤(載胤)이고, 아버지는 증 좌승지 진하(鎭夏)이며, 어머니는 상산김씨(商山金氏)로 진붕(震鳳)의 딸이다.
1701년(숙종 2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었고, 박사·병조좌랑을 거쳐 평안도사를 지냈다. 1705년 성균관전적·예조좌랑이 되고, 이듬해 병조좌랑을 거쳐, 1707년 충청도도사가 되었다.
1709년 전라도사에 재직할 때에는 조세의 조운과정(漕運過程)에서 발생하는 폐단을 엄격히 단속하였고, 1711년 무안현감으로 있을 때에는 거듭된 흉년으로 피폐해진 농민들의 구휼에 힘썼다.
어사 홍석보(洪錫輔)가 그의 치적을 조정에 주달하여 포상이 내려지고, 나주조군의 통솔권을 받았다. 그 뒤 사헌부장령·영광군수를 거쳐 1728년(영조 4)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종성부사가 되었다.
이 때 도순무사 오명항(吳命恒)과 영남안무사 박사수(朴師洙)와 함께 청주에 이르러 이인좌(李麟佐)의 반란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도리어 적도들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받아 구성에 유배되었다. 7년 뒤인 1736년에 사면되어 복직의 명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낙향하였다.
향리에서 성리학 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상주의 봉산사(鳳山祠)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백화재집≫·≪서행일록 西行日錄≫이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 4칸의 강당, 5칸의 재소, 4칸의 고사와 봉산지부도신도비, 봉산지사적비, 하마비등이 있다. 특히 신도비는 허목(許穆)이 노수신에 관하여 지은 것으로 유명하며 2000년에 국고보조 2억원으로 협소한 묘우를 10m 뒤편에 중창하고 2003년 국고보조 1억원으로 내삼문과 묘우 담장을 하고 2006년 10월에 국고 2억원으로 강당 건립을 추진 2007년에 완공하여 오늘에 이른다.

봉산서원에는 ‘오현상(五賢像)’과 ‘기영희도(耆英會圖)’ 두 점의 그림이 소장되어 있다.
 
 
1)기영회도(耆英會圖)-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19호(1986.12.11지정)
기영회도란 70세 이상의 원로 사대부로 이루어진 기로소의 모임 장면을 그린 것으로, 이 그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였던 노수신(1515~1590) 선생이 기로소에 든 뒤 그린 그림이다.
기로소의 모임은 풍류를 즐기고 친목을 위해 열렸으며 고려시대에 시작되어 조선시대에 크게 유행하였다. 초기에는 주로 산이나 강가에서 열렸으나 16세기 이후에는 건물내로 그 장소를 옮기었다. 모임에 화공을 참가시켜 참가자 수 만큼의 그림을 그려서 나누어 주고 각자의 가문에 보관토록 하였다.
화폭에는 모임 장면 뿐 아니라 모임의 명칭을 적은 제목과 참가자의 이름, 호, 관직 등을 적어 두는데, 학술적 의미 뿐 아니라 당시 문인들 생활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참고-경북서원지
노씨중앙종친회 http://rohs.or.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