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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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욱양서원(郁陽書院)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이황, 황준량
   1661년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에서 북쪽 소백산의 주봉 비로봉 가는 길로 가다보면 읍을 막 벗어날 즈음에 갈림길이 나타난다. 오른쪽으로 마을을 표시하는 바위에 장생이마을이라고 새겨져 있다. 넓지 않은 포장길 좌우로 가옥이 있고, 금방 시원한 기운을 느끼게 된다. 시냇물 소리를 따라 오른쪽으로 가면 금선정이 있고, 그 왼편 서쪽으로 나직한 산이 있다. 그 산 아래 밭 사이로 작은 길이 있고 그 입구에는 ‘욱양단소(郁陽壇所)’라는 팻말이 있는데, 이 길을 따라 산길을 몇 구비 돌아 중턱에 오르면 소담한 연못을 저 아래에 두고 금양정사가 들어 앉아 있다.
 현종 2년(1661) 창설 이황의 위패를 봉안하고 숙종 16년(1690) 황준량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고종 5년(1868) 국령으로 훼철당하고 지금은 금양정사(錦陽精舍)로 남아 있고 단소를 설치하여 봄 가을로 제사를 올리고 있다.

1) 이황(도산서원 참조)
2)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황준량(黃俊良:1517~1563)의 자는 중거(中擧)이며, 호는 금계(錦溪)로 평해인이다. 그의 원조(遠祖)는 고려 때 시중 벼슬을 지낸 유중(裕中)이며, 그의 아들 유정(有定)이 조선조에 벼슬을 해서 공조전서가 되었으며, 영천에 우거하게 된다. 그리고 전서공의 아들은 생원을 지낸 연(?)으로 금계의 고조에 해당된다. 이 무렵 연이 다시 거주지를 풍기로 옮김에 따라 그의 선대들이 여기서 세거하게 된 것이다. 증조부 말손(末孫)은 사온주부를 역임했다.
조부 효동(孝童)과 부 치(?)는 은거하면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부인은 창원 황씨로 교수 한필(漢弼)의 따님인데 중종 12년(1517)에 금계를 낳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자질이 특이하여 일찍이 문자를 해득했는데 “말을 꺼내면 즉시 사람을 놀라게 하여 신동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18세(1534)때에 남성시(南星試)에 응거했는데 고관이 그의 책문을 보고 무릎을 치면서 칭찬하니, 이로부터 그의 문명은 매우 높아지게 되었다. 이후로 그는 시험을 치를 때 마다 늘 앞자리를 차지했다. 정유년(21세, 1537)에는 생원시에 합격했으며 24세(1540년)에 을과에 제 2인 급제에 오르고부터 47세(1563년)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 까지 거의 반평생을 관직에서 보냈다. 그러나 그 당시 그는 수의마저 갖추지 못해서 베를 빌려서 염을 했으며, 관에 의복도 다 채우지 못할 만큼 청빈했다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퇴계는 너무 애석히 여긴 나머지 제문을 두 번이나 쓰고 특별히 「행장」도 썼다. 퇴계는 금계의 행장에서 그의 인물 됨됨이와 어진 목민관, 교육자로서의 면모를 재 형상했다. 즉 그가 신령현에서 백성들을 진휼한 점과 백학서원을 창건하고 문묘를 증축하여 유학을 흥기시키고, 선비들의 사기를 높인 점도 동시에 평가하고 있다.
또 단양 고을의 적폐를 열 가지 조목으로 간곡히 상소하니, 조정으로부터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내가 몹시 가상하게 여긴다.”는 장유(?諭)와 함께 10년을 한정하여 공부(貢賦) 20여 조목을 감면 받게 했다. 특히 향교가 산간 가까이에 있어서 침수의 우려가 있기에 군치(郡治)의 동쪽으로 이전 건축해서 풍화의 근원을 세움에도 전력했다. 성주에서도 영봉서원의 수축과 단장, 문묘의 중수를 주관하는 등 목민관, 흥학 사문의 선구자적 자세를 지닌 그의 인간상을 그려보았다.
『금계집』의 편찬 경위는 이광정(李光庭)이 『금계집』발문에서 상세히 밝혔다. 『금계집』은 퇴계를 비롯한 한강에 의해 편찬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학문 경향과 의리지심이 당대 영남 사림에서 출중했음을 짐작케 한다.
「상퇴계서 上退溪書」,「여영봉제현서 與迎鳳諸賢書」,「상주신재논죽계지서 上周愼齋論竹溪志書」의 글을 통해 금계는 유학을 흥기시키고 유교 교육을 통한 덕치수신을 강조했다. 그리고 유교 교육의 활성화 방안으로 향교 교육의 강화와 향촌 사회에서 유교 이념의 구체적 실천대안도 제시했다.
퇴계는 금계가 영진(榮進)의 이익에 급급하지 않게 된 직접적인 계기를 무오년(42세, 1558)으로 잡고 있다. 즉 금계가 단양 군수로 부임하고 있을 당시 조정의 대신들이 금계의 치적과 학문을 들어 문한의 직임을 맡기자고 상소했으나 질시를 당해 중지된 이후, 금계는 위기지학으로 그의 학문 세계를 적극 전향했었다고 행장에서 밝히고 있다.
책문에서 선비들의 타락상을 열거하면서 이런 폐단을 구제할 방안과 그 본원을 밝히고 있다. 선비란 자들이 과거 시험에 얽매여서 유학의 본질을 내버려두고 성률만을 읊조리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난국을 수습할 대안으로 서원 교육을 통해 이를 실현 가능케 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만고의 역사에 부침 되는 인물들의 사적을 들어서 그 교훈성을 획득한 뒤에 위기(爲己) 공부, 즉 성리학에 침잠하여 성인을 표준화하여 현인을 기약하라는 결론을 도출해 내었다. 일련의 산문과 시를 통해서는 그의 사상 경향이 위기지학적인 것으로 귀결됨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그의 사상이 단순히 소극적인 위기지학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구체적인 실천 유학으로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16~17세기 퇴계 학단의 처사들이 향약을 실시하여 향촌 질서를 유지하고 서원을 중심으로 활발한 언론 활등을 펴 향론을 형성? 조정하였고, 국가적 위기에 처해서는 의병을 조직하여 향토를 수호하고 국난을 극복하는데 기여한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단양향교중창기」에서는 그가 단양 고을 원으로서 교육과 어진 목민정치를 실현했음이 충분히 입증된다. 이런 점에서 위기지학을 실천 유학으로 체행한 인물로 지적할 수 있다. 「자양서당기」에서는 금계의 이러한 지방 교육 목적이 선명히 드러난다. 이른바 선비 정신을 진작시키고 사회의 복리 안녕에 기여케 한다는 근대적 교육 지향점과도 일치한다.
「일문약의 一門約議」에서는 금계는 효제를 숭상하여 신구 세대가 상호 의리를 존중하여 우의를 돈독히 할 것을 강조했다. 이러한 신뢰의 폭은 급기야 향촌 전체의 것으로 파급되기를 희망하기에 이른다. ‘계’모임을 통한 향촌의 적극적인 교화책이다.
「서사마계후 書司馬契後」에서 사귐의 즐거움을 피력한다. 그는 향촌 사회의 대한 미풍양속의 진작과 교화를 통해 유교 덕목 구현화 가능성을 부여했던 것이다. 금계는 여러 산문을 통해서 역사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표명했는데 위기지학을 지향한 유자적 입장에서 역사를 주시하고 있었다. 금계가 지향한 역사관이 그만의 독특한 역사의식이라고는 볼 수 없다. 다만 당대 성리학적 이데올로기의 범주 안에서 공유된 역사의식의 일단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도원변 桃園辯」에서 그는 종래 전설적인 도원, 곧 ‘무릉도원’의 허구적인 이야기를 근거가 없다는 논리를 전개하여 부정하면서 역사란 허무맹랑한 이야기의 집합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지론을 전개한다. 금계는 역사란 이러한 현실적이고 올바른 역사의 전수만이 진정한 역사의 가치를 획득한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그 역사의 전승은 오직 천명에 의한 것이라야 바람직한 것이라는 논리를 「기자위무왕진홍범론 箕子爲武王陳洪範論」에서 개진했다.
「대책문사재득실순박 對策問史才得失純駁」이란 글은 실제로 역사를 기록할 사관의 인간 됨됨이가 자세를 꼼꼼하게 제시한 글인데 금계는 사관은 학문과 재질, 절조를 골고루 갖추어야 한다며 그 준거로 중국 역대 사관 중 ‘춘추’를 집필한 공자, ‘강목’을 찬술한 주자를 이상적 사가형이라고 손꼽았다.
「예조청찬동국통감강목전 禮曹請撰東國通鑑綱目箋」에서 역사 기술 원칙을 말하기를 역사란 엄연한 현실의 기록이어야 한다고 했다. 미신적이고 허탄한 요소는 완전히 배제되어야 하며, 역사의 전승 관계는 오로지 천명에 의한 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역사를 집필하는 사관은 엄정한 책무를 지닌 존재로 보았다. 또 중국 역대 정통 사서로는 공자의 ‘춘추’와 주자의 ‘강목’을 들어 정통 유학에 입각한 역사관에 진정한 의미를 두었음을 살필 수 있었다.
그는 당대 16세기 우리 문단의 주류를 형상한 사림파 문학의 궤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도학 위주에서 경세적인 국면으로 경사되는 시각을 부분적으로 보이고 있다. 그의 문학에 관한 총체적 양상을 집약한 글로써, 이산해가 쓴 발문을 들 수 있다. 그가 초년에 사장학적적인 공부를 지향하다가, 만년에 도학 위주의 공부로 선회한 점을 강조하고 있다. 초년의 외도적인 학문 추구에 대해 매우 애석한 심정을 토로했다. 심성 공부에 주력해서 지난날의 비루함을 일신하여 군자의 도로 나아갔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사장학 곧, 문학에서 대우, 성률 등을 전면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에 대해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 궁극적으로는 도학 공부를 지향하였다는 것이다.
「증김생륵등제유 贈金生?等諸儒」에서는 문장을 여사로 보았으며, 선비로서 우선하여야 할 것은 존심양성(存心養性) 공부라는 그의 입지가 여실히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 「차청천현운육언 次晴川縣韻六言」에서는 맨 끝 부분에서 ‘조충전각’의 수식 위주나 연구(聯句)를 다투는 등의 사장 위주의 문예를 노년에 도학 위주로 전향했던 바 이는 그의 주된 학문이 방향이 심성 공부였음을 시사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그의 학문적 수양은 실제 시세계에서 산수 자락의 정서나 경세적인 시정(영사시 포함)으로 표출되는데, 그의 작품에서는 이대별(二大別)하여 그 주제를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금계는 원란암 시에서 귀전 은둔의 삶을 희구해 왔다고 퇴계에게 고백했다. 그는 유자적인 소양을 바탕으로 선비다운 풍류미를 구비하고 있었다. 곧 선비적인 멋의 발현이라 하겠다. 이를 통해 실현되는 한거 청적미는 자연 객체와 어떤 조화미를 갖는가를 연결시켜 보았다.
금계는 유무득실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하면서, 도연명과 맹자의 전례를 들어서 그의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명예에 빠져 길이 아득할 뿐이었으나, 서책 속에서 참된 스승을 만난 기쁨을 획득했다고 했다. 금계 시의 한 특징인 산수자락(山水自樂)이 진락 추구로 전이되어 급기야 물아일체로 몰입되는 양상을 주시했다. 말하자면, 금계의 내적 심성 수양의 진전 양상이 겉으로 표출된 작품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유가적 입장에서 역사를 주지하여, 전대의 역사는 후인들로 하여금 감계와 교훈성을 제시해야 한다는 논리를 도출했다. 실제로 문집에 산견되는 영사 회고시에서 이러한 그의 입장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금계는 백제의 흥망성쇠에 대해 여러 편의 시를 통해 낙화암을 중심으로 해서 백제 멸망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애상도 하고 때로는 의자왕의 실정을 따끔하게 질책도 하면서 역사적 교훈성을 보고했다. 그러기에 금계에 있어서 백제의 역사는 사장된 역사가 아니라 재 반사되어 우리민족의 미래를 예고하여, 반성의 계기를 마련한다는 논리를 제공한다. 바로 비난받을 역사의 회고를 통해 미래 역사의 버팀돌로 삼자는 것이다. 한편 그가 목민관의 직책을 수행함에 있어 전심전력으로 흥학사문하며, 애민의 자세를 견지했음이 「단양진폐소」나 애민시 계열에서 극명히 드러남도 볼 수 있었다.
금계 시에서는 4언, 6언 등 장편시가 많이 산견되는데 이는 그만큼 시에 자신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덕현기행」은 조선 후기에 대거 발생된 서사시 계열의 작품에 버금갈 만한 수작이었다. 금계는 실천적 의지가 강한 유자로서 경세적인 문학관을 구비했으며, 시에서는 풍류를 지닌 산수자락과 물아동체의 경지를 회구했다. 그리고 이는 영사의 회로를 거쳐 새로운 역사를 재창조하기 위한 감계교훈을 제시했다 또 어진 목민관으로서 애민 의식을 갖춘 퇴계의 문도였다.


 錦溪精舍 完文

此間 有所謂錦陽精舍者 亡友錦溪主人黃君俊良 擬爲晩年藏修之所也 舍未訖功 而主人仙去 幹僧行思 能奉遺志 畢就而勤守之 事甚嘉尙 倘或後來寖遠寖忘 官不知來由 視同在刹之例 役使僧人 令不得存接 則無人守護 精舍鞠爲茂草 丁寧欲望仁慈 深軫此意 具由下完帖于舍中及維羅所 自今以後 守護僧人永除役使 俾得專意守護 庶其家子弟等輩 往來讀書於其中 因以少釋主人有志未就之餘憾 豈不幸甚 滉與溪主有契義 來過故里 不勝山陽鄰笛之愴欲圖護此舍 以寓念舊之情 敢此瀆稟 滉惶懇
嘉靖丙寅二月日

금계정사 완문(錦溪精舍 完文)

여기 금양정사는 가신 벗 금계주인 황준량(黃俊良)이 만년에 학문을 닦고 도를 강론하는 처소로 삼으려 했던 곳이다. 정사가 채 이루어지기 전에 주인은 돌아가시고, 일을 맡아보던 중 행사(行思)가 유지를 받들어 역사를 마치고 착실히 지켜왔음은 가상한 일이다. 혹시 차츰 세월이 오래되면, 관청에서 이 정사의 내력을 모르고 여느 절의 경우와 같이 여겨 중에게 온갖 구실을 시켜 중이 정사에 몸담아 있지를 못하게 하면 정사를 지켜 돌볼 사람이 없어 황폐하게 될 것이다. 바라건대 특별한 진념으로 정사의 유래를 갖춘 완첩(完帖)을 정사 및 유라소(維羅所)에 내려, 이 뒤로는 지키는 중에게 영구히 구실을 면제, 정사를 수호하는 데만 전념하게 하여, 그 집 자제들이 왕래하며 거기서 독서하게 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한 주인의 한스러움을 풀게 되면 어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정사의 주인과 교분이 있는지라, 그 벗 마을을 지나는 길에 서글픈 심회를 견딜 길 없어, 정사가 길이 보전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옛 일을 생각하는 정을 곁들여 감히 이렇게 부탁하노니 이황은 두려운 마음이 든다.

가정(嘉靖) 병인(1566년) 2월 일.

錦溪精舍 重修記

小白自太白 逶迤南走 結爲峯巒 流爲川澗 峙立盤回 而爲豊基郡於此必有英才高品 鍾得山川之精者乎 錦溪黃先生 生于郡之西部齠年穎詣 夙進大雅 中年向道 摳衣退門 向之文章蔚然者 卒潤道德而粹如也 宜乎退陶之推許 而景仰者也 郡之北有郁錦溪 乃小白第一洞壑 而近先生之居 故先生取溪名爲號 先生之託趣是溪 而玩娛平日者 盖有素矣 先生晩有退休之志 就其溪回山擁處 營立精舍數楹 以爲講道藏修之所 夫先生之才學超詣如彼 而得退溪 然後卒潤道德 而振輝當世 郁錦之泉石 淸淑如彼 而待先生然後能擅名勝 而播芬後世 始知道德必有所須 山川亦有所待 而不無有意於其間也 不幸舍未訖工而 先生下世 退溪先生深軫眷懷之情 馳書郡人俾示完護之意 厥後柳謙巖 來莅是郡 又繼退溪之意 留書而眷護斯舍 遺篇斷簡 至今照人耳目 嗚呼 其可敬也哉 丙子之亂 舍有回祿之灾 遣址鞠爲茂草 邇來六十年間 過者無不嘆傷 則其爲子孫之感 又如何哉 景溓到郡之翌年 錦溪之嗣孫垶來 諗重創之意 余嘉其意而往觀遺墟 則洞深而窈窕 川回而幽闃 信乎有德者 藏修之所 而山光濃郁 水色爛錦溪之得名 果不虛矣 但舊基敝濶斗絶 雖宜其睡望 而不宜其恒居 故又勸立舍傍奧 以爲久居之所 黃生唯唯 後數月 黃生來告曰 先就舊址而成舍 傍舍又將鳩材而成焉 若黃生可謂有後嗣 不棄其基 亦可謂肯堂肯構者也 噫 有替則有興 氣數之運 有晦則有顯 天理之常 今黃生能拓荒廢之舊基 復作精舍於六十年後 其或天佑德門 使其子孫 講習此舍 復率先祖攸行耶 抑或山川毓精 代不乏人 一郡多士 將有聞風興起 因文入道 而復繼前轍者耶 替而後興 必期於此舍 晦而復顯 必牖於此舍 吾以是深有望於錦溪子孫 及同郡多士 其勉之哉 黃生以吾宰是郡 而且諳事實 故請爲之記 余不敢辭 遂爲之記 辛巳正月日 行豊基郡守 兼春秋館編修官 洪景濂記

금계정사 중수기(錦溪精舍 重修記)

태백산에서 뻗어 내린 소백산이 느렁차게 남쪽으로 치달아 산봉우리를 맺고 냇물을 이루며 우뚝 높이 솟고 빙빙 돌아 흘러 풍기군(豊基郡)을 형성한다. 이렇게 산수가 아름다운 풍기고을에 영재가 있음은 필시 산천의 정기가 모여 있음이리라. 금계(錦溪) 황(黃)선생은 이 고을 서부에서 나서 어려서부터 출중한 자질이 알려졌고, 자라서 퇴계 선생의 문하에서 도학을 밖아 빛나는 문장, 높은 도덕으로 퇴계 선생의 기대와 후생의 우러름이 두터웠다.
고을 북쪽 욱금(郁錦) 계곡은 소백산의 첫째가는 골짜기로 선생의 마을에서 가까워 선생은 시내 이름으로 아호(雅號)를 삼았다.
선생은 평소 이 시냇가에 즐겨 노닐었고, 만년에 은퇴하여 지낼 뜻으로 냇물이 안고 돌아 흐르는 산언덕에 두어 칸 정사를 지어 도를 강론하고 수양하는 처소로 삼으려 했다.
선생의 재주와 학문이 뛰어났으나 퇴계 선생을 얻은 뒤에야 세상에 떨쳤으며, 욱금의 산수가 저렇듯 좋으나, 선생을 기다려서야 명승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불행히도 정사가 미처 준공되기 전에 선생이 타계함에 퇴계 선생이 고을 사람에게 그 수호를 당부했고, 그 뒤 류겸암(柳謙巖)이 이 고을에 부임하여 퇴계의 뜻을 이어 글월을 남겨 이 정사를 각별히 돌보아 보호하도록 했다.
병자호란 때 화재로 소실되어 빈터에 잡초가 우거진지 60년간 지나다니는 이들이 탄식함을 마지않았으니, 그 후손된 이들의 감회야 어떠했을 것인가.
내가 이 고을에 부임한 이듬해에 금계의 사손 성(垶)이 와서 중건할 뜻을 말하기에 내 그 뜻을 가상히 여기고, 그 자리를 가서 본즉 골짜기가 깊고 조용하며 냇물이 안고 돌아 외지고도 산수가 아름다우니 실로 덕 있는 이의 거처할 만한 자리여서 금계라는 지명이 과연 헛되지 않음을 실감했다.
다만 옛 터는 시원스럽기는 해도 가파로와 전망은 좋으나 오래 거처하기에는 마땅치 못할 듯 여겨져 그 곁에 아늑한 자리를 권했더니, 황생(黃生)이 그러기로 했다. 몇 달 뒤에 황생이 와서 “우선 옛 자리에 정사를 짓고, 또 물자를 마련하여 곁에도 짓겠노라.”고 했다.
실로 황생 같으면 후사를 두었다고 이를 만 하겠다.
아! 쇠하고 흥하며, 숨고 나타남은 기수(氣數)의 운이요, 천리(天理)의 떳떳함이라.
이제 황생이 황폐한 옛터에 다시 정사를 이룩했음은 혹 하늘이 유덕한 가문을 도와, 그 자손을 이 정사에 공부하여 다시 선조의 행하신 바를 좇게 하심인가. 혹 산천의 정기로 인재가 끊이지 않고 온 고을의 선비들이 분발하여 다시 선철을 잇게 하렴인가. 쇠퇴하고 흥함이 이 정사에 있고 숨고 나타남이 이 정사에 있으니 내 이 때문에 금계의 자손 및 풍기 고을의 선비들에게 기대가 크다. 힘쓸지어다. 황생이 내가 이 고을에 수령으로 있고 또 사실의 전말을 잘 안다는 이유로 기문을 부탁하니 내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글을 쓴다.

1701년(숙종27) 1월 풍기군수 홍경렴(洪景濂)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