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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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회연서원(檜淵書院)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 257
   정 구(鄭 逑) 이윤우(李潤雨) 송사이(宋師頤) 이홍기(李弘器) 이홍량(李弘量) 이홍우(李弘宇) 이 서
   1583년(선조 16)
   1690년(숙종 16)
   음력 2월, 8월 중정(中丁)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51호(1974.12.10지정)
이 서원은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이며 학자인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하여 그의 제자들이 뜻을 모아 세운 서원이다. 서원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한강이 선조 16년(1583년)에 회연초당(檜淵草堂)을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던 곳이었다. 한강 사후에 문도들이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인조 5년(1627년)에 회연초당이 있던 자리에 한강을 주향(主享)으로 모신 서원을 건립하여 향사(享祀)를 지냈으며, 숙종 16년(1690년) 사액받았다. 초기에는 강당·사당을 위시하여 지경재(持敬齋)·명의재(明義齋)·양현청(養賢廳) 등의 건물이 있었으나 고종 5년(1868년) 서원훼철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75년에 사당(祠堂)을 1976년에 동·서재 신축하고 담을 보수하는 등 서원의 위용을 회복하였다.

1)정구(鄭逑, 1543~1620)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철산군수 윤증(胤曾)의 종손으로, 할아버지는 사헌부감찰 응상(應祥)이고, 아버지는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으로 충좌위(忠佐衛) 부사맹(副司孟) 사중(思中)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로 환(煥)의 딸이다.
6대조 총(摠)과 그 아우인 탁(擢)이 개국공신에 책봉되는 등 본래 공신가문으로 대체로 한양에서 살았으나 부친이 성주이씨와 혼인하면서 성주에 정착하였다. 둘째 형인 곤수(崑壽)는 문과에 급제해 병·형조 참판, 의정부좌찬성 등 주요 관직을 지낸 관리였다.
5세에 이미 신동으로 불렸으며 10세에 ≪대학≫과 ≪논어≫의 대의를 이해하였다. 13세인 1555년 성주향교 교수인 오건(吳健)에게 역학을 배웠는데 건(乾)·곤(坤) 두 괘(卦)만 배우고 나머지 괘는 유추해 스스로 깨달았다 한다.
1563년에 이황(李滉)을, 1566년에 조식(曺植)을 찾아 뵙고 스승으로 삼았으며, 그 무렵 성운(成運)을 찾아 뵙기도 하였다. 1563년 향시(鄕試)에 합격했으나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1573년(선조 6) 김우옹(金宇顒)이 추천해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는 등 여러 번 관직에 임명되어도 사양하다가 1580년 비로소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1584년 동복현감(同福縣監)을 거쳐, 이듬해 교정청낭청(校正廳郎廳)으로 ≪소학언해≫·≪사서언해≫ 등의 교정에 참여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통천군수(通川郡守)로 재직하면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다. 1593년 선조의 형인 하릉군(河陵君)의 시체를 찾아 장사를 지낸 공으로 당상관으로 승진한 뒤 우부승지, 장례원판결사·강원도관찰사·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전체적으로 중앙 관직보다는 지방의 수령으로 더 많이 활약하였다.
1603년 ≪남명집 南冥集≫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정인홍(鄭仁弘)이 이황과 이언적(李彦迪)을 배척하자 그와 절교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임해군(臨海君)의 역모사건이 있자 관련자를 모두 용서하라는 소를 올리고 대사헌직을 그만두고 귀향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려 했으며, 1617년 폐모론(廢母論) 때에도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인(庶人)으로 쫓아내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이를 계기로 만년에 정치적으로 남인으로 처신하지만 서경덕(徐敬德)·조식 문인들과 관계를 끊지 않았기 때문에 사상적으로는 영남 남인과 다른 요소들이 많았으며, 뒤에 근기남인 실학파에 영향을 주었다.
문인으로는 서사원(徐思遠)·송원기(宋遠器)·손처눌(孫處訥)·한준겸(韓浚謙)·문위(文緯)·장흥효(張興孝)·이윤우(李潤雨)·허목(許穆)·황종해(黃宗海) 등이 있다.
학문은 성리학과 예학뿐만 아니라 제자백가·역사·산수(算數)·병진(兵陣)·의약(醫藥)·복서(卜筮)·풍수지리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박학하였다.
특히 예학에 조예가 깊어 1573년 ≪가례집람보주 家禮輯覽補註≫를 저술한 이래 ≪오선생예설분류 五先生禮說分類≫·≪심의제조법 深衣製造法≫·≪예기상례분류 禮記喪禮分類≫·≪오복연혁도 五福沿革圖≫ 등 많은 예서를 편찬했으며, 이황의 예에 관한 서신을 모은 ≪퇴계상제례문답 退溪喪祭禮問答≫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그의 예학은 국가례(國家禮)와 사가례(私家禮)를 하나의 체계 속에 종합적으로 정리하려는 주자의 총체적인 예학을 추구하였다. 동시에 왕례(王禮)와 사례(士禮)의 차별성을 강조해 17세기 예학의 한 경향인 왕사부동례(王士不同禮)의 단초를 열었다.
이는 ≪의례경전통해 儀禮經傳通解≫의 체재를 모범으로 하고 사마광(司馬光)·장재(張載)·정호(程顥)·정이(程頤)·주자 등의 예설을 바탕으로 해 가(家)·향(鄕)·방국(邦國)·왕조례(王朝禮)를 복원한 ≪오선생예설분류≫에 잘 나타나 있다.
읍지에도 관심이 많아 1580년 ≪창산지 昌山誌≫를 편찬한 이래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지역마다 거의 예외 없이 읍지를 편찬해 ≪동복지 同福志≫·≪관동지 關東志≫ 등 7종의 읍지를 간행하였다.
특히 ≪영가지 永嘉志≫·≪평양지 平壤志≫ 등의 편찬에도 관여해 후대의 읍지들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함주지 咸州志≫ 하나 뿐이다. 읍지 편찬의 목적은 생민(生民)도 있었지만 풍속의 순화와 교육, 즉 교화에 주안점이 있었다.
성리설(性理說)은 이황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은 부분으로 경전 가운데 특히 ≪심경 心經≫을 중시하였다. 외출할 때에도 손에서 떼지 않았으며 아침·저녁으로 읽고, 제자를 가르치는 주된 교재였다 한다.
1603년 정민정(程敏政)의 ≪심경부주 心經附註≫를 비판한 이황의 ≪심경후론 心經後論≫을 계승해 ≪심경발휘 心經發揮≫를 저술했는데, 육구연(陸九淵)의 입장을 반영한 정민정의 설을 모두 삭제하고 이정(二程, 정이, 정호)과 주자의 설을 새롭게 재구성한 것이다.
≪심경≫은 경(敬)을 요체로 하는 성리학의 수양방법을 잘 제시한 책으로 16세기 후반 이후 영남 이황학파의 하나의 학문적 특색으로 자리잡았다. 이외에 역시 이황의 저술인 ≪주자서절요 朱子書節要≫를 분류해 ≪개정주자서절요총목 改定朱子書節要總目≫을 편찬했으며, ≪성현풍범 聖賢風範≫·≪수사언인록 洙泗言仁錄≫·≪염락갱장록 濂洛羹墻錄≫ 등의 성리서를 저술하였다.
역사서로는 주자의 ≪자치통감강목 資治通鑑綱目≫의 영향을 받으면서 연표형식으로 중국사와 한국사를 정리해 뒤에 나타나는 정통론과 강목체 사서와의 매개 역할을 한 ≪역대기년 歷代紀年≫과 역대 인물들의 정리와 평가의 성격을 지닌 ≪고금충모 古今忠謨≫·≪치란제요 治亂提要≫ 등을 저술하였다.
또한 문학서로서는 ≪고금회수 古今會粹≫·≪주자시분류 朱子詩分類≫ 등을 편찬했으며, 의학서로는 눈병에 대한 처방을 담은 ≪의안집방 醫眼集方≫과 집에 소장한 의학서에서 출산과 육아에 대한 내용을 뽑아 정리한 ≪광사속집 廣嗣續集≫ 등이 있다.
다양한 분야에 걸친 방대한 저술은 이황학파의 주자를 기반으로 한 학문적 전통과 서경덕·조식학파의 박학(博學)의 전통을 계승한 결과였다. 근기남인 실학파의 탈주자학적 사상의 뿌리 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이 서경덕·조식에 있었는데 그는 이 한 부분을 전달해주는 교량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인조반정 직후인 1623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625년 문목(文穆)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성주 회연서원(檜淵書院)·천곡서원(川谷書院), 칠곡의 사양서원(泗陽書院), 창녕의 관산서원(冠山書院), 충주의 운곡서원(雲谷書院),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한강 선생을 회연서원(檜淵書院)에 봉안한 글

아 우리 선생은 / 惟我先生
선현의 학문을 계승하여 / 學承先賢
도가 참으로 높일 만하오니 / 道合隆尙
선비들의 의논이 똑같습니다 / 士論同然
한훤당을 받들어 이어 / 奉繼寒暄
천곡서원에 올려 제향하오니 / 躋享川谷
 
연원이 유래가 있어 / 淵源有自
후학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 準範來學
지방에서는 다시 상의하기를 / 鄕復共議
우리들을 친히 지도해 주어 / 吾黨親炙
가르침이 아직 귓가에 남아 있사오니 / 餘敎在耳
어느 때인들 잊겠습니까 / 曷時有忘
유택이 몸에 있사오니 / 遺澤在身
갱장의 생각간절하옵니다 / 思切羹墻
특별히 정성을 펴 / 特地伸誠
별묘에 향화를 올리오니 / 別廟香火
정리상 그만둘 수 없고 / 情所罔已
의리에 불가함이 없습니다 / 義無不可
이 회연서원은 / 相此檜淵
일찍이 높이 건축하였습니다 / 曾是高築
지역이 선영의 산소와 가까우므로 / 地邇岡原
망운재라 현판을 달았습니다 / 望雲齋額
봄에 비 내리고 가을에 서리 올 제 / 春雨秋霜
성묘하여 효도를 편 곳입니다 / 孝省攸跡
산이 둘러 있고 물이 앞에 흐르며 / 繞嶂臨流
매화나무와 대나무가 무성히 자라고 있습니다 / 百梅修竹
여기에서 덕을 쌓고 / 於以畜德
여기에서 의를 강하였습니다 / 於以講義
한가로이 노닐며 뜻을 얻고 / 盤桓得意
조용히 기르며 즐거워했습니다 / 遵養樂志
어느 언덕과 어느 돌인들 / 何丘何石
향기가 남아 있지 않겠습니까 / 有非留馥
옛 동산을 돌아보면 / 顧瞻舊園
아직도 손수 심은 나무가 남아 있습니다 / 猶存手植
사당을 세우고 정성을 올리오니 / 立祠致虔
사리에 진실로 합당하옵니다 / 事理允洽
굳이 점을 치지 않고 / 不龜不筮
모두 이 지역이 좋다고 하여 / 咸曰其地
공사간에 힘을 모아 / 公私集力
당과 집을 이미 갖추었습니다 / 堂宇旣備
그러나 나라의 소요를 만나 / 頃値邦撓
예를 거행할 겨를이 없었사온데 / 擧禮不暇
이제 왜구가 물러가 / 玆焉寇退
병사와 말들이 갑옷을 벗었습니다 / 兵馬旣卸
좋은 때에 길일을 택하와 / 趁辰涓吉
바른 위치에 영령을 모시오니 / 正位妥靈
시내와 산은 옛날 그대로이나 / 溪山依古
계단과 뜰은 더욱 넓어지고 새로워졌습니다 / 敞新階庭
어찌 다만 오늘날 / 豈但今日
문과 병풍에서 모시는 듯할 뿐이겠습니까 / 如侍門屛
후학들이 백세에 / 後學百世
규범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 知有軌式
이에 감히 향기로운 제수 올리오니 / 敢用苾芬
덕스러운 모양 완연히 대하는 듯하옵니다 / 德容宛接
공경히 진설하여 올리고 고유하오니 / 敬伸陳告
부디 강림하여 흠향하소서 / 庶幾降格
       (출처 : 여현 장현광 선생문집 제11권)
 
2)이윤우(李潤雨, 1569~163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무백(茂伯), 호는 석담(石潭). 성주 출신. 고려의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집(集)의 후손이며, 진사 덕무(德茂)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준경(遵慶)이고, 아버지는 증좌승지 희복(熙復)이며, 어머니는 청도김씨(淸道金氏)로 도화서별서 숭(崇)의 딸이다. 처음에는 이이(李珥)로부터 수학하였으나 그 사후에 정구(鄭逑)의 문인이 되었다.
1591년(선조 24) 진사가 되고 1606년(선조 3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을 거쳐 광해군 즉위 초 승정원주서를 지냈다. 1610년(광해군 2) 예문관검열로서 시강원설서를 겸임하고, 이어 사관으로서 정인홍(鄭仁弘)의 비위사실을 직서하였다가 탄핵을 받아 사퇴하였다.
그 뒤 예문관의 대교·봉교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다가 수성도찰방(輸城道察訪)을 지냈고 대북의 전횡이 심하여지자 사직하였다. 1623년의 인조반정 후 예조정랑·사간원정언·홍문관수찬·교리를 거쳤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초유어사(招諭御史)로 특배(特拜)되었다.
이어 예문관응교·사간·성균관사성을 역임하고 1631년 공조참의에 이르렀다. 특히 여진이 활발히 자국의 강토를 강하게 넓힐 때 변방의 방어에 힘써 표리(表裏 : 왕이 내린 안팎의 옷감)를 하사되었다. 저서로는 ≪석담집≫이 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칠곡 사양서원(泗陽書院)과 성주 회연서원(檜淵書院)에 제향되었다.
 
3)송사이(宋師頤, 1520~1592)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합천(陜川). 자는 경숙(敬淑), 호는 신연(新淵). 야성군(冶城君) 길창(吉昌)의 후손이다. 성주에 거주하였으며, 1570년(선조 3) 생원시에 합격하여, 과거를 준비하다가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향리에 은거하였다.
이 후 정구(鄭逑)·김우옹(金宇顒)·최영경(崔永慶)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닦았다. 그는 평소 몸가짐이 견고하고 온화하면서 강건한 태도를 지녀 조식(曺植)이 그의 집을 자주 찾아가 고금의 일을 토론하였다 한다.
정구도 그를 엄한 스승과 같이 대하며 함께 의리를 강구(講究)하면서 동향의 선비들과 월강(月講 : 매월의 학문을 연구하고 토론함.)의 계(契)를 맺기도 하였다고 한다.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에 제향되었다.
 
4)이홍기(李弘器, 1531~1582)
본관은 광산이며, 자는 백용(伯容)이고, 호는 용재(容齋)이다. 1531년(중종 26년)에 태어났으며 1568년(선조원년)에 형제가 나란히 사마시에 합격했다.
공은 풍체가 아름답고 학문이 뛰어나서 사림의 추앙을 받았으며 문집이 많았으나 임진왜란때 전부 소실되었다. 묘는 성산면 고탄동에 있으며 미수 허목(許穆)이 비문을 짓고 판서 이원정(李元禎)이 행장을 지었으며 숙종 4년에 두아우인 홍량(弘量) 홍우(弘宇)와 함께 성주 회연서원(檜淵書院)에 모시고 또 본군 성산면 고탄동 봉양사(鳳陽祠)에 모시고 있다.
 
5)이홍량(李弘量, 1531~1592)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중용(仲容), 호는 육일헌(六一軒). 아버지는 이수(李樹)이고 형은 이홍기(李弘器)이며 동생은 이홍우(李弘宇)이다. 1568년(선조 1) 무진(戊辰) 증광시(增廣試)에 진사(進士) 3등 16위로 합격하였다. 오건(吳健), 최영경(崔永慶) 등과 사귀었으며 정구(鄭逑)와 연혼(連婚) 관계였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공릉참봉(恭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성주(星州) 향사(鄕祠)에 제향 되었다. 이들 삼형제의 효행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서 1668년(현종9)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에 삼처사유허비(三處士遺墟碑)를 세웠다.
 
6)이홍우(李弘宇, 1535~1594)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자는 계용(季容)이며 호는 모재(茅齋)이다. 이홍우의 아버지 이수(李樹)는 1537년(중종 32) 정유무과(丁酉武科)에 급제하여 주위의 신망이 두텁더니 불행히 합포땅(현 마산)에서 요절하였다. 졸지에 상주가 된 이홍기(李弘器) 이홍량(李弘量)은 12세요 이홍우(李弘宇)는 8세의 어린 나이로 치곡(治哭)함이 지극하여 묘부(墓府)의 상하이사(上下吏士)들이 ‘참으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반드시 예로써 염습하여 그들 효자의 마음을 져버리지 말자 결의하여 수백의 군리(軍吏)가 자진하여 200여리길 선영장지(先塋葬地)까지 운구(運柩)하여 장엄한 장례를 치루었고 3년 치곡(治哭)에 지성을 다하며 모부인(母夫人:固城李氏)과 형제간 효우(孝友)함이 지극하니 세상에 널리 ‘영남(嶺南)의 착한 삼용(三容)’이라 일컬음을 받았다. 그리고 형제가 공히 상문덕행(尙文德行)함이 놀라우니 영남(嶺南)의 일시명류(一時名流)와 도의(道義)로서 추수(追隨)하기를 형제와 같이 하였다
 
7)이서(1566~1651)
조선 중·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이직(以直), 호는 동호(東湖). 아버지는 진천현감 홍우(弘宇)이며, 어머니는 진주강씨 (晉州姜氏)로 동부참봉 개(漑)의 딸이다.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05년(선조 38)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한 뒤 천거를 받아 황산찰방에 잠시 재직하였다. 이어 스승이 권신(權臣)의 배척을 받아 향리로 돌아가자 벼슬에 뜻을 버리고 성주에서 스승과 함께 학문을 강론하면서 송대 유학자들의 예설(禮說)을 담은 ≪오선생예설 五先生禮說≫을 편집하였다.
1620년(광해군 12) 스승이 타계하자 심상(心喪) 3년을 입고 회연서원(檜淵書院)과 비각을 세우는 한편, ≪한강집 寒岡集≫을 간행하였다. 1626년(인조 4) 사축서별제에 임명되고 이듬해에 일어난 정묘호란에 임금을 호위한 공로로 6품에 승진하였다.
이어 얼마 뒤 활인서별제와 의금부도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만년에는 고향인 승호(承湖)에서 후진교육에 힘쓰는 한편, 스승의 ≪한강언행록 寒岡言行錄≫을 편집하였다.
사후에 문인들이 ‘덕요선생(德耀先生)’이라 칭하였으며 스승·아버지 등과 더불어 성주의 회연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동호문집≫ 3권 2책이 있다.

서원의 묘우에는 한강 정구(鄭逑)를 주향하고, 이윤우(李潤雨)를 배향으로 모시고 있으며, 향현사(鄕賢祠)에는 송사이(宋師頤), 이홍기(李弘器), 이홍량(李弘量), 이홍우(李弘宇), 이서의 위판이 봉안되어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舊사당인 향현사, 경회당(景晦堂), 동서재 및 新사당, 전교실, 현도루(見道樓) 등이 크게 두 영역으로 구분되어 배치되어 있다. 1974년 문화재로 지정될 당시에는 강당건물만 있었지만, 1977년 이후 복원 및 신축되어 현재와 같은 배치구조를 이루게 되었다.

서원 앞뜰 백매원(百梅園)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서 있으며, 유물전시관에는 선생의 저서 및 문집의 각종 판각 등 유물·유품이 보존되어 있다. 정구의 문집판 심경발휘가 보관되어 있고 현판은 한석봉이 쓴 것이다.
이 밖에 회연서원에는 만오선생문집, 백곡선생문집, 백곡선생유고, 오복연혁도, 오선생예설전집, 오선생예설후집, 지애선생문집, 태극문변, 한강선생연보, 한강선생문집, 한강선생문집부록, 한강선생별집, 한강선생속집, 한강선생언행록, 하도낙서, 河圖洛書 판이 소장되어 있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편, 경북서원지
성주군 문화관광 http://sjmelon.go.kr/
신종우의 인명사전 http://www.shinjongwoo.c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