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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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방산서원(方山書院)
   영주시 이산면 용상1리 428-5
   전희철, 전응방, 전익희, 전명룡
   1808년
   
   
   
순조 8년(1808) 방산이사(方山里社)를 세우고 전희철 전익희 전명룡의 위패를 봉안 1981년 방산서원(方山書院)으로 이룩 되었다. 봉안문(奉安文)은 이휘녕(李彙寧)과 김종휴(金宗烋)가 지었다. 지금은 방산서원을 철거하고 방산 아파트를 지었다. 영주시 이산면 용상1428-5로 이건하였다.

1) 전희철(全希哲) , 1425년(세종 7)년 ~ 1521년(중종 16)년
본관은 옥천(沃川)이며 자는 원명(原明)이고 호는 휴계(休溪)이다.
무과(武科)를 거쳐 내관직으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 상장군(上將軍), 어모사직(禦侮司直)을 지냈다.
휴계 전희철은 1425년(세종 7) 옥천군 문시랑리의 본가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이 강직하였던 그는 재능이 남다르고 지조가 확고하였으며 활달한 성격에 검약을 생활화하였다고 한다. 이는 그의 묘비에 적혀 있는 “성품이 본래 강직하고 검약한 생활을 하였다.[性素剛直克守儉約]”는 문구에서도 확인된다.
세종 20년간에 무과에 급제한 그는 사포서별제를 역임하였고, 문종과 단종 때에 어모사직을 지냈다. 특히 문종은 국사를 공정하고 성실하게 처리할 뿐만 아니라 높은 인품까지 겸비한 전희철을 매우 총애하였으며, 그 결과 벼슬이 상장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종은 병약하여 정사를 처리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에 문종은 1452년(문종 2) 나이 어린 세자를 걱정하여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에게 보필을 부탁하고, 성삼문(成三問)·신숙주(申叔舟)·박팽년(朴彭年) 등에게도 좌우에서 돌봐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러나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한명회(韓明澮) 등과 결탁하여 1453년(단종 1) 10월 황인보 등을 죽이고, 1455년(단종 3)에 왕위를 찬탈하였다. 이러한 세조의 왕위 찬탈에 울분을 참지 못한 전희철은 젊디젊은 나이인 30세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처음에는 장남 전호(全琥)가 살고 있는 옥천 땅에서 지냈지만, 후일 2남 전박(全珀)을 데리고 영천 휴천리(休川里)로 옮겨갔다. 휴천으로 옮겨간 그는 농사일을 하는 한편 당대의 명사(名士) 김담 등과 교유하면서 시를 짓고 춘추를 강명하는 일을 즐거움 삼아 지냈다. 그의 호인 휴계도 이때 지은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457년(세조 3) 6월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단종을 위한 절의를 지키고자 했던 그는 단(壇)을 쌓은 뒤 밤마다 의관을 단정히 하고 강원도 영월을 향하여 절하면서 단종의 평안을 빌었다. 이후 단종의 피살 소식을 듣고 나서는 3년간 상복을 입고 부모의 상을 치루는 것처럼 지냈으며, 죽음에 임박해서는 자손들에게 1년에 한 번씩 단종의 능을 배알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니 그의 충절을 짐작할 만하다.
30세에 벼슬에서 물러나 50년 이상의 긴 시간을 고향에서 은둔하면서 지내던 전희철은 중종 연간에 80세 이상의 노인에게 주는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호군(通政大夫護軍)에 올랐다. 1527년(중종 16) 8월 3일 마침내 향년 97세로 숨을 거두니 천수를 다 누렸다고 하겠다. 그 해 11월 영천군 동쪽 칠성산 용동에 장사를 지냈다.
 
 
 
2) 전응방(全應房) , 1491년(성종 22)년 ~ 1554년(명종 9)년
본관은 옥천(沃川) 이며 자는 이기(而紀), 호는 야옹(野翁) 이다.
단아하고 청순한 인품에 일찍부터 명예와 영달을 초월하고 실천을 위주로 하는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또 매년 세시(歲時) 때면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을 찾아 도포자락에 흙을 담아 능 위에 던져 올리며 곡을 할 정도로 충절이 높았다. 그 결과 사림으로부터 효와 충을 겸비하고 유학의 정신을 생활의 장에서 올바르게 구현한 참된 선비로 신망을 받았다.
할아버지 전희철은 관직에 있으면서 세조의 왕위 찬탈의 참상을 직접 겪은 인물이다. 이 때문에 자손들에게 관직에 나아가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는데, 조부의 이런 유훈을 받들어 1525년(중종 20) 식년(式年) 생원시(生員試)에 3등(三等) 1위로 합격하였으나 벼슬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현재의 봉화군 상운면 구천리에 터를 잡은 후 야옹정(野翁亭)이라는 정자를 지어 주변의 선비들과 학문과 도덕을 토론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온계(溫溪) 이해(李瀣)와 퇴계(退溪) 이황(李滉) 형제도 관직에 있을 때 휴가길이면 들러 교류하곤 하였는데, 이황은 전응방의 삶을 칭송하는 시에서 말하기를 ‘재야에 은둔하며 사는 사람의 진정한 즐거움’이라는 뜻에서 ‘야은진락(野隱眞樂)’이라고 하였다. 특히 온계 이해와의 교유가 깊어, 이해가 유배지에서 죽은 후 그 운구가 당도하자 쫓아가 제를 올리고 목 놓아 울었다고 전한다. 이해가 어사(御使)로 봉직하고 있을 때에도 야옹정에 들러 연못가에서 술을 들며 담론하기를 해지는 줄 몰랐다고 한다. 경북 영주의 방산서원(方山書院)에 배향되었다.
 
 
3) 전익희(全益禧 ; 1598∼165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자수(子綬), 호는 망일당(望日堂)·설월당(雪月堂). 상장군(上將軍) 희철(希哲)의 5세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자감직장 개(漑)이고, 아버지는 봉사(奉事) 뇌(磊)이며, 어머니는 진주 정(鄭)씨로 7대가 나란히 청백록에 오르고 7대에 걸쳐 정려문이 무려 13위나 들어선 대제학 정척(鄭陟)의 현손녀이다. 정경세(鄭經世)의 문인이다. 그는 나면서부터 자품이 장중하고 정신이 명수(明粹)하였으며 총명 재기가 특출하였다. 1624년(인조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중앙관직으로 정자(正字)를 거쳐, 박사·전적, 형조·예조 좌랑, 형조정랑, 전라도사, 성균관직강, 예조정랑, 강진현감 병조좌랑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등을 지냈다. 사간원 정언으로 있을 때 권신 김자점(金自點)의 죄를 탄핵하다가 북변의 외직으로 쫓겨났다. 외직으로는 함경도사 봉산현감·고산찰방·봉산군수·충청도사·장흥부사·선산부사 등을 지냈다. 그는 지방에 부임한 곳마다 공덕비가 세워졌는데, 특히 선산부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청덕비(淸德碑)가 세워졌다. 서예에도 뛰어났다. 그의 저서로 ≪설월당문집≫과 유고(遺稿)가 전한다. 경북 영주의 방산서원(方山書院)에 배향되었다.
 
4) 전명룡(全命龍) 1606년(선조 39)∼1667년(현종 8).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백유(伯兪), 호는 영서
아버지는 전대승(全大承)이며, 어머니는 함양박씨(咸陽朴氏)로 부호군 박운(朴雲)의 딸이다. 유년시절에 작은아버지인 중승(仲承)으로부터 배웠다.
1623(인조 1) 증광문과에 급제하였고, 162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30년 성균관학정 겸 봉상시봉사에 제수되었다.
2년 후 성균관박사 겸 양현고직장 및 성균관전적형조좌랑 등을 역임하였으며, 1633년 예조좌랑으로 춘추관에 재직하면서 소신있는 포부를 펼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쳐 사직을 청원하여 흥덕현감에 제수되었다.
이때 청렴결백한 태도와 위민정책(爲民政策)을 실시하여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워 그의 선치를 찬양하였다. 어사 심동구(沈東龜)가 그의 치적을 조정에 보고하여 임금으로부터 의복 한벌을 하사받았다.
1640년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서 지내다가 1643년 경성판관으로 임명되어 낙후된 교육을 일신시켰다.
1647년 평양서윤, 1650(효종 1) 흥양현감, 1654년 자인현감, 1659년 풍기군수영암군수 등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영암에 재직하면서 흉년이 들자 부족한 진곡(賑穀)을 대동미(大同米)로 변통하여 구제대책을 강구하였으나 어사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그뒤 1662(현종 3) 울산부사에 제수되었으며, 1665년 영해부사로 재임중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을 때 접수된 부의금을 관비에 충당시키기도 하였다.
만년에 대사헌대사간 등에 부름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일생동안 검소한 생활철학을 굳게 지켜, 그가 죽었을 때에는 장례를 치를 살림마저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친우들의 도움으로 치렀다.
저서로는 영서집42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