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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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의산서원(義山書院)
   영주시 장수면 갈산리(갈미)
   이개립, 김응조
   1610년
   1679년
   
   
광해군 2년(1610) 고장 사림에서 성곡 2리 의산마을(분지거릉골) 행의사(行依寺) 옛터에 의산서당(義山書堂)을 창건, 현종 5년(1664) 절효사(節孝祠)를 건립하고 이개립의 위패를 봉안 숙종 5년(1679) 김응조의 위패를 봉안하고 의산서원(義山書院)으로 승격 고종 5년(1868) 훼철 되었다. 1970년에 현 소재지인 장수면 갈산리(갈미)에 복원을 하였다. 절효사(節孝祠)는 경덕사(景德祠)로 바뀌었다. 의산서당기(義山書堂記)와 봉안문(奉安文)과 상향문(常享文)은 김응조(金應祖)가 짓고 추향봉안문(追享奉安文)과 상향문(常享文)은 김빈(金賓)이 지었다.
성오당(省吾堂) 이개립(李介立, 1544~1625)을 모신 서원으로 1610년(광해군 2) 마을 사림들이 군수에게 주청하여 의산서당을 창건하였다. 1664년 묘우를 건립하여 성오당 이개립의 위패를 봉안하고 절효사(節孝祀)라고 하였다. 1679년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를 배향하고 서원으로 승격시켰다. 고종 때 철폐되었다가 근래에 다시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 이개립(李介立) , 1546년(명종 1)년 ~ 1625년(인조 3)년
1546년(명종 1) 경상도 용궁현 대죽리에서 아버지 이해(李 立+亥)와과 어머니 예천권씨(醴泉權氏) 사이의 3남으로 태어난 이개립은 어려서부터 문장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을 비롯한 인근 선생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1567년(명종 22) 진사가 된 이개립은 이듬해 아버지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병 수발을 하며 여섯 달 동안 의관을 벗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무덤 곁을 지키며 사는 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효성을 다하였다. 그의 건강을 염려한 맏형 이중립(李中立)이 억지로 권하여도 뜻을 거두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이 같은 효행을 감사(監司)에게 알리려 하였지만 그는 오히려 자제들을 보내어 길을 막고 말리게 하였다. 부친상을 마친 뒤에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예천 금곡당(琴堂谷)으로 이사하여 봉양에 정성을 다하였다.
1586년(선조 19) 이개립은 탁월한 효행을 이유로 조정의 부름을 받아 재랑(齋郞)에 올랐지만, 홀어머니와 떨어져 지낼 수 없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 모친상을 당하자 이미 50세가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예전과 같이 정성을 다하여 상례를 치른 뒤, 1591년(선조 24)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과 함께 경상도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참봉(參奉)에 제수되자 비로소 사은숙배(謝恩肅拜)하고 관직에 나아갔다.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영천으로 낙향하다
이개립은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들은 죽는 것이 도리이다.”라고 말하며, 인근의 사우(士友)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참전한 명나라 군대의 군량을 조달하고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둔전(屯田) 경영의 책임을 맡아 큰 공로를 세웠다.
1594년(선조 27) 자여도 찰방(自如道察訪), 이듬해 낭천 현감(狼川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던 이개립은 1596년(선조 29)에는 산음 현감(山陰縣監)으로 나아가 선정(善政)을 베풀며 전란의 상처를 수습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뒤에는 종사관(從事官) 황여일(黃汝一)의 천거로 향병대장(鄕兵大將)이 되어 전공을 세웠으나, 병사(兵使) 김경서(金景瑞)가 의병들이 자신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정에 무고를 하자 관직을 버리고 영천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두문불출하며 세상사에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서울에서 사람이 내려와도 안부를 물을 뿐 정치에 관한 일을 전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다만 제자들을 모아 강학(講學)에 힘쓰고, 동료들과 더불어 시주(詩酒)로 소일하며 은자(隱者)로서의 삶을 살았다. 광해군의 난정(亂政)이 시작된 이후로 세상이 급변하자 탄식만 할 뿐 더욱 말이 없어졌고, 1625년(인조 3) 시 1수를 남겨 친구들과 작별한 뒤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
 
2) 김응조(金應祖) , 1587년(선조 20) ~ 1667년(현종 8) 
 본관은 풍산. 자는 효징(孝徵), 호는 학사(鶴沙)·아헌(啞軒). 아버지는 산음현감 대현(大賢)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1613년(광해군 5)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광해군의 정치를 피해 문과 응시를 포기하고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학문에 힘썼다. 1623년 인조가 즉위하자 알성문과에 급제했다. 그뒤 병조정랑·흥덕현감·선산부사를 지냈다. 1637년(인조 15) 청 사신의 빈번한 출입으로 재정이 곤란해지자, 접대비 염출을 위해 환곡의 이자 가운데 일부를 중앙관아에서 쓰게 하는 삼분모회록법(三分耗會錄法)을 제안하여 이를 시행하게 했다. 효종초에 사간·동부승지·좌부승지·공조참의를 거쳐 1662년(현종 3)에는 대사간·한성부우윤에 이르렀다. 문장에 능했다. 안동 물계서원(勿溪書院), 영천 의산서원(義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학사집〉·〈사례문답 四禮問答〉·〈산중록 山中錄〉·〈변무록 辨誣錄〉이 있다.
 
김응조의 간찰

의산서원은 동으로 문수산과 청량산, 남으로 학가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마을 산자락 끝에 남서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토석담장을 돌린 장방형 일곽 안에 양졸당·의산서당·내삼문·사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으며, 각 건물은 조금씩 비켜 앉아 있다. 의산서원 좌측에는 계림군(鷄林君) 이흥상(李興商)과 성오당 이개립의 묘를 수호하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재사인 석종재(石宗齋)가 있다.

저서 성오당문집
이개립이 세상을 떠난 뒤 그가 남긴 저술들은 전란의 와중에서 대부분 소실되고 흩어져 후세에 전해지는 것이 별로 없었다. 1776년(영조 52)에 이르러서야 5대손 이광배(李光培)와 그의 종질(從姪) 이귀경(李龜鏡)이 산일(散佚)된 유고(遺稿)를 수습하여 3권으로 편차하고 부록(附錄)을 덧붙여 목활자로 간행하였다.
『성오당문집』의 전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권두(卷頭)에는 이 책의 교정을 맡았던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편찬·간행의 과정에 대하여 약술한 서문 및 목차가 있다.
권1에는 「백운동취한대즉사(白雲洞翠寒臺卽事)」를 비롯한 5언절구 30수, 「재저곡조우구호(在渚谷阻雨口號)」 등 오언사운(五言四韻) 47수, 「만력경진동배소고선생유응석사복차시(萬曆庚辰冬陪嘯皐先生遊凝石寺伏次詩)」 등 7언절구 86수가 수록되어 있다.
권2에는 「유별박경일동년시(留別朴景一同年詩)」 등 칠언사운(七言四韻) 31수, 「신명사(神明舍)」 등 부(賦) 4수,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 등에게 보낸 서(書) 14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3에는 백형 이중립의 행적에 대해 약술한 「백씨유사(伯氏遺事)」 등 잡저(雜著) 2편과 친구 정탁을 송별한 서(序), 백형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祭文), 스승 김성일에게 보낸 편지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개립의 행적과 관련된 글들을 모아놓은 부록의 상편(上篇)에는 김응조(金應祖)가 지은 행장(行狀), 조경(趙絅)이 지은 묘갈명(墓碣銘), 김응조가 지은 묘지명(墓誌銘), 곽진(郭진[山+晉])이 지은 사우록(師友錄), 문인들이 지은 제문 8편, 김응조가 지은 봉안문(奉安文)·상향축문(常享祝文)·상량문(上樑文) 등이 수록되어 있다.
하편(下篇)에는 이광윤(李光胤) 등 문인들이 지은 만사(輓詞) 35편, 예천 성오당의 경관을 노래한 「성오당팔영(省五堂八詠)」, 정사원이 지은 「양졸당서(養拙堂序)」, 김홍민(金弘敏)·고응척(高應陟)이 지은 「양졸당팔경(養拙堂八景)」, 청풍거사(淸風居士)가 지은 「경정성오당(敬呈省五堂)」 등이 실려 있다.
권말에는 본서의 간행 내력을 밝힌 이광배의 발문(跋文) 및 백형 이중립이 남긴 「부귀계선생뇌서함재문(附歸溪先生誄徐涵齋文)」이 첨부되어 있다.
 
 

義山書堂記(鶴沙先生文集卷之五)
 
太白而小白。小白而走馬。其一枝嶐然東注。至百許步而斗斷焉。卽行依寺之故基也。由其中以望。則東有文殊,淸涼。南有鶴駕。擧皆合形。效奇於堂廡之下。若好事者指揮而爲之也。其始山之僧却月。重建數間蘭若。敻絶幽邃。允合藏修之所。土之居者斷斷焉相與謀曰。吾所處地。距學宮最遠。盍因是爲多士鍊業之所乎。遂以告姜侯絪。侯卽喜而許之。乃闢其室爲堂。緝其廚爲室。益之以廚庫。繚之以墻垣。不數月而工告訖。扁之曰義山書堂。大會遠近士友以落之。仍收合若干穀物。以爲養士之需。於是劬書者往焉。攻文者聚焉。由是成進士登大科者踵相續也。遠近人稱文明之地。必曰西面西面。嗚呼盛矣。雖然。書堂之設。豈端使然哉。三代之學。皆所以明人倫也。家有塾黨有庠術有序。相與倡明小學大學之道。自灑掃應對進退之節。以至修身齊家治國平天下之道。莫不因其群居講劘而有得焉。不少以銜杯酒弄雲月爲事。則吾黨之所當講而勉之者。豈不在於是乎。而況物之廢興成毀。相尋於無窮。昔也寺刹。今也書堂。則書堂之復爲寺刹。蓋未可知也。後來繼今者。可不思所以守護之哉。咸曰。子之言是也。盍爲志爲後人倡乎。遂書之。
通訓大夫 前行司憲府執義 豐山金應祖記

의산서당기(義山書堂記)
태백에서 소백으로, 소백에서 주마산(走馬山)으로, 그 한 줄기가 우뚝하니 동쪽으로 달려, 백여보(步)증에 이르러 도사려 끊겼으니, 곧 행의사(行依寺) 옛터다. 그 가운데서 바라보면 동으로 문수산(文殊山) ·청량산(淸凉山), 남으로 학가산(鶴駕山)이 있으니, 모두 이 터의 풍광을 형성하기 위하여 있는 듯하다.
그 처음에 중 각월(却月)이 두어 칸 집을 중건했는데, 깊숙하고 조용하여 공부하기에 좋은 자리였다. 부근 사람들이 뜻을 모아 “우리가 사는 데는 향교도 멀고 하니, 여기에 공부 터전을 만들어야 한다.” 하고 드디어 군수 강인(姜絪)에게 고했던 바, 군수가 선뜻 허락했다. 서둘러 서당과 함께 주사(廚舍)며 부속건물들을 이룩하여 의산서당이라 하고, 원근의 선비들이 함께 하여 낙성 모임을 베풀었다. 인하여 곡식 약간을 거두어 선비를 양성하는 기금을 마련하니, 많은 선비들이 찾아들어 여기서 진사며 대과(大科)가 잇달아 배출되자 원근의 사람들이 문명한 곳을 일컬을 때는 반드시 의산서당이 있는 ‘서면(西面), 서면(西面)'이 라 했으니, 실로 대단하다 하겠다.
비록 그렇지만 서당의 설립이 어찌 정병 그것만을 위함이겠는가 하 ·은 ·주 3대의 배움은 모두 인륜을 밝히기 위함이다. 마을에는 글방이 있고 고을에는 학교가 있고 나라에는 태학이 있어 서로 더불어 소학 ·대학의 도리를 제창함에 청소하고 응대하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예절로부터 몸을 닦고 집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편안케 하는 도리에 이르기까지 함께 모여 강마를 통해 않은 것이 없다.
잠시라도 술잔을 잡고 구름과 달을 구경하는 것을 일삼지 않는다면 우리고을에서 마땅히 익히고 힘써야 할 것이 어찌 이에 있지 않을 것인가. 하물며 사물의 흥폐와 성훼(成毁)는 서로 끝없이 찾아드니 옛날 사찰이었던 것이 지금은 서당이 된즉 서당이 다시 사찰이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없는 일이다. 훗날에 지금을 계승하는 자들이 어찌 이를 수호할 방법을 생각지 않을 것인가.” 하니 모두 “그대의 말이 옳다. 기록을 해서 후인들에게 제창의 자료로 남기도록 하자.”고 하여 마침내 이와 같이 쓴다.

통훈대부 품계로 사헌부집의를 지낸 풍산 김응조(金應祖)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