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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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임호서원(臨湖書院)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신흥리 377
   홍귀달(洪貴達) 표연말(表沿沫) 채 수(蔡 壽) 권달수(權達手) 채무일(蔡無逸)
   1590년(선조 23)
   
   음력 3월 상정(上丁)
   
1590년(선조 23) 함창현 서쪽 10리 입암산(立巖山) 아래에 성악서당(城嶽書堂)터에 검암서원(儉巖書院)을 설립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1691년(숙종 17)에 함창현 남쪽 성암서당 옆에 중건하고, 홍귀달(洪貴達), 표연말(表沿沫), 채수(蔡壽), 권달수(權達手)을 배향하였던 것을 채무일(蔡無逸)을 추배하면서 임호서원(臨湖書院)이라 했다. 1871년(고종 8)에 훼철되고 1910년 설단하여 제향하여 오다가 1988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 복원하였다.

1)홍귀달(洪貴達, 1438~150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겸선(兼善), 호는 허백당(虛白堂)·함허정(涵虛亭). 사재감정 순(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득우(得禹)이고, 아버지는 증 판서 효손(孝孫)이며, 어머니는 노집(盧緝)의 딸이다.
1460년(세조 7)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464년 겸예문에 등용, 예문관봉교로 승직하였다. 1466년 설서가 되고 선전관을 겸하였다. 이듬해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공조정랑에 승직하면서 예문관응교를 겸하였다.
1469년(예종 1) 교리가 되었다가 장령이 되니 조정의 글이 모두 그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사예가 되었을 때 외직인 영천군수로 전출하게 되자, 그의 글재주를 아낀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의 반대로 홍문관전한과 예문관전한이 되었다. 이어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직제학·동부승지를 거쳐 충청감사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이어 도승지로 복직했으나, 연산군의 생모 윤비(尹妃)를 왕비에서 일반인으로 폐하고 쫓아내는 모의에 반대하다가 투옥되기도 하였다.
1481년(성종 12)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리고 1483년 ≪국조오례의주 國朝五禮儀註≫를 개정하고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그 뒤 형조와 이조의 참판을 거쳐, 경주부윤·대사성·지중추부사·대제학·대사헌·우참찬·이조판서·호조판서 겸 동지경연춘추관사 등을 역임한 뒤 좌참찬이 되었다.
15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직전에 열 가지 폐단을 지적한 글을 올려 왕에게 간하다가 사화가 일어나자 좌천되었다. 1500년 왕명에 따라 ≪속국조보감 續國朝寶鑑≫·≪역대명감 歷代名鑑≫을 편찬하고,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504년 손녀(彦國의 딸)를 궁중에 들이라는 왕명을 거역해 장형(杖刑)을 받고 경원으로 유배 도중 교살(絞殺)되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에도 능했으며, 성격이 강직해 부정한 권력에 굴하지 않았다. 모두들 몸을 조심하라 했으나, 태연히 말하기를 “내가 국은을 두터이 입고 이제 늙었으니 죽어도 원통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중종반정 후 신원(伸寃 : 원통함을 풀어버림)되었다. 함창의 임호서원(臨湖書院)과 의흥의 양산서원(陽山書院)에 제향되고, 저서로는 ≪허백정문집 虛白亭文集≫이 있다.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2)표연말(表沿沫, 1449~1498)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신창(新昌). 자는 소유(少游), 호는 남계(藍溪)·평석(平石). 함양 출신. 할아버지는 을충(乙忠)이고, 아버지는 감찰 계(繼)이며, 어머니는 정랑 안홍기(安鴻起)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약관에 문행(文行)이 세상에 알려지고 당대의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문장에 뛰어났다. 같은 문하의 조위(曺偉)·김일손(金馹孫) 등과 깊은 교유관계를 가졌다. 1469년(예종 1) 사마양시에 합격했고, 1472년(성종 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에 들어가고, 1485년 사의(司議)로서 ≪동국통감≫ 찬수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문과중시에 다시 병과로 급제한 뒤, 장령·사간 등을 거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490년에는 이조참의·대사성이 되고, 1492년에는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벼슬 첫길인 예문관 시절에 한림의 여러 선생들이 관례로 신관(新官)들을 침포(侵暴)하여 금육(禁肉)과 여악(女樂)으로 주연(酒宴)을 베푼 사실이 성종에게 알려져 징계가 내렸는데, 그도 이 자리에 들었다가 파직되어 향리로 돌아가 지내게 되었다.
이후로 향회(鄕會)에서 금육을 차린 것을 보면 결코 성법(聖法)을 다시 어길 수 없다 하고 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고 한다. 부모의 상을 주자의 ≪가례≫에 따라 치른 일로써, 스승인 선산부사 김종직의 추천을 받아 자급(資級)이 하나 높여졌다. 그 뒤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무오사화 때 경원으로 유배가던 중 객사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였다. 과거시험에서 서거정(徐居正)의 문생이 된 인연으로 ≪필원잡기 筆苑雜記≫의 서문을 쓰기도 하였다. <논학 論學>이라는 글에서 김종직의 문인을 중심으로 하는 초기 사림파의 학문관과 정치관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1507년(중종 2)에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어 함양의 남계서원(蘫溪書院), 함창의 임호서원(臨湖書院)에 제향되었다. 1517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854년(철종 5)에 후손 석준(奭峻)이 간행한 ≪남계문집≫ 4권 2책이 전한다.
 
3)채수(蔡壽, 1449~1515)
조선 중기의 문신·중종반정공신.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기지(耆之), 호는 나재(懶齋). 영(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필선 윤(綸)이고, 아버지는 남양부사 신보(申保)이다. 어머니는 유승순(柳承順)의 딸이다.
1468년(세조 14) 생원시에 합격하고, 1469년(예종 1) 식년문과에 장원하여 사헌부감찰이 되었다. 1470년(성종 1) 예문관수찬이 된 뒤, 홍문관교리·지평·이조정랑 등을 역임하면서 ≪세조실록≫·≪예종실록≫의 편찬에 관계하였다.
1477년 응교가 되어 임사홍(任士洪)의 비행을 탄핵했으며, 승지를 거쳐 대사헌으로 있을 때 폐비윤씨(廢妃尹氏 : 연산군 생모)를 받들어 휼양할 것을 청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벼슬에서 물러났다.
1485년 비로소 서용되어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가 하정사(賀正使)·성절사(聖節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성균대사성 등을 거쳐 호조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이후 줄곧 외직을 구하여 무오사화를 피하였다. 1499년(연산군 5) 이후 예조참판·형조참판·평안도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갑자사화 때는 앞서 정희대비(貞熹大妃)가 언서(諺書)로 적은 폐비 윤씨의 죄상을 사관(史官)에게 넘겨준 것이 죄가 되어 경상도 단성으로 장배(杖配)되었다가 얼마 후 풀려났다.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여기에 가담,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인천군(仁川君)에 봉군되었다.
그 뒤 후배들과 함께 조정에 벼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경상도 함창(咸昌 :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에 쾌재정(快哉亭)을 짓고 은거하며 독서와 풍류로 여생을 보냈다. 사람됨이 총명하고 박람강기하여 천하의 서적과 산경(山經)·지지(地誌)·패관소설(稗官小說)에까지 해박하였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시문에는 특히 뛰어나 어려서부터 문예로 이름을 얻을 정도로 당대의 재사였다. 1511년(중종 6) <설공찬전 薛公瓚傳>이라는 패관소설을 지어 윤회화복을 말하다가 사림의 비난을 받아 불태워지기까지 하였다.
김종직(金宗直)에게 종유(從遊)하고, 특히 성현(成俔)과 교제가 깊었다. 사신으로 북경을 내왕하는 길에 요동명사(遼東名士)이던 소규(邵圭)와도 친교를 맺었으나, 당시 새로이 등장하던 사류(士類)와는 잘 화합하지 못하였다.
1703년(숙종 29) 함창의 사림에 의하여 그의 고장에 임호서원(臨湖書院)이 건립되고 표연말(表沿沫)·홍귀달(洪貴達) 등과 함께 제향되었다. 저서로 ≪나재집≫ 2권이 있다. 좌찬성에 추증되고,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4)권달수(權達手, 1469~150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통지(通之), 호는 동계(桐溪). 회(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순(有順)이고, 아버지는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 임(琳)이며, 어머니는 이보정(李補丁)의 딸이다.
1492년(성종 2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고, 1495년(연산군 1) 독서당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정언·이조좌랑을 역임한 뒤 동지사의 종사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95년 대교(待敎)로서 검열 강징(姜澂)과 함께, 왕명을 내릴 때에는 승지와 사관(史官)이 반드시 참석하도록 건의하였다. 1498년 수찬에 올라 부교리를 역임하고, 1504년 연산군의 생모 윤씨를 종묘에 모시려 하자, 그 부당함을 주장하다가 의금부에 하옥되어 장(杖) 60의 처벌을 받고 용궁(龍宮)에 유배되었다.
그 해 11월 용궁에서 다시 의금부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던 중 옥사하였다. 그는 기개와 절조가 있는 인물이었다는 평을 받았다. 중종 때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1693년(숙종 19) 함창 임호서원(臨湖書院)에 제향되었다.
 
5)채무일(蔡無逸, 1496~1556)
조선 중기의 문신·문인·화가.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거경(居敬). 호는 일계(逸溪). 함창 출생. 신보(申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국공신(靖國功臣) 지중추부사 수(壽)이고, 아버지는 전생참봉(典牲參奉) 윤권(胤權)이며, 어머니는 부림군(富林君) 식(湜)의 딸이다.
1522년(중종 17) 생원이 되었다. 그 당시 고모부인 김안로(金安老)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김안로는 그가 대과에 급제하면 자기에게 방해될 것을 두려워하여 대간들을 사주하여 그를 진우(陳宇)의 일당으로 몰아서 1534년 남해로 귀양을 가게 하였다.
김안로가 실각한 뒤인 1537년 귀양에서 풀려나, 1540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정언·좌랑을 지냈다. 1544년 부안현감으로 있을 때 중종이 사망하였는데, 그림 재주에 뛰어난 그가 선화(善畵)로 천거되어 왕명을 받고 선왕인 중종의 화상을 그려 바쳤다.
이로써 이조정랑에서 헌납이 되었고, 왕명을 받아 간의(簡儀)를 수리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그 기술이 너무나 뛰어나므로 탄복하였다. 경사(經史)와 역(易)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서화·음률·의학·복서(卜筮)에도 뛰어나 명성이 높았다. 특히 중종대에 선비로서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풀벌레그림에는 가장 저명하였다. 벼슬이 한성서윤에 이르렀다. 함창의 임호서원(臨湖書院)에 배향되었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당인 경현사(景賢祠) 3칸과 강당 3칸이 동서 횡렬로 배치되어 있다. 사당인 경현사는 1988년 원래의 장소로부터 현재의 장소로 이전하여 복원하였다고 한다.


참고-경북서원지
관광 상주 http://www.sangju.g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