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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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장암서원(壯巖書院)
   영주시 문수면 적동리(장암)
   홍익한, 윤집, 오달제
   1683년
   
   
   
문수면 적동리 장암마을에 숙종 9년(1683) 장암서원(壯巖書院)을 세우고 숙종 17년(1691) 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위패를 봉안하고 충절사(忠節祠)라 하고 영조 24년(1748) 상망동(보름골)으로 옮겨 세웠으나 지금은 없어 지고 터도 모른다. 봉안문(奉安文)과 상향문(常享文)은 금강(錦江) 장신(張璶)이 지었다. 장암서원은 갑자년에 건립되었다고 서원연려실기술에 기술되어 있다. 지금은 흔적도 없으나 존립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자 이 곳에 기재한다.

배향인물
1) 홍익한(洪翼漢)
화포(花浦) 홍익한(洪翼漢) 선생은 1586년(선조 19년) 영주땅 순흥(현 봉화군 문단리)에서 진사 이성(李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독서를 즐기며, 경사자집(經史子集)을 한번 눈으로 보면 기억할 정도였다. 15세에 백부에게 양자로 들어가 경기도 평택에서 살았고,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30세에 사마시(司馬試) 2등으로 뽑히고, 1623년(인조 1년)에 공주정시(公州庭試)에서 문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었으며 그 후 사헌부 감찰의 관직에 올랐다. 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에 청나라가 우리나라를 속국시(屬國視)하는 모욕적인 조건을 내세우며 사신 용골대를 보내왔을 때 그의 목을 베어 모욕을 씻자고 주장하며 항소(抗疏)했는데, 그 격렬함이 청나라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었고 마침내 그 해 12월 병자호란을 당했을 때 최명길 등의 화의론(華議論)을 극구 반대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최명길 등의 주장으로 청국의 화를 피하고자 평양부윤으로 잠시 제수되었다.
그 후 인조는 부득이 주화론(主和論)의 의견을 쫓아 남한산성에서 화의가 되자 척화론을 주장한 오달제, 윤집과 함께 청나라에 잡혀 가게 되었는데 홍익한이 그 우두머리였다. 1637년(인조 15년) 2월 평양 두리모에서 결박되어 청의 진영으로 넘겨졌다. 이 때 이미 우리나라는 강화도가 함락되었고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한 이후였다.
이리하여 홍익한은 청군에 잡혀 청나라 심양까지 끌려가게 되었는데, 이때 쓴 일기가 그의 유명한 북행록(北行錄)이다. 그 해 3월 심양에서 처형당하기까지 나라를 위한 그의 충절은 지극하였고 청은 온갖 방법으로 회유도 하고 위협도 하였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고 대의를 지켜 조선의 신하로서 기백을 보여주며 태연히 죽어갔는데, 이때가 1637년(인조 15년) 3월이다.
장남 수원은 청에 의해 강화도가 함락되었을 때 홍익한의 후처 허씨가 청병(淸兵)에게 곤욕을 당하려 하자 이를 제지하려다 그들의 칼에 숨졌고 처 이씨도 강물에 몸을 던져 자진하였으며, 차남 수인도 강화도 마니산에서 화를 입어 죽었다.
오직 가족으로는 대부인 이씨와 어린 딸만 화를 면하였다. 이리하여 대를 잇지 못하게 되자 큰 형인 익형의 아들 응원을 양자하여 후사를 잇게 하였다. 홍익한이 심양에서 시해 당한지 17년 후인 1653(효종 3년)에 양아들 응원이 공과 허씨를 경기도 평택의 경정리에 합장으로 장사를 지냈으며 그 후 그 곳의 사림(士林)들이 모여서 사당을 세웠으니, 바로 현절사(顯節詞)이다. 공의 태생지인 현재의 봉화군 문단리에 충렬비를 세웠고, 병자호란 초에 평양부윤으로 부임했던 평안도 평양에 평양사우(平壤祠宇)를 지어 제향 하였으며, 홍사의 창려서원, 부안의 도동서원, 고령의 운천서원, 평양의 서산서원, 그리고 본향 영주의 장암서원에 배향(配享)되었다.
또한 공이 평생동안 저술한 서책이 많았으나 전란 때문에 많이 없어지고 약간의 시부와 산문, 항해록(航海錄), 척화소(斥和疏), 서정록(西征錄), 북행록(北行錄)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화포문집으로 엮어 보존하고 있다. 그 위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정공(忠正公)으로 봉해졌다.
본래 평택의 함정리 서원마을에 포의사(褒義祠)와 포의각(褒義閣) 그리고 그의 집과 묘(墓)가 있었는데, 십 수 만평에 달했다는 포의사는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훼철되었다가, 일제 시대엔 일본, 해방 후엔 미국의 군사시설에 수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포의각(褒義閣)과 홍익한의 묘(墓)는 일제 말기 군사시설을 만들면서 묘(墓)만 현재의 자리인 본정리 꽃산 기슭으로 이장(移葬)하였단다. 훼철되었던 신도비 등 비(碑)들은 함정리 길가에 방치되었는데, 1964년 지역의 뜻 있는 사람들에 의해 포의각이 다시 세워졌고, 1982년에 묘(墓)가 있는 꽃산으로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강화의 충렬사(忠烈祠), 평택의 포의사(褒義祠), 홍산의 창렬서원(彰烈書院), 부안의 도동서원(道東書院), 영천의 장암서원(壯巖書院), 고령의 운천서원(雲川書院), 평양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화포집(花浦集)》‧《북행록(北行錄)》‧《서정록(西征錄)》이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2) 윤집(尹集)1606(선조 39)∼1637(인조1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성백(成伯), 호는 임계(林溪)·고산(高山). 현감 형갑(衡甲)의 아들이며, 남양부사 계(棨)의 아우이다.
1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형을 따라 공부하여 1627년(인조 5) 생원이 되고, 1631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설서가 되고, 1636년 이조정랑·부교리를 거쳐 교리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국왕과 조정대신들이 남한산성으로 난을 피하였으나 청병에게 산성이 포위되어 정세가 극히 불리하게 되었다. 최명길(崔鳴吉) 등이 화의로 위기를 극복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때 오달제(吳達濟) 등과 함께 화친의 사신을 보내자고 주장하는 최명길의 목을 벨 것을 청하였으며, 최명길이 국왕의 뜻을 움직여 화친의 일을 성립시키고자 입대(入對)하여 승지와 사관을 물리치도록 청하자 이를 규탄하는 극렬한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문에서 옛날 화친을 주장하여 사필(史筆)의 베임을 피할 수 없었던 진회(秦檜)와 같은 대간도 감히 사관을 물리치지 못하였다고 극렬한 말로 규탄하였으며, 국왕이 대간(臺諫)을 꺼리지 않고 오직 사특한 의논만을 옹호하고 간사한 신하만을 의뢰하면 마침내 나라를 잃어버리고 만다고 경고하였다. 화의가 성립되자 청나라측에서 척화론자의 처단을 주장하여 그는 오달제와 더불어 소를 올려 자진하여 척화론자로 나섰다.
청병에 의하여 북쪽으로 끌려갈 때도 조금도 절개를 굽히지 아니하여 청병이 오히려 감복하여 존경하였다고 한다. 청나라에서 고문과 회유 등으로 그의 뜻을 돌리려 하였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항변하자 마침내 심양성 서문 밖에 끌려가 사형당하였다.
세상에서는 오달제·홍익한(洪翼漢)과 더불어 삼학사라고 이른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광주(廣州)의 절현사(節顯祠), 강화의 충렬사(忠烈祠), 평택의 포의사우(褒義祠宇), 홍산의 창렬서원(彰烈書院), 영주의 장암서원(壯巖書院), 고령의 운천서원(雲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3) 오달제(吳達濟)1609년(광해군 1)∼1637년(인조 15).
병자호란 때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계휘(季輝), 호는 추담(秋潭). 오윤해(吳允諧)의 아들이다.
19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634년(인조 12) 26세에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전적‧병조좌랑‧시강원사서‧정언‧지평‧수찬을 거쳐, 1636년에 부교리가 되었다.
이때 후금의 세력이 날로 커져 칭제건원하고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조선을 무섭게 위협하여왔다.
이에 화친을 위하여 주화파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장으로 사신을 교환하게 되자, 임금을 속이고 삼사(三司)의 공의(公議)를 위협, 제지하여 임의로 사신을 보낸 최명길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나라와의 화의를 끝까지 반대하였다. 인조가 청군에 항복하게 되자, 청나라측에서는 전쟁의 책임을 척화론자에게 돌려 이들을 찾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윤집(尹集)과 더불어 자진하여 척화론자로 나서서 적진에 잡혀가 청나라로 끌려가게 되었다.
적장 용골대(龍骨大)는 그의 뜻을 꺾기 위하여 처자를 거느리고 청나라에 와 살라고 회유하기도 하고, 또 협박하기도 하였으나 그는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불의(不義)라고 하고 저들의 말을 좇으면 오랑캐가 되고 마는 것이라 하여 끝까지 항변하였다.
그는 마침내 심양성(瀋陽城) 서문 밖에서 윤집‧홍익한(洪翼漢)과 함께 처형을 당하였다. 세상에서는 이들을 삼학사라고 하여 그들의 절개와 충성을 높이 기리게 되었다.
그는 묵매화(墨梅畵)에도 뛰어났는데, 어몽룡(魚夢龍)‧조속(趙涑)‧허목(許穆)의 화풍을 따르면서도 명나라의 묵매화풍을 영향받아 구도가 조금은 번잡한 감을 준다.
그의 그림은 《묵매도(墨梅圖)》 2점이 전하며, 이러한 구도의 묵매화는 뒤의 조지운(趙之耘)‧홍수주(洪受疇)‧박동진(朴東晉)‧조희룡(趙熙龍)‧이공우(李公愚) 등의 묵매화에 영향을 주었다. 좌승지‧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광주(廣州)의 절현사(節顯祠), 평택의 포의사우(褒義祠宇), 홍산(鴻山)의 창렬서원(彰烈書院), 영주의 장암서원(壯巖書院), 고령의 운천서원(雲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충렬공유고(忠烈公遺稿)》가 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