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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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노계서원(魯溪書院)
   경상북도 영주시 봉현면 노좌리
   진중길, 한산두
   1788년 노계사 준공. 1848년 노계서원으로 승격
   
    음력 3월 하정(下丁) 9월 하정
   
정조 10년(1786) 노계서당(魯溪書堂)에서 향회를 열어 노계서당 강당에 진중길 한산두의 위패를 봉안하고 1787년 노계서당 뒤편에 서원의 건축시작 1788년 완공되어 묘호를 노계사(魯溪祠)라 하였다. 헌종 14년(1848) 노계서원 승격되고 사당 강당 신문 주사등을 중수하였다. 서원편액 강당편액은 이휘준(李彙濬)이 썼다. 고유문(告由文)은 이휘녕(李彙寧)이 지었다. 초대 원장은 황중관(黃中琯)이 역임했다. 대원군때 훼철되었다 2001년 가을에 진씨(秦氏) 종중에서 다시 복원키로 결의하고 진씨종중부지에 종중들의 성금을 모아 2005년에 현재 규모의 서원을 신축 복원하였다. 

1) 진중길(秦中吉)
학문과 덕망이 뛰어난 진중길
행정의 주인인 진중길(秦中吉, 1308~?)은 학문·문장·행실로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태평통재(太平通載)』·『목은집(牧隱集)』의 기록에 행정의 주인인 진중길의 인품을 엿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진중길은 고려 충숙왕(忠肅王)~충혜왕(忠惠王) 때 사람으로 뛰어난 문장과 반듯한 행실로 선비들에게 널리 알려져 존경을 받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버지인 가정(稼亭) 이곡(李穀)과 함께 공부하여 매우 친한 사이였으며, 과거를 멀리하다가 40세의 늦은 나이에 과거를 보려고 하였다. 그런데 시험을 주관하는 관리가 그의 어릴 적 친구인 이곡이었다.
그러자 진중길은 “이곡은 어린 시절 나와 같이 공부한 친구 사이이니 내가 설령 요행으로 이번 과거에 급제한다 하더라도, 남들이 이곡이 내가 친구라고 봐 주어 급제했을 것이라고 의심할 것이다. 그러니 내가 과거에 급제하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응시하여 이곡에게 누를 끼칠 수는 없는 일이다.” 하고는 응시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 후 조상의 음덕에 학행(學行)으로 판도정랑(版圖正郞)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했고, 다시 계림판관(鷄林判官)에 제수되어 취임했다가 이듬해에 물러났다. 오품(五品) 벼슬을 지냈으나, 나중에는 벼슬길에 더 큰 욕심을 내지 않고 물러나서 후진양성에 힘써서 그의 문하에서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하였다.
본래 옛날에 선비들이 글을 읽고 자기 수양을 하는 것은 대부분 과거라는 제도를 통해 출세를 하고 관직에 나감으로써 자신의 정치적인 뜻을 펴고, 개인적으로는 영달을 하고 가문을 빛내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런데 친구에게 폐를 끼칠까봐 그 기회를 과감히 버릴 줄 알았으니, 진중길은 참으로 고결한 성품을 지닌 선비였던 것이다.
훗날 이 고을의 선비들이 진중길의 덕망을 추모하여 1754년(영조 30) 진사 김여필(金汝弼) 등의 상소로 노좌리에 노계사(魯溪祠)를 세워 제사를 올렸다. 정조 때 후손 진영(秦泳)이 임금께 청하여 건물을 증축하고 노계서원(魯溪書院)으로 승격시켰다. 그러던 것이 고종 초에 나라의 국령으로 철폐되었다가, 2004년 풍기진씨 후손들이 조상을 추모하는 뜻에서 정성을 모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했다. 당시 문중에서는 고유제를 올리고, 그 동안의 기록들을 모아 『노계서원지(魯溪書院誌)』를 발간하여 그간의 사정을 알 수 있게 해준다.
 
2)한산두(韓山斗)
1556년(명종 11)∼1627년(인조 5). 조선 중기 유생‧의병. 자는 사첨(士瞻)이고, 호는 추월당(秋月堂)이다.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출신지는 경상북도 영주(榮州)이다.
한서봉(韓瑞鳳)의 후손으로, 고조는 한태(韓泰), 증조는 한영년(韓永年), 조부는 참봉(參奉) 한필(韓珌)이다. 부친 성균관생원(成均館生員) 한일취(韓日就)와 모친 참봉(參奉) 진황(秦晃)의 딸 영정진씨(永貞秦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충순위(忠順衛) 이윤복(李潤福)의 딸 합천이씨(陜川李氏)이다.
어려서부터 기개가 강직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임금과 관료들이 도성을 버리고 파천(播遷)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자 군주는 백성을 버리고 도망해서는 안 된다는 상소를 올리고, 직접 진두지휘할 것을 청원하였다. 이후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궐기하여, 경상남도 창녕군(昌寧郡)에 위치한 화왕산성(火旺山城)전투에 참여하여 공적을 세웠다.
그 후 벼슬에 대한 뜻을 끊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매진하였다.
함께 교유한 인물로 이개립(李介立)‧전이성(全以性) 등이 있다.
아들로 2남 한원진(韓元進)‧한형진(韓亨進)을 두었다.
경상북도 영풍군(榮豊郡)에 위치한 노계서원(魯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시문집 《추월당선생문집(秋月堂先生文集)》 2권 1책이 있는데, 1811년(순조 11) 후손 한덕봉(韓德鳳)‧한덕준(韓德峻) 등이 편집‧간행하였다.

행정은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로, 좌우에는 온돌방을 들여 놓고 가운데 칸은 대청으로 꾸몄으며, 사방의 마루는 계자각(鷄子脚) 난간을 둘러놓았다. 
행정의 뒤쪽, 노계서원 본채 옆에는 사당인 상현사(尙賢祠)를 복원해서 행정 진중길과 추월당(秋月堂) 한산두(韓山斗)의 위패를 모셔 놓고 매년 봄 가을로 제사를 올린다.

현판

행정(杏亭) 
행정기(杏亭記) 
권연하(權璉夏)가 썼다.

행정중수기(杏亭重修記) 
이상호(李祥鎬)가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