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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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구호서원(鷗湖書院)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 2동 구성산 (원소재지 : 안동 임하현 옥산동 도목촌)
   권정, 권두문, 김대현, 김봉조, 권창진
   1392(태조1년)
   
   
   
정조 4년(1780) 고장사림에서 반구정(伴鷗亭)을 세우고 동쪽에 구호리사(鷗湖里社)를 세우고 권정의 위패를 봉안 순조 13년(1813) 권두문 김대현 김봉조 권창진의 위패를 봉안하고 구호서원(鷗湖書院)으로 승격 묘호를 경현사(景賢祠)로 강당은 명교당(明敎堂)이라 하였다. 구호이사때 봉안문(奉安文)은 권방(權訪)이 짓고 상향문(常享文)은 성언집(成彦楫)이 짓고 고유문(告由文) 봉안문(奉安文) 상향문(常享文)은 김굉이 지었다. 지금 서원은 없어지고 구호서원, 명교당, 경절사, 경현사 현판만 반구정에 걸려 있다.

권정(權定,1353 ~1411)의 자는 안지(安之), 호는 사복재(思復齋)이며, 권현의 아들이다. 우왕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괴산 군수 및 좌사간이 되었다. 고려가 망하여 벼슬을 버리고 안동 임하현의 기사리에 숨었다. 반구정과 봉송대를 짓고 스스로 아호를 사복재라 한 것은 고려를 사모하는 마음에서였다. 저서에 『사복재실기(思復齋實記)』가 있다.
아들 권요(權曜)가 영주로 옮겨와 자리하였으며, 세종 때에 보령 현감이 되었다. 권요의 장남 권경석(權景石)은 내시직을 지냈고, 2남 권경행(權景行)은 예안 현령을 지냈으며, 3남 권경주(權景柱)는 사용을 지냈다.
권두문(權斗文, 1543 ~ 1617)의 자는 경앙(景仰), 호는 남천(南川)이며, 사복재의 7대손이다.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 권유년(權有年)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있어 글공부가 뛰어나고 문장이 숙성하여 박승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27년(선조 5)에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승문원 교검을 거쳐 사헌부 감찰을 거쳐 형조 정랑에 옮겨졌다.
평창 군수로 재직시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요새를 구축하여 대항하여 싸웠으나, 아들 권주와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때 몇 차례나 자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 여 일을 적진에 갇혀 있다가 탈출하기까지의 일을 일기체의 생생한 필치로 서술하여 「호구록(虎口錄)」이란 기록을 남겼다.
벼슬에 있어서는 사명에 충실하였으며, 세력에 기대어 폐단을 자행하는 궁노를 처벌하였다. 독서를 좋아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며, 집에도 많은 책이 있어, 책마다 붉은 점을 찍어가며 정독하였다 한다. 풍산김씨(豊山金氏)의 김봉조(金奉祖)·김영조(金榮祖)·김응조(金應祖) 3형제가 함께 그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저서에 『남천문집(南川文集)』이 있다.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구호서원에 제향되었으며, 평창에서는 매년 10월 6일에 공을 제사하는 노성제 행사가 있다.

반구정(伴鷗亭)
정자의 전면에 걸린 ‘반구정(伴鷗亭)’이란 거대한 글씨의 현판은 근대 이 지방의 명필인 소우(小愚) 강벽원(姜璧元, 1859∼1941)이 썼다. 그 크기는 대략 가로가 112㎝이고, 세로가 45㎝이다. 그리고 글쓴 사람을 알 수 없는 69×28㎝ 크기의 반구정(伴鷗亭)이란 편액도 있다. 이 반구정 안에는 현재 역시 강벽원이 쓴 사복재(思復齋)란 글씨와 함께 구호서원(鷗湖書院)·경절사(景節祠)·경현사(景賢祠)·명교당(明敎堂)이라고 쓴 액자들이 나란히 걸려 있다.
 
원래 안동군 임하면 기사리에 고려 좌사간(左司諫) 권정(權定)이 건립하였는데 후손들이 이 고장으로 이주하였고, 1780년(정조 4)에 현재의 자리로 이건하면서 구성산 서쪽에 남향으로 구호서원과 함께 건립한 것이다.

반구정을 건립하고서 그 동쪽에 별묘를 세워 권정을 제사하려하니, 사림에서 그 풍절이 사(社)에 제사할 만하다 하여 구호사라 이름 하고, 권두문·김대현·김봉조·권창진을 함께 봉안하였다. 1868년(고종 5)에 국령으로 철거되어 지금은 주춧돌만 반구정 옆의 빈터에 남아 있다. 이 반구정에 구호서원의 현판들이 걸려 있으며, 주변에 가학루·봉송대·춘수당·대은정 등의 유적과 구성산성이 있다.
 

 

 伴鷗亭記

故 高麗左司諫權先生 名其亭 伴鷗 夫鷗 水鳥也 非人之所可伴也 不可與伴 而强以名之 曰伴 先生必不爲也 奚取以名其亭哉 方其麗氏運訖 聖人代興 人皆去舊從新 奔走以就功名 誰能與先生相伴於寂寞之濱哉 彼田夫野老 見先生掉頭好爵 終身空谷 相與驚耳駭目 名其洞 曰棄仕里 是其能眞知先生之心 而爲先生亭上之伴者乎 先生方絶意人寰 息交衡門 逍遙徜徉於雲水之間 而皓皓逸翮 汎汎淸流 忘機自適 無所係着 鳥亦非有心近人者 而先生之所以目寓之而相感 心與之而相吻者 非是鳥而其誰歟 不自知鳥非我 我非鳥 而朝暮相對 呼之以伴 擧以爲吾亭之名 嗚乎 惟先生而後 可以伴是鷗 惟先生之亭而後 可以名伴鷗 人而非先生之伴者 鳥能知斯名之稱斯亭也哉 花山府臨河縣之北 有一洞 至今存棄仕里之名者 卽先生之舊居也 今其雲仍 散處他邑 當日之所謂思復齋鳳松臺者 蕩無遺址 則亭之的在何處 亦無由而可徵 豈不惜哉 諸孫之在吾榮者 最多 而距先生之居 九十餘里 去先生之世 三百餘歲 邈焉悠焉 無可以寓追慕之誠 乃就其所居之西古山城之址 爲構數間精舍 揭以伴鷗之額 其地在川上 時見鷗鷺之屬 或飛或下 去來於煙汀雲潭之中 無論地之遠近 時之古今 而卽斯亭 翫斯鳥 有可以想像彷彿乎先生之心者矣 其所因其似 而思其眞 以寓其景仰之懷者 豈特見堯於羹墻而已哉 雖然 先生之能與鷗爲伴 實有其本 盖其窮理篤學 正如碣文中所言 故出而事君 能盡匪躬之道 而無徇乎其私 隱而辭祿 能守罔僕之義 而無慕乎其外 乃能心與鳥閒 事與水白 鷗盟無負於當時 淸風可師於百世 則今者諸君之能重修先生之亭者 曷不先修我先生之學乎哉 苟或不然 登斯亭也 而不能顧名而究其本 則斯亭也 斯名也 只爲後人之亭 而非先生之所以名之也 人孰曰 故高麗左司諫權先生之亭也 不侫與諸君遊 得聞先生之風 久矣 今於斯亭之成 旣爲之賀 而繼之以箴規
歲在丁未冬十月旣望 宣城後人 金若鍊謹書

반구정기(伴鷗亭記)

고 려 좌사간(左司諫) 권(權)선생은 정자를 이름하여 ‘반구(伴鷗)’라 하였다. 무릇 갈매기는 물새로서 사람의 벗은 아니다. 벗이 될 수 없는데 억지로 이름하여 벗이라 함을 선생께서 필시 하지 않을 텐데 어찌 정자의 이름으로 하였을까.
바 야흐로 고려 왕씨(王氏)의 운이 끝나고 성인의 시대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모두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좇아서 공명을 얻기에 분주하니 뉘가 능히 선생과 더불어 적막한 물가에서 서로 벗하겠는가. 저 농부와 시골 노인들이 선생께서 좋은 벼슬에 머리를 흔들고 쓸쓸한 골짜기에서 생애를 마치는 것을 보고 듣고 서로 놀라며 그 동리를 이름하여 기사리(棄仕里)라 하니 이들이야말로 능히 선생의 진심을 알고 선생의 정자에서 벗한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선 생이 방금 벼슬을 떠나 교제를 끊고 향리에서 구름과 물을 벗삼아 소요 자적함에 흰나래를 마음대로 떨치며 흐르는 맑은 물에 뜨고 떠 세사를 잊고 아무 것에도 걸림이 없었다. 새도 또한 마음을 두고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기에 선생이 눈길을 줌에 서로 느끼고, 마음으로 허여함에 서로 합하는 것이 새가 아니고 무엇이던가. 어찌 알랴. 새가 내가 아니고 내가 새가 아님을. 아침 저녁으로 상대하며 불러 벗하고 이로써 나의 정자 이름으로 하였던 것이다.
아! 오직 선생인 이후에야 이 갈매기로 벗할 수 있고, 오직 선생의 정자인 후에야 반구(伴鷗)라 이름함이 가하다. 벗하기를 선생처럼 하지 않는 자라면 명칭이 정자에 어울리지 않으리라.
안 동부 임하현 북쪽에 한 동리가 있어 지금도 기사리라 하니 즉 선생의 옛 주거지이다. 이제 그 후예들이 각처에 흩어져 살게 되자 그 당시에 이르던 사복재(思復齋), 봉송대(奉松臺)는 씻은 듯 유지가 없어져 정자의 소재지를 정확히 징험할 수 없으니 어찌 안타깝지 않은가.
후 손이 우리 영주에 가장 많으나 선생이 거처하시던 곳과 90여 리 거리이며 선생의 시대와는 300여 년이나 아득히 멀다. 추모의 정성을 부칠 수 없어 이에 그 거처하던 곳에서 서쪽으로 옛날 산성 있는 곳에 수칸 정사(精舍)를 세우고 ‘반구정(伴鷗亭)’이란 편액을 게양하였다. 그 터가 시냇가에 있어 때때로 갈매기와 백로는 안개끼고 구름낀 물가에 날고 내리니 땅의 원근이나 시대의 고금을 물론하고 이 정자에 올라 갈매기를 완상하면 어찌 선생의 마음을 상상하여 방불치 아니할 것인가. 근사한 것으로 인해 그 진면목이 떠올라 경모하는 심회를 부치는 것이 어찌 다만 요임금의 갱장(羹墻)의 추모뿐이겠는가.
비 록 그러하나 선생이 능히 갈매기와 벗을 함은 실은 근본이 있어서니 그 이치를 탐구하고 학문에 독실함은 비문중에서 말한 바와 같다. 나가서 군주를 섬김에 능히 충성의 도를 다하고, 물러나 녹(祿)을 사양함에 신하가 될 수 없다는 의를 지켰을 뿐 그밖에 일은 생각지 않았다. 이에 마음은 새와 더불어 한가하고 행적은 물과 더불어 깨끗하니 당시에 백구와 맹서를 저버리지 않았고, 맑은 바람은 백세의 스승이 될 수 있었다.
이 제 제군들이 선생의 정자를 중수하면서 어찌 선생의 학문은 닦지 않을 것인가. 만약 그렇지 않아 이 정자에 올라 이름도 돌아보지 않고 그 근본도 구명치 못한다면 이 정자와 이름은 다만 후세인의 정자일 뿐이요, 선생이 명명한 정자는 아닐 것이다. 어느 사람이 ‘고려 좌사간 권(權) 선생의 정자’라 하겠는가. 내가 제군들과 더불어 노닐면서 선생의 절조를 얻어 들은 지가 오래이다. 이제 이 정자의 낙성을 축하하며 이어서 훈계의 말을 하노라.

정미년(1787) 겨울 10월 16일 선성(宣城) 후인 김약연(金若鍊) 삼가 짓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