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1. 홈
  2. 로그인
  3. 회원가입

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여남서원(汝南書院)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동부리 552
   남 민(南 敏)
   1647년(인조 25)
   
   불향
   여남강당-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76호(1985.08.05지정)
처음에는 향현사를 지어 영양남씨의 시조인 남민(南敏)을 배향했는데, 1830년(순조 30)에 남영의공향현사(南英毅公鄕賢祠)에서 이 고장의 장로들과 더불어 공의 후손들이 모여 영의공 남민(南敏)의 사당을 서원(書院)으로 승격하여 모시기로 논의하여 지역유림은 물론이려니와 원근 각지에 있는 후손들도 이에 찬성하였다.
그 후 1871년(고종 8)에 대원군의 명령으로 서원건물이 훼철되었다. 서원으로 승봉(陞奉)한지 38년만이다. 재사(齋舍)와 서원강당(書院講堂)이 남았는데 강당마당에 있는 여남서원유허비(汝南書院遺墟碑)는 1909년에 세워졌고 강당건물은 1920년에 중건(重建)되었다.

1)남민(南敏)
남씨의 시조 남민(南敏)은 본래 중국 봉양부 여남 사람으로 당나라에서 이부상서를 지냈으며 본명은 김충(金忠)이었다.
그는 신라 경덕왕 때 안렴사로 일본에 갔다가 귀로에 풍랑을 만나 신라 유린지(경북 영덕군 축산면 축산동)에 표착하여 살게 되었으며 경덕왕이 이러한 사실을 당나라에 통보하고 소원대로 현지에서 살게했다고 한다.
경덕왕은 그가 여남(汝南)으로부터 왔다하여 남씨로 사성을 하고 이름을 민(敏)으로 개명케한 후 영양현을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그러나 김충이 일본 갈 때 동행했던 맏아들 김석중은 남씨 성을 받기 전에 이미 출생하였으므로 본래의 성을 따라 영양 김씨로 세계를 이어오게 되었으며 그래서 영양 김씨와 남씨는 시조는 같은 (김충)이나 후손대에서 성이 다르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 후 시조 민(敏)의 후손 3형제 중에서 맏아들 홍보(洪輔)가 영양, 둘째 군보(君甫)가 의령, 셋째 광보(匡甫)가 고성으로 각각 관향을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여남서원은 강당을 중간에 두고 사당은 뒤에 두었으며 앞으로는 2층루가 있었다. 사당은 영의공사(英毅公祠)라 하고 강당은 동재(東齋) 또는 체인재(體仁齋)라 이르고, 서재(西齋)는 경의재(敬義齋)라 하고 문루는 낙영루(樂永樓)라 하였는데, 모두 합하여 여남서원(汝南書院)이라는 현판(懸板)을 게시(揭示)하였다.
그 후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의 건물들은 대부분 철거되고 여남서원유허비(汝南書院遺墟碑)는 1909년에 세워졌고 강당건물은 1920년에 중건(重建)되었다. 현재는 강당만이 남아있다.
 
1)강당
강당은 앞면 4칸·옆면 2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현재 강당은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76호로 지정되어 있다.
 
2)비각과 비석
건물의 후원에 “여남(汝南)”이라는 웅대한 글씨가 붙은 비각안의 비석에“唐按廉使贈諡英毅南公敏遺墟”, “後孫嘉義大夫中樞院贊議原任奎章閣直學士奎熙敬書”라는 남규희(南奎熙)의 친필 비문이 있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