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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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운양서원(雲陽書院)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운정리 517
   여희림(呂希臨)
   미상
   
   음력 2,8 마지막 丁日 寅時(인시)에 행사(行祀)
   
운양서원은 여희림(呂希臨)의 위패를 봉안한 서원으로써 그가 1553년에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뒤 언제인지는 모르나 천곡서원 향현사(鄕賢祠)에 위패를 모시고 추앙되었다. 1868년(고종 5)에 서원철훼령으로 서원이 훼철되었다가, 1874년 사림의 힘으로 운양서원(雲陽書院)이 세워져, 다시 명덕사(明德祠)에 위패를 모시고 춘추향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향사일은 음력이월 마지막 정일(丁日)과, 음력팔월 마지막 정일(丁日)에 향사한다.
이 서원의 첫이름은, 연봉산(延鳳山) 밑에 자리잡았기에 연봉서원(延鳳書院)이었다. 내이름이 伊川(이천)이요, 동산이름이 운곡산(雲谷山)이라, 이천운곡(伊川雲谷) 네글자에서, 川谷(천곡) 두글자를 따서 정구(鄭逑)가 이황(李滉)에게 품하여, 천곡서원(川谷書院)으로 바꾸게 된 것이라 한다. 1874년에 서원이 다시 세워지면서 운양서원이라 하였다.
 

1)여희림(呂希臨, 1481~1553)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대지(大之). 호는 원정(圓亭). 성주 출생. 성종 때 원종공신이며 감역인 우창(遇昌)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우의정 이용(利用)의 손녀이며, 목사 현정(顯廷)의 딸이다.
18세에 용봉산(龍鳳山)에 있는 절에 들어가 도형(都衡)·이광(李光) 등과 함께 학문을 닦았는데, 그 해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이 화를 당하자 이에 과거볼 생각을 단념하고 사림(士林)으로서 지냈다.
당시 그는 도학과 문장으로 크게 명성이 나 있었으며, 김안국(金安國)·소세양(蘇世讓)·정사룡(鄭士龍) 등과 교우관계를 가졌다. 1507년(중종 2) 사마시에 합격하고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과 도의로 교우를 맺었다.
1510년에는 서경덕(徐敬德)을 찾아가 변역(變易)·소장(消長)의 이치에 관해 문답, 서로 계합한 바 있다. 1516년에는 고향에 내려가 주자(朱子)가 가감, 증보한 ≪여씨향약 呂氏鄕約≫을 시행하였다.
그 이듬해 정광필(鄭光弼)의 추천에 의해 불차탁용(不次擢用)으로 복성군(福城君)의 사부가 되었다. 1519년 현량과(賢良科)가 설치되자 그의 형 희단(希端)과 함께 천거되었으나 응시를 거절, 기묘사화에 화를 면하였다.
1533년 김안로(金安老)가 경빈 박씨(敬嬪朴氏)를 폐하고 복성군을 연일(延日)로 귀양보낼 때 전일에 사부를 지냈다는 이유로 기장(機張)에 유배되었다가 함평에 이배 후 풀려났다. 1538년 다시 등용되어 지평에 이르렀다. 성주의 천곡사(川谷祠)에 제향되었다. 그의 사적 등을 수록한 ≪원정실기≫가 있다.

경내의 건물은 크게 두 개의 영역으로 구분되어 배치되어 있다. 정문인 유의문, 강당인 거인당(居仁堂)과 동서재 등이 튼 ‘ㅁ’자로 배치되어 있고, 이들 영역의 동쪽으로 명덕사(明德祠)와 내삼문으로 구성된 사당영역이 병렬로 배치되어 있다.

서원 내에는 각 건물의 현판과 비석 1기가 있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편, 경북서원지
재경 성산여씨 종친회 http://sungsanyeo.com/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