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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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소수서원(紹修書院)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1-2
   안 향(安 珦) 안 축(安 軸) 안 보(安 輔) 주세붕(周世鵬)
   1543년(중종 38)
   1550년(명종 5)
   3월, 9월 초정(初丁)
   사적 제55호(1963.01.21지정) 안향초상-국보 제111호(1962.12.20지정) 외 다수
백두대간의 정기를 머금은 소백산자락 영귀봉(靈龜峰)아래 위치한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데서 비롯되었다.
평소 고려말 유현(儒賢)인 안향(安珦)을 흠모하던 주세붕이 풍기 군수로 부임한 이듬해인 1542년(중종37), 안향선생의 고향에 사묘를 세워 선생의 위패를 봉안 하고 다음해 1543년에는 학사를 건립하여 사원(祠院)의 체제를 갖춘 것이 백운동서원의 시초이다.
주세붕은 그의 저서

1)안향(安珦, 1243~1306)
고려 후기의 명신(名臣)·학자. 본관은 순흥(順興). 초명은 유(裕)였으나 뒤에 향(珦)으로 고쳤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문종의 이름이 같은 자였으므로, 이를 피해 초명인 유로 다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인데, 이는 그가 만년에 송나라의 주자(朱子)를 추모해 그의 호인 회암(晦庵)을 모방한 것이다. 밀직부사 부(孚)의 아들로 흥주(興州 :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의 죽계(竹溪) 상평리(上坪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강주 우씨(剛州禹氏)로 예빈승(禮賓丞) 성윤(成允)의 딸이다.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해 교서랑(校書郎)이 되고, 이어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자리를 옮겼다. 1270년 삼별초의 난 때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탈출, 1272년 감찰어사가 되었다. 강화탈출로 인해 그는 새삼 원종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1275년(충렬왕 1)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나갔을 때에는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무당을 엄중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 민풍(民風)을 쇄신시키려 노력하였다. 그 뒤 판도사좌랑(版圖司左郎)·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1288년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를 거쳐 좌부승지로 옮기고, 다시 좌승지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고려는 충렬왕대에 와서는 원나라의 완전한 속국이 되어 관제도 변경되었다. 원나라는 정동행성(征東行省)을 고려에 두었는데, 1289년 2월에 그는 이 정동행성의 원외랑(員外郎)을 제수받았다. 얼마 뒤 좌우사낭중(左右司郎中)이 되고, 또 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었다. 같은 해 11월에 왕과 공주(원나라 공주로서 당시 고려의 왕후)를 호종하고, 원나라에 가서 주자서(朱子書)를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畵像)을 그려 가지고 이듬해 돌아왔다. 3월에 부지밀직사사가 되었다.
1294년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를 제수받아 합포(合浦)에 출진했고, 이어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같은 해 12월에 지밀직사사, 다시 이듬해 밀직사사로 승진하였다.
1296년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옮기고, 왕과 공주를 호종해 다시 원나라에 들어갔으며, 이듬해에는 첨의참리세자이보(僉議參理世子貳保)가 되었다. 12월 집 뒤에 정사(精舍)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모셨다.
1298년 당시 원나라의 간섭에 의해 충렬왕이 물러나고 세자를 세우니, 그가 바로 충선왕인데, 즉위하자 관제를 개혁해 그는 집현전태학사 겸 참지기무동경유수계림부윤 (集賢殿太學士兼參知機務東京留守鷄林府尹)이 되고, 다시 첨의참리수문전태학사감수국사(僉議參理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가 되었다.
같은 해 8월 충선왕을 따라 또다시 원나라에 들어갔다. 바로 이해에 충렬왕이 다시 복위되었다. 이듬해 수국사가 되고, 이어 1300년 광정대부찬성사(匡靖大夫贊成事)에 오르고, 얼마 뒤에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이 되었다.
1303년 국학학정 (國學學正) 김문정(金文鼎)을 중국 강남(江南 : 남경)에 보내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그리고 문묘에서 사용할 제기(祭器)·악기(樂器) 및 육경(六經)·제자(諸子)·사서(史書)·주자서 등을 구해오게 하였다.
또한 왕에게 청해 문무백관으로 하여금 6품 이상은 은 1근, 7품 이하는 포(布)를 내게 하여 이것을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키고, 그 이식으로 인재 양성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첨의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감찰사사(僉議侍郎贊成事判版圖司事監察司事)가 되었다. 이듬해 5월에는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해 박사(博士)를 두어 그 출납을 관장하게 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육영재단과 성격이 같은 것으로서 당시에 국자감 운영의 재정적 원활을 가져왔다.
같은 해 6월에 대성전(大成殿)이 완성되자, 중국에서 구해온 공자를 비롯한 선성(先聖)들의 화상을 모시고, 이산(李紐)·이진(李山)을 천거해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로 임명하게 하였다. 이 해에 판밀직사사도첨의중찬(判密直司事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다.
1306년 9월 12일 64세로 죽었다. 왕이 장지(葬地)를 장단 대덕산에 내렸다. 1318년(충숙왕 5) 왕이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궁중의 원나라 화공에게 명해 그의 화상을 그리게 하였다.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의 화상은 이것을 모사한 것을 조선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이듬해 문묘에 배향되었다.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영주군 순흥면 내죽리(內竹里)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이듬해 8월에는 송나라 주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방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그곳에 세웠다. 1549년(명종 4) 풍기군수 이황(李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명종 친필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1643년(인조 21) 장단의 유생들이 봉잠산(鳳岑山) 아래에 서원을 세웠는데, 이것이 임강서원(臨江書院)이다. 이 두 서원과 곡성의 회헌영당(晦軒影堂)에 제향되었다.
당시 원나라에서의 주자학의 보편화와 주자서의 유포 등에 따른 영향도 있었지만, 그가 여러 차례에 걸쳐 원나라에 오가며 그곳의 학풍을 견학하고, 또 직접 주자서를 베껴오고, 주자학의 국내 보급을 위해 섬학전을 설치하는 등 제반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유학이 크게 일어난 것으로 보아도, 그를 우리 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한번은 그가 원나라에 들어가 그곳의 문묘에 참배할 때에, 그곳의 학관(學官)이 “동국(東國)에도 성묘(聖廟 : 文廟)가 있소?” 하고 묻자, 그는 “우리 나라도 중국과 똑같은 성묘가 있소.” 하고 답했다 한다. 또한 그들과 문답하는 가운데 그가 주자학에 밝은 것을 안 그곳의 학관들이 ‘동방의 주자’라는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주자학이 성행한 당시 남송(南宋)의 사정이 금나라라는 이민족의 침입 앞에 민족적 저항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국가적 위기를 맞고 있었던 때라면, 당시 고려 후기의 시대 상황 역시 이와 비슷하게 무신 집권에 의한 정치적 불안정, 불교의 부패와 무속의 성행, 몽고의 침탈 등으로 국내외적으로 위기가 가중되고 있을 때였다.
이러한 때에 민족주의 및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의한 명분주의의 정신, 그리고 불교보다 한층 주지적인 수양론(修養論) 등의 특성을 지닌 주자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것이 바로 그의 이상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상을 학교 재건과 인재 양성을 통해 이룩하려 하였다. 그가 당시 고려의 시대 상황을 자각하고 주자학이 가진 이념이나 주자학 성립의 사회·역사적 배경을 의식, 당시 고려의 위기를 구하려는 적극적인 활동으로 제반 교육적 활동을 전개했다면, 그를 단순하고 소극적 의미의 주자학 전래자로 보기보다는, 적극적 의미에서 ‘주자학 수용자’로 유학사(儒學史) 내지는 교육사적인 위치 설정을 해도 좋을 것이다.
조선조의 주세붕도 <죽계지서 竹溪志序>에서 “고려의 사신(史臣)은 주자학에서 말하는 도(道)라든가 이(理) 따위의 말을 몰랐기 때문에 그의 공적은 말할 수 있어도 그의 학문을 밝혀낼 줄은 몰랐다. 그리하여 나는 ≪고려사≫를 읽을 때마다 안문성공전(安文成公傳)에 이르면 탄식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 역사는 그가 섬학전을 설치하고, 사후 문묘에 배향된 사실만을 들먹이는데, 식견의 비루함이 이와 같다.”고 말한 것도 같은 의미이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2)안축(安軸, 1287~1348)
고려 말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당지(當之), 호는 근재(謹齋). 할아버지는 호장 희서(希償), 아버지는 석(碩)이며, 어머니는 검교 군기감 안성기(安成器)의 딸이다.
안축은 고향 순흥의 죽계(竹溪 : 지금의 豊基)에서 세력기반을 가지고 중앙에 진출한 신흥유학자층의 한 사람으로, 탁월한 재질로 학문에 힘써서 글을 잘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금주사록(金州司錄)·사헌규정(司憲糾正)·단양부주부(丹陽府注簿)를 지내고, 1324년(충숙왕 11) 원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여, 그곳 요양로(遼陽路) 개주판관(蓋州判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고려에 돌아와서 성균악정(成均樂正)·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를 거쳐, 충혜왕 때 왕명으로 강원도존무사(江原道存撫使)로 파견되었다. 이 때 ≪관동와주 關東瓦注≫라는 문집을 남겼는데, 거기에는 충군애민(忠君愛民)의 뜻이 담겨 있다.
1332년(충숙왕 복위 1)에 판전교지전법사(判典校知典法事)에서 파면당하였다가 전법판서(典法判書)로 복직되었으나, 내시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충혜왕이 복위하자 다시 전법판서·감찰대부(監察大夫) 등에 등용되고, 이어 교검교평리(校檢校評理)로서 상주목사를 지냈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다음해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차례로 지냈다. 1347년에 판정치도감사(判整治都監事)가 되어, 양전(量田) 행정에 참여하였다.
이 때 안축은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로 민지(閔漬)가 지은 ≪편년강목 編年綱目≫을 이제현(李齊賢) 등과 개찬(改撰)하였고, 또 충렬·충선·충숙 3조(朝)의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한편, 경기체가인 <관동별곡 關東別曲>과 <죽계별곡 竹溪別曲>을 지어 문명이 높았다. 1347년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졌다. 순흥의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제향(祭享)되었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서로는 ≪근재집 謹齋集≫이 있다.
 
3)안보(安輔, 1302~1357)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흥녕(興寧 : 順興), 자는 원지(員之). 석(碩)의 아들이며,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축(軸)의 아우이다.
1320년(충숙왕 7) 문과에 급제, 광주사록(廣州司錄)에 임명되고, 다시 춘추관수찬(春秋館修撰)을 거쳐 편수관(編修官)을 역임하였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에 원나라의 제과(制科)에 합격하여, 요양행중서성조마 겸 승발가각고(遼陽行中書省照磨兼承發架閣庫)로 있다가 노모를 위해 귀국하였다. 이해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를 거쳐 이듬해 교주도안렴사(交州道按廉使)를 역임하였다.
그 뒤 우대언 겸 집의(右代言兼執義)를 거쳐 충정왕 때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었다. 1352년 밀직제학이 되고, 이어 감찰대부제조전선사(監察大夫提調銓選事)를 지냈다. 1355년 밀직제학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 이공수(李公遂)와 함께 진사를 시취하였으며, 이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다.
어머니 봉양을 이유로 사직하고자 하자 고향인 흥녕에 가까운 동경유수(東京留守)를 제수받았다. 항상 청렴한 생활을 하였으며, 형인 축과 함께 안향(安珦)을 제향한 소수서원(紹修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4)주세붕(周世鵬, 1495~1554)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경유(景游), 호는 신재(愼齋)·남고(南皐)·무릉도인(武陵道人)·손옹(巽翁). 고려 말에 고조가 경상도 합천에 우거했으나, 아버지대에 칠원(漆原)으로 옮겨살아 칠원에서 출생(일설에는 합천에서 출생했다고 함.)하였다.
증사복시정 상빈(尙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장손(長孫)이고, 아버지는 문보(文俌)이다. 어머니는 별호군 황근중(黃謹中)의 딸이다. 선대에는 모두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주세붕의 현달로 증직되었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1522년(중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그 뒤 승문원정자로 사가독서에 뽑히고, 홍문관의 정자·수찬을 역임하였다. 공조좌랑·병조좌랑·강원도도사를 거쳐 사간원헌납을 지냈다.
1537년 김안로(金安老)의 전권을 피하고 어머니의 봉양을 이유로 외직을 청하여 곤양군수(昆陽郡守)로 나갔다. 이듬해 검시관(檢屍官)으로 남형을 한 상관을 비호했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어머니의 사망으로 여묘 3년, 상제(喪祭)의 예는 모두 ≪가례 家禮≫에 따랐다. 승문원교리·예빈시정(禮賓寺正)을 거쳐 1541년 풍기 군수가 되었다.
풍기 지방의 교화를 위하여 향교를 이전하고, 사림 및 그들의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으로 1543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 紹修書院)을 건립했는데 중국의 서원과 같이 사묘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을 지닌 우리 나라 서원의 시초를 이루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내직으로 들어와 성균관사성에 임명되고, 홍문관의 응교·전한·직제학·도승지를 역임했으며, 1548년 호조참판이 되었다. 1549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백운동서원의 예와 같이 해주에 수양서원(首陽書院)을 건립하였다.
이후 대사성·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다 병으로 사직을 요청, 동지성균관사에 체임되었다. 죽은 뒤 소원에 따라 고향인 칠원 선영에 안장되었다. 후사가 없어 형의 아들인 박(博)을 양자로 삼았다.
관력에서 보듯이 내직은 대체로 홍문관·성균관 등 학문기관에서 관직을 맡았고,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교학 진흥을 통한 교화에 힘썼다.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을 때, 대간에서 학문이 높고 성균관의 사표로 삼을만한 인물이라 하여 내직을 요청할 정도로 그의 학문은 당시 조정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었다.
도학에 힘쓸 것을 주장하고 불교의 폐단을 지적했으며, 기묘사화 이후 폐지되었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다시 시행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풍기에서 유교 윤리에 입각한 교화에 힘쓰고 당시 피폐되어 향촌민의 교육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던 향교를 관아 근처로 이건, 복구하였다.
그리고 양반들에게 교육기관으로서 외면당하던 향교 대신 풍기의 사림 및 그들의 자제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중국의 주자가 세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방하여 고려 말 성리학을 도입했던 순흥 출신의 안향(安珦)을 배향한 백운동서원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서원의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서적을 구입하고 서원전(書院田)을 마련하였다. 서원을 통해 사림을 교육하고, 또한 사림의 중심기구로 삼아 향촌의 풍속을 교화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일부 사림과 안향의 후손들을 제외하고 풍기 사림의 호응을 받지 못하였는데 1546년 경상도관찰사로 도임한 안향의 11대 손인 안현(安玹)의 노력으로 백운동서원은 확고한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1550년에 풍기군수였던 이황(李滉)의 청원으로 소수(紹修)라는 사액을 받아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에 따라 백운동서원은 점차 풍기 사림의 중심 기구로 변모해나갔다. 이후 이를 모방한 서원들이 각지에서 건립되었다.
청백리에 뽑히었고, <도동곡 道東曲>·<육현가 六賢歌>·<엄연곡 儼然曲>·<태평곡 太平曲> 등 장가(長歌)와 <군자가 君子歌> 등 단가(短歌) 8수가 전한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칠원의 덕연서원(德淵書院)에 주향되었고, 백운동서원에도 배향되었다.
저서로 ≪죽계지 竹溪誌≫·≪해동명신언행록 海東名臣言行錄≫·≪진헌심도 進獻心圖≫가 있다. 문집으로 아들 박이 편집했다가 전란으로 없어져 1859년(철종 10) 후손들이 다시 편집한 ≪무릉잡고 武陵雜稿≫가 있다.
 

최초의 서원답게 조선 후대의 서원과는 달리 건물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배열된 것이 특징이다. 우선 강당 좌우에 있어야할 동·서재(東·西齋)가 없고 4개의 재실인 일신재(日新齋), 직방재(直方齋), 지락재(至樂齋), 학구재(學求齋)가 독립적으로 산재하며, 다른 서원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영정각 건물이 있다. 또 후대의 서원처럼 누각이나 정문 같은 별도의 경계 건물도 존재하지 않고 단지 경렴정(景濂亭)이란 정자를 세워 후대 서원의 누각이 지녔던 풍류 기능을 대신하였다.
또한 건물들의 배치와 외부 공간 구성에도 일정한 틀을 발견할 수 없다. 정문을 들어서면 측면을 앞으로 하고 있는 강당이 나타나고 경내의 한 구석에 높은 토대 위에 사당이 이루어져 있어 강당과 사당은 각각 남향으로 독자적으로 위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당으로 들어서는 문이 일반적인 삼문(三門)의 형태가 아니라 외문으로 된 것도 다른 점이다.
다만 교육기능의 강학당과 제향기능의 사당의 위치는 우리나라 대부분이 따르고 있는 중국식의 전학후묘(前學後廟, 앞은 배움의 공간 뒤는 제향의 공간)의 방식을 택하지 않고, 소수서원은 동학서묘(東學西廟)로서 배움의 공간은 동쪽에, 제향의 공간은 서쪽에 세워 이른바 서쪽을 으뜸으로 삼는다는 우리나라 전통 위치법인 이서위상(以西爲上)을 따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들이 비록 가시적인 질서 없이 배열되어 있지만 그 나름대로 정돈된 통일성을 가지며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외부마당은 단아한 멋을 느낄 수 있으며, 형편과 필요성에 따라 환경과의 조화를 꾀하며 건물들을 앉혀나간 선현들의 실용적인 정신도 엿볼 수 있다. 서원 일곽 뒤편에는 별도로 구획된 담장 내에 유물관, 관리사, 전시관이 자리잡고 있다.
1)문성공묘(文成公廟)-보물 제1402호(2004.04.06지정)
사당인 문성공묘(文成公廟)는 명륜당의 서북측 따로 쌓은 담장 속에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맞배집으로 장대석의 낮은 기단 위에 원형의 주좌(柱座)가 있는 다듬은 초석이 있고 그 위에 배흘림 원기둥을 세웠다. 또한 기둥 위에는 주두를 놓고 밑면에 초각한 첨차와 소로, 그리고 끝이 날카로운 쇠서를 내어 결구한 초익공식(初翼工式)을 이루고 있다. 가구는 5량으로 대들보를 전면 고주(高柱)와 후면 평주 위에 걸고, 첨차로 짜인 동자기둥을 놓아 마루보를 받치고, 이 위에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쳤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맞배지붕의 양측 박공에는 풍판을 달았다. 주위에는 기와를 얹은 돌담장을 둘렀으며, 정면과 측면에는 소박하게 일각문을 달아 출입하게 하였다.
 
2)강학당(講學堂)-보물 제1403호(2004.04.06지정)
‘백운동(白雲洞)’이란 현판을 건 명륜당(明倫堂)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중앙의 대청과 온돌방 및 마루방으로 되어 있고 대청·온돌방·마루방 주위로 툇마루를 둘렀다. 장대석(長臺石)을 바른층쌓기 하여 만든 높은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웠다. 기둥 윗몸에서 앙서 하나를 내어 기둥 위에 놓인 주두(柱頭)와 결구시킨 초익공(初翼工)구조를 이루고 있다. 가구(架構)는 5량(五樑)으로 대들보를 앞뒤의 평주(平柱) 위에 걸고 이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마루보를 받치고, 마루보 위에 파련대공(波蓮臺工)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3)일신재(日新齋)․직방재(直方齋)
일신재(日新齋)와 직방재(直方齋)는 원장·교수·유사의 숙소 겸 집무실로 하나의 연속된 건물로로 건립하여 각각 편액을 달아 구분하고 있다. 각각 정면 6칸, 측면 1칸 반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 및 협실 앞의 툇마루로 되어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으며, 기단 정면에는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 하였으나, 후면에는 거친 사고석으로 바른층쌓기 하였다.
기둥 위에는 주두를 놓고 첨차를 놓아 몰익공식으로 하였는데, 첨차의 모양은 단순하며, 뒷면 귓기둥은 헛첨차가 돌출되었다. 가구는 5량으로 대들보를 앞뒤 평주 위에 걸고 간결한 동자기둥을 세워 마룻보를 걸었으며, 이 위에 판대공(板臺工)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4)학구재(學求齋)
학구재(學求齋)는 정면 3칸, 측면 1칸에 중앙에 마루를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특별한 기법이나 장식을 사용하지 않은 평범한 남도리집이며, 홑처마의 맞배지붕을 하였다. 스승의 공간인 직방재·일신재의 우측 뒤편에 기단을 낮게하여 배치된 것에서 조선시대 사제지간의 정서를 엿볼 수 있다. 중앙대청의 후면을 개방한 것이 특이하다.
 
5)지락재(至樂齋)
지락재(至樂齋)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학구재와 직교되게 하여 ‘ㄱ’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북쪽의 1칸에 온돌방을 설치하고 남쪽의 2칸은 3면이 모두 개방된 마루칸을 두었다. 위치상 동쪽의 죽계를 감상하기 위한 곳으로 보인다. 굴도리를 사용한 것 외에는 학구재와 같이 특별한 의장수법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학구재보다 기단을 더 낮게 한 것이 주목된다.
 
6)장서각(藏書閣)
장서각(藏書閣)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규모이며 내부에는 마루를 설치하였다. 서원의 경판과 서적등을 보관하기 위한 건물로 3량가의 굴도리집이며, 홑처마의 맞배지붕을 한 단촐한 건물이다. 문성공묘와 직방재 사이에 배치되어 남향을 하고 있다.
 
7)전사청(典祀廳)
전사청(典祀廳)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 우측 1칸에는 온돌방을 두고 좌측 2칸에 마루를 둔 편방형이다. 어칸에 골판문을, 우측 협칸(온돌방)에는 띠살문을 달았으며, 좌측협칸에는 상부에 환기창을 두었다. 3량가의 굴도리집이며, 홑처마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제향시 제수를 준비하거나 보관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사당영역과 가깝게 배치되어 있다.
 
8)경렴정(景濂亭)
경렴정(景濂亭)은 서원 입구 우측으로 죽계를 마주하여 정면 3칸, 측면 1칸의 4면이 개방된 정자형식의 건물이다. 자연석 기단 위에 기둥 직경과 비슷한 원형 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웠다. 구조적으로는 특별한 장식수법을 사용하지 않은 3량가의 굴도리집이며 홑처마의 팔작지붕의 모습을 하고 있다. 단순한 구조의 건물에 수많은 당호와 시구의 편액이 촘촘하게 달려있다. 죽계 건너에는 ‘백운동(白雲洞)’, ‘경(敬)’자를 음각한 바위가 보이고 그 아래쪽에는 최근 복원한 취한대가 있다.
9)기타
그 외 소수서원의 정화·관광사업으로 신축된 건물로는 직방재·일신재 뒤편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영정각이 있고, 그 뒤에는 담장으로 구획되어 정면 4칸, 측면 2칸의 고직사가 복원되었으며, 유물관과 충효교육관·순흥문화유적권 관리사무소 등의 건물이 있다.

소장 유물로는 국보 제111호인 회헌 영정과, 보물 제485호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 보물 제 717호인 주세붕영정이 소장되어 있으며 서장각에는 141종 563책의 고문헌이 있다.
 
1)안향초상-국보 제111호(1962.12.20지정)
고려 중기 문신인 안향의 초상화로 가로 29㎝, 세로 37㎝의 반신상이다. 안향은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하였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원나라에 다녀오면서 주자학을 우리나라에 보급한 인물로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림의 화면은 상하로 2등분되어 위에는 글이 쓰여 있고 아래에는 선생의 인물상이 그려져 있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왼쪽을 바라보며 붉은 선으로 얼굴의 윤곽을 나타내었다. 옷주름은 선을 이용하여 명암없이 간략하게 처리하였다. 시선의 방향과 어깨선에서 선생의 강직한 인상이 보인다.
소수서원에 있는 이 초상화는 선생이 세상을 떠난지 12년 후인 1318년(충숙왕 5) 공자의 사당에 그의 초상화를 함께 모실 때, 1본을 더 옮겨 그려 향교에 모셨다가 조선 중기 백운동서원(후에 소수서원이 됨)을 건립하면서 이곳에 옮겨놓은 것이다. 선생의 초상화는 현재 전해지는 초상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초상화로, 고려시대 초상화 화풍을 알 수 있어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귀중한 작품이다.
 
2)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坐圖)-보물 제485호(1968.12.19지정)
공자를 중심으로 제자들이 공자 앞에 길게 늘어서 앉아 있는 그림으로, 크기는 가로 65㎝, 세로 170㎝이며 비단에 채색하여 그렸다.
이 그림은 단상 중앙에 배치된 공자상을 다른 인물들보다 크게 그렸고, 단 아래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좌우로 배열된 제자들이 중앙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옆모습을 표현하였다. 이들은 머리에 사각관모를 쓰고 손에 홀(笏)을 든 차림으로 묘사되어 조례의식 광경을 연상케 한다.
이 그림은 1513년(중종 8)에 원래 있던 그림을 베껴 그린 것으로 회화성보다는 기록성이 강하고, 종렬 대칭구도와 위에서 아래를 보는 듯한 부감법, 원근법 등을 사용하여 조선시대 궁중행사의 기록화 형식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3)주세붕초상-보물 제717호(1981.03.18)
조선의 문신이며 학자였던 주세붕의 상반신을 그린 초상화로 가로 62.5㎝, 세로 134㎝ 크기이다. 주세붕은1543년( 중종 38)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후의 소수서원)을 세워 학문진흥에 힘썼다.
이 초상화는 사모관대의 정장 관복을 차려입고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얼굴은 간략한 선으로 묘사하고, 넉넉한 몸체에 목은 거의 표현하지 않아 권위적인 기품이 엿보인다. 옷의 깃을 낮게 표현한 것은 다른 초상화에도 나타나는 것으로 당시 유행하던 양식으로 생각된다.
이 그림의 정확한 제작연대를 추정하기 힘들지만 색이 바라고, 훼손된 상태, 복식, 필법 등으로 미루어 제작연대가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16세기 초상화가 대부분 공신상인데 비해 학자의 기품이 드러난 학자상으로 매우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
 
4)명종어필‘소수서원’현판-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330호(2001.11.01지정)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의 현판으로, 사액서원으로 될 당시 조선시대 명종이 이름을 지어 그것을 직접 쓴 것이다. 현재 소수서원 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 현판은 검은 바탕에 글씨는 돋을새김하여 금칠을 하고 테두리는 화려한 장식이 되어 있으며, 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이 현판은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의 현판을 명종이 직접 써서 하사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5)소수서원소장판목(紹修書院所藏板木)-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331호(2001.11.01지정)
소수서원 소장 판목은 총 902판으로
참고-한국국학진흥원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