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개립(李介立) , 1546년(명종 1)년 ~ 1625년(인조 3)년
1546년(명종 1) 경상도 용궁현 대죽리에서 아버지 이해(李 立+亥)와과 어머니 예천권씨(醴泉權氏) 사이의 3남으로 태어난 이개립은 어려서부터 문장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을 비롯한 인근 선생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1567년(명종 22) 진사가 된 이개립은 이듬해 아버지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병 수발을 하며 여섯 달 동안 의관을 벗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무덤 곁을 지키며 사는 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효성을 다하였다. 그의 건강을 염려한 맏형 이중립(李中立)이 억지로 권하여도 뜻을 거두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이 같은 효행을 감사(監司)에게 알리려 하였지만 그는 오히려 자제들을 보내어 길을 막고 말리게 하였다. 부친상을 마친 뒤에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예천 금곡당(琴堂谷)으로 이사하여 봉양에 정성을 다하였다.
1586년(선조 19) 이개립은 탁월한 효행을 이유로 조정의 부름을 받아 재랑(齋郞)에 올랐지만, 홀어머니와 떨어져 지낼 수 없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 모친상을 당하자 이미 50세가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예전과 같이 정성을 다하여 상례를 치른 뒤, 1591년(선조 24)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과 함께 경상도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참봉(參奉)에 제수되자 비로소 사은숙배(謝恩肅拜)하고 관직에 나아갔다.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영천으로 낙향하다
이개립은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들은 죽는 것이 도리이다.”라고 말하며, 인근의 사우(士友)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참전한 명나라 군대의 군량을 조달하고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둔전(屯田) 경영의 책임을 맡아 큰 공로를 세웠다.
1594년(선조 27) 자여도 찰방(自如道察訪), 이듬해 낭천 현감(狼川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던 이개립은 1596년(선조 29)에는 산음 현감(山陰縣監)으로 나아가 선정(善政)을 베풀며 전란의 상처를 수습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뒤에는 종사관(從事官) 황여일(黃汝一)의 천거로 향병대장(鄕兵大將)이 되어 전공을 세웠으나, 병사(兵使) 김경서(金景瑞)가 의병들이 자신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정에 무고를 하자 관직을 버리고 영천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두문불출하며 세상사에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서울에서 사람이 내려와도 안부를 물을 뿐 정치에 관한 일을 전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다만 제자들을 모아 강학(講學)에 힘쓰고, 동료들과 더불어 시주(詩酒)로 소일하며 은자(隱者)로서의 삶을 살았다. 광해군의 난정(亂政)이 시작된 이후로 세상이 급변하자 탄식만 할 뿐 더욱 말이 없어졌고, 1625년(인조 3) 시 1수를 남겨 친구들과 작별한 뒤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
2) 김응조(金應祖) , 1587년(선조 20) ~ 1667년(현종 8)
본관은 풍산. 자는 효징(孝徵), 호는 학사(鶴沙)·아헌(啞軒). 아버지는 산음현감 대현(大賢)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1613년(광해군 5)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광해군의 정치를 피해 문과 응시를 포기하고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학문에 힘썼다. 1623년 인조가 즉위하자 알성문과에 급제했다. 그뒤 병조정랑·흥덕현감·선산부사를 지냈다. 1637년(인조 15) 청 사신의 빈번한 출입으로 재정이 곤란해지자, 접대비 염출을 위해 환곡의 이자 가운데 일부를 중앙관아에서 쓰게 하는 삼분모회록법(三分耗會錄法)을 제안하여 이를 시행하게 했다. 효종초에 사간·동부승지·좌부승지·공조참의를 거쳐 1662년(현종 3)에는 대사간·한성부우윤에 이르렀다. 문장에 능했다. 안동 물계서원(勿溪書院), 영천 의산서원(義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학사집〉·〈사례문답 四禮問答〉·〈산중록 山中錄〉·〈변무록 辨誣錄〉이 있다.
김응조의 간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