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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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오산서원(梧山書院)
   영주시 기흥 1동(한절마)
   김난상
   1834년
   
   
   
순조 34년(1834) 오산서원을 창건 하고 김난상의 위패를 오천서원(梧川書院)에서 갈라 나와 봉안하고 묘호를 경현사(景賢祠) 강당을 명교당(明敎堂)이라 하였다. 기문(記文)은 이휘녕(李彙寧)이 짓고 봉안문(奉安文)은 유태좌(柳台左)가 짓고 상향문(常享文)은 이광정(李光靖)이 짓고 서원 승격할때 고유문(告由文) 김희주(金熙周)가 지었다. 지금은 서원자리에 김난상의 정자인 매양정과 김난상의 신도비, 사당이 세워져 있으며 사당안에는 오산이사, 경현사, 오산서원 현판이 보관되어 있다.
 

병산(缾山) 김난상(金鸞祥, 1507~1571)
청도김씨(淸道金氏) 시조인 영헌공 김지대(金之岱)의 12대손이다. 자는 계응(桂應), 호는 매양(梅陽) 혹은 병산(缾山)이다. 한양의 반송방(盤松坊) 도제동(道濟洞)에서 아버지 김현(金俔)과 어머니 안동전씨(安東全氏) 사이에서 3남으로 출생했다. 그 해 부친이 별세하는 비운을 맞았다. 
백씨(伯氏)인 김봉상(金鳳祥)에게 글을 배웠는데, 효행이 뛰어나고 우애가 돈독하여 3형제가 같은 방에서 함께 공부했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서는 “김난상은 학문이 깊고 행실이 도타왔으며, 효성과 우애가 지극했다. 어머니를 봉양함에 성력으로 다했으며, 두 형과 한집에 살면서 물건 하나라도 따로 가지는 법이 없었다.”고 했다.
1526년(중종 21) 봉화금씨(奉化琴氏)와 결혼하였고, 1528년(중종 23) 생원시에 1등 했는데, 퇴계 이황과 동방(同榜)이다. 1537년(중종 32)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저작으로 계공랑에 선임되었고, 다음해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1544년(중종 39) 사간원 정언으로 윤원형의 심복인 이기를 탄핵하였으며, 기묘사화에 희생된 이들의 신원을 청하였다. 사초에는 사관의 이름을 기입하지 않아 사관이 직필하는데 어려움을 없애고자 하였다. 
충재 권벌과 회재 이언적 등과 함께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순흥의 병산에 장인인 진사 금원정의 별서(別墅)에 은거하며 퇴계 이황과 서로 왕래하며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1547년(명종 2)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남해로 귀양갔다. 귀양지에서도 인품과 학식이 알려져 그 고장의 선비들이 가르침을 청하였고, 이황 또한 편지와 시와 함께 물건을 보냈으며, 진도에 귀양 가 있던 노수신에게 남해에서 나는 귤을 보내기도 하였다. 1565년(명종 20) 단양으로 이배(移配)되었다. 1567년(명종 22)에 영의정 이준경이 왕에게 성균관 직강에 소명, 1568년(선조 원년)에 직제학·성균관 대사성·공조 참의·이조 참의, 1570년(선조 3)에 절충장군을 지냈다. 1571년(선조 4)에 사간원 대사간 때 김개와 사류망담의 비를 논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강화도 교동으로 낙향하였다. 그해 12월 25일에 향년 64세로 타계하였다.
1828년(순조 28)에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사 홍문관제학 동지춘추관성균관사 세자좌부빈객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증직받았다. 
1834년(순조 34) 오산서원에 김난상을 봉안하여 춘추로 향사를 받들다가 1871년(고종 8) 서원이 철폐되었다. 1891년(고종 28)에 강화도 교동에 있던 묘소를 영주의 동구산으로 이장하고, 다시 1914년 현재의 구수동으로 안장하였다. 1944년에 사당과 매양정을 이건하였고, 1973년에 신도비를 세웠다.

매양정의 내력
권연하(權璉夏)의 「매양정기(梅陽亭記)」를 보면 이 매양정에 대한 내력을 알 수가 있다.
병산 김난상의 옛집은 본래 한양성 남쪽 도제동(道濟洞)에 있었고, 그 집에 이름을 지어 ‘매양(梅陽)’이라고 하였다. 매양이라고 이름을 지은 특별한 의미는 옛날 자취를 증거를 댈 수 없어서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추정컨대 그 지역의 특이한 것으로 인하여 자기의 뜻을 부쳤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아마도 매화가 지닌 속성, 이를테면 매화의 덕이 향기롭고 지조가 정결한 까닭에 성인과 군자들이 자신의 지조와 절의를 가다듬어 고고하고 강직함을 기르는데 합치되는 바가 있기 때문에 좋아한 것이다. 
김난상은 소인들이 모여 많은 어진 선비들을 쫓아내고 죽였던 을사사화를 당하여 중학(中學)의 모임에서 강직한 기질이 우뚝하게 뛰어나 권력과 위협이 그 지조를 빼앗지 못하는 인품을 지녔는데, 멀리 남해로 귀양 가서 19년의 모진 풍상을 겪었다. 그는 만년에 흥주(興州) 병산(甁山)으로 옮겼다가 그 뒤에 후손들이 다시 지금의 영주시 한저(閒渚)로 이거하였고, 한성의 터전은 황폐해져버렸다. 
김난상 시대로부터 300여 년이 지난 후에 영주의 사림들이 구수동에 오산서원을 건립하여 선생을 제향하였으나 나라의 금령으로 훼철되었다가 다시 매양정이란 이름으로 복원하였다. 
매양정이 자리 잡고 있는 주변을 살펴보면 산을 등지고 들을 향하여 있는데, 지금은 도시의 현대식 건물과 주택이 자리하고 있어서 그 옛날 위용을 찾을 길이 없다. 그러나 한저마을 앞으로 새로 난 물길인 서천(西川)이 흘러가고, 멀고 가깝게 서 있는 연화(蓮花)·영지(靈芝)·학가산(鶴駕山) 같은 봉우리가 정기를 보내주며 아침 안개와 저녁노을 사이에 늘어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