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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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삼봉서원(三峰書院)
   영주시 이산면 신천리(삼봉골)
   김이음, 이해, 김개국, 김융
   1650년
   
   
   
삼봉서원은 1650년(효종1)에 창건한 후 1654년 삼로 김이음, 온계 이해, 만취당 김개국, 물암 김륭 선생을 배향하고 삼봉서원이라 하였다. 창건 당시 서원의 건물로는 강당인 명륜당을 중심으로 동재인 박약재, 서재인 수양재가 있었으나 어느해인지 다 소실되고 말았다. 그후 후손들과 지역의 사림이 강당만을 새롭게 건립하여 서원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다. 강당은 정면 3칸으로 중앙에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 온돌방 우측에 마루 반칸과 온돌방 1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강당만이 홀로 삼봉서원을 지켜오다가 무너져 지금은 서원의 흔적을 그 어느 곳에서도 찿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삼봉서원 현판과 명교당 현판은 만취당(晩翠堂)에 보관을 하고 있다. 봉안문(奉安文)과 상향문(常享文)은 김응조(金應祖)가 지었다.

1)김이음(金爾音)
?∼1409(태종 9).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함창(咸昌), 자는 백옥(伯玉), 호는 삼로(三路). 아버지는 용(勇)이다.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376년(우왕 2)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1389년(공양왕 1) 지평이 되었으며, 2년 뒤 문하사인이 되었다. 조선건국 뒤에는 우사간이 되었고, 1405년(태종 5)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효행이 뛰어나 정문이 세워졌으며, 영주의 삼봉서원(三峯書院)에 배향되었다.
 
2) 이해(李瀣)
1496(연산군 2)∼1550(명종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명(景明), 호는 온계(溫溪).
진사 식(埴)의 아들이며, 황(滉)의 형이다.
어려서 작은아버지 우(堣)에게 글을 배워 1525년(중종 20)에 진사가 되었고, 152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33년에 사간·정언 등을 거쳐 1541년 직제학에 올랐으며, 이어 경상도진휼경차관(慶尙道賑恤敬差官)·좌승지·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44년에 첨지중추부사·대사헌·대사간·예조참판을 지내고, 이해 또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인종이 즉위한 뒤에도 계속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권신 이기(李芑)를 우의정에 탁용(擢用)하려는 것을 반대하고 탄핵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기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강원도관찰사에 이어 1547년에 황해도관찰사, 1549년에 청홍도관찰사를 거쳐 1550년에는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그러나 명종이 즉위하면서 소윤이 득세하였기 때문에 이기의 심복인 사간 이무강(李無彊)의 탄핵을 받아 무고사건에 연좌된 구수담(具壽聃)의 일파로 몰리게 되었다. 그때 주위사람들이 권세에 거짓으로 굴복하면 모면할 수 있다고 권하였으나 거절하였으며, 마침 김안로(金安老)가 인근에 살았으므로 권세로 이끌려 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그러나 명종이 그의 결백함을 알고 특별히 갑산에 귀양보내는 것으로 그쳤으나, 귀양가는 도중에 양주에서 병사하였다.
예서(隷書)에 뛰어났으며 선조 때 벼슬이 환급되었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영주의 삼봉서원(三峰書院), 예안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3) 김개국(金蓋國)
1548(명종 3)∼1603(선조 3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 자는 공제(公濟), 호는 만취당(晩翠堂). 영천출신. 아버지는 몽득(夢得)이다.
1573년에 사마시에 합격, 생원이 되고 159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관직은 정랑을 거쳐 군수에 이르렀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를 정성껏 모셨으며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에 임해서는 의리로써 털끝만큼도 굽히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불우한 세상을 살다가 죽었다.
뒤에 집의에 추증되었고, 1643년(인조 21) 영천의 삼봉서원(三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만취일고》가 있다.
 
4) 김륭(金隆)
1549(명종 4)∼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함창(咸昌). 자는 도성(道盛), 호는 물암(勿巖). 아버지는 참봉 응린(應麟), 어머니는 현풍곽씨로 자보(子保)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소학》·《가례》·《태극도설》·《통서 通書》 등을 수학하였으며, 《중용》·《대학》 등 경서와 산법(算法),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격문을 지어 여러 고을에 돌려 기병(起兵)할 것을 호소하였으며, 이듬해 학행(學行)으로 참봉에 천거되었다.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영풍(榮豊) 삼봉서원(三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물암집》·《삼서강록 三書講錄》 등이 있다.

창건 당시 서원의 건물로는 강당인 명륜당을 중심으로 동재인 박약재, 서재인 수양재가 있었으나 어느해인지 다 소실되고 말았다. 그후 후손들과 지역의 사림이 강당만을 새롭게 건립하여 서원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다. 강당은 정면 3칸으로 중앙에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 온돌방 우측에 마루 반칸과 온돌방 1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강당만이 홀로 삼봉서원을 지켜오다가 무너져 지금은 서원의 흔적을 그 어느 곳에서도 찿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삼봉서원 현판과 명교당 현판이 연암김씨 만취당 종중에 보관되어 오다가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