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산(缾山) 김난상(金鸞祥, 1507~1571)
청도김씨(淸道金氏) 시조인 영헌공 김지대(金之岱)의 12대손이다. 자는 계응(桂應), 호는 매양(梅陽) 혹은 병산(缾山)이다. 한양의 반송방(盤松坊) 도제동(道濟洞)에서 아버지 김현(金俔)과 어머니 안동전씨(安東全氏) 사이에서 3남으로 출생했다. 그 해 부친이 별세하는 비운을 맞았다.
백씨(伯氏)인 김봉상(金鳳祥)에게 글을 배웠는데, 효행이 뛰어나고 우애가 돈독하여 3형제가 같은 방에서 함께 공부했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서는 “김난상은 학문이 깊고 행실이 도타왔으며, 효성과 우애가 지극했다. 어머니를 봉양함에 성력으로 다했으며, 두 형과 한집에 살면서 물건 하나라도 따로 가지는 법이 없었다.”고 했다.
1526년(중종 21) 봉화금씨(奉化琴氏)와 결혼하였고, 1528년(중종 23) 생원시에 1등 했는데, 퇴계 이황과 동방(同榜)이다. 1537년(중종 32)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저작으로 계공랑에 선임되었고, 다음해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1544년(중종 39) 사간원 정언으로 윤원형의 심복인 이기를 탄핵하였으며, 기묘사화에 희생된 이들의 신원을 청하였다. 사초에는 사관의 이름을 기입하지 않아 사관이 직필하는데 어려움을 없애고자 하였다.
충재 권벌과 회재 이언적 등과 함께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순흥의 병산에 장인인 진사 금원정의 별서(別墅)에 은거하며 퇴계 이황과 서로 왕래하며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1547년(명종 2)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남해로 귀양갔다. 귀양지에서도 인품과 학식이 알려져 그 고장의 선비들이 가르침을 청하였고, 이황 또한 편지와 시와 함께 물건을 보냈으며, 진도에 귀양 가 있던 노수신에게 남해에서 나는 귤을 보내기도 하였다. 1565년(명종 20) 단양으로 이배(移配)되었다. 1567년(명종 22)에 영의정 이준경이 왕에게 성균관 직강에 소명, 1568년(선조 원년)에 직제학·성균관 대사성·공조 참의·이조 참의, 1570년(선조 3)에 절충장군을 지냈다. 1571년(선조 4)에 사간원 대사간 때 김개와 사류망담의 비를 논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강화도 교동으로 낙향하였다. 그해 12월 25일에 향년 64세로 타계하였다.
1828년(순조 28)에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사 홍문관제학 동지춘추관성균관사 세자좌부빈객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증직받았다.
1834년(순조 34) 오산서원에 김난상을 봉안하여 춘추로 향사를 받들다가 1871년(고종 8) 서원이 철폐되었다. 1891년(고종 28)에 강화도 교동에 있던 묘소를 영주의 동구산으로 이장하고, 다시 1914년 현재의 구수동으로 안장하였다. 1944년에 사당과 매양정을 이건하였고, 1973년에 신도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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