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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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성남서원(城南書院)
   경상북도 영천시 오수동
   이형상(李衡祥)
   1723년(경종 3)
   
   3月初丁
   
1735년(영조 1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영천에 성남정사(城南精舍)를 세워 후학양성에 힘쓴 이형상(李衡祥)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다. 이형상과 동시에 중국 5성(聖)인 주공(周公)·기자(箕子)·공자(孔子)·안자(顔子)·주자(朱子)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 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가 1976년에 복원하였다.

1)이형상(李衡祥, 1653~173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옥(仲玉), 호는 병와(甁窩)·순옹(順翁). 효령대군(孝寧大君)의 10대손이며, 사민(師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장형(長馨)이고, 아버지는 진사 주하(柱夏)이다.
1677년(숙종 3)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1680년(숙종 6)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호조좌랑 재직시 청나라에 바치는 세폐포(歲幣布)가 병자호란 이후 바쳐온 보포(報布)보다 9척이나 긴 것을 알고, 이것이 앞으로 무궁한 폐단이 될 것을 우려해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끊어버리고 보내었다.
성주목사 때에는 교화에 힘써 20조의 훈첩(訓帖)을 반포하고 유생 150명을 선출해 관비로 교육시켰으며, 인조 때 의사 이사룡(李士龍)을 위해 충렬사(忠烈祠)를 지어 사적을 길이 남겼다. 한편 파괴된 채 방치되던 독용산성(禿用山城)을 민정(民丁)을 차출해 3일 만에 완축시켰다.
동래부사 때에는 이 지역이 일본과 접경된 관문으로서 국방상 요지임을 절감하고 방비에 더욱 힘쓰는 한편, 당시 많은 폐단을 일으키는 일본의 구송사(九送使)를 폐지시키려 노력하였다. 경주부윤 때에는 운주산(雲住山)의 토적 수천 명을 해산시켰다.
또한 향교와 서원을 교유(敎諭)하여 학풍을 진작시키고, 향약·향음주례(鄕飮酒禮)를 강화해 향촌질서를 세우는 한편 충·효·열을 민간에 장려해 유교적 도덕정치를 실시하였다.
1703년 제주목사로 부임해 제주의 누속(陋俗)을 일체 개혁해 유속(儒俗)으로 바꾸었다. 즉, 석전제(釋奠祭)를 행하던 삼읍(三邑)의 성묘(聖廟)를 수리하고 이름 높은 선비로서 선생을 정해 글을 가르치게 하였다.
그리고 고을나(高乙那)·양을나(良乙那)·부을나(夫乙那) 등 삼성의 사당을 세우고 동성혼인 등의 풍속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지방민들이 제주도 남부에 있는 한라호국신사(漢拏護國神祠)인 광정당(廣靜堂)에서 기도하던 풍습을 금지시키고, 이 밖에도 신당 129개를 모두 불태워 음사(淫祠)를 철저히 단속하였다.
또한 미신적으로 흐르는 불교를 배척해 두 사찰을 불태우고 유교를 권장하였다. 그리고 제주 해녀들이 나체로 잠수하는 것을 금하였다.
이처럼 목민관으로서 학문을 진흥시키고 문화재와 고적을 수리, 보존했으며, 미신적인 인습과 악습을 타파해 도민(島民)의 풍속 교화와 생활 개선에 힘썼다. 이에 당시 백성들은 송덕비 4개를 세워 그의 청덕(淸德)을 칭송했다 한다.
그 뒤 영광군수로 부임했으나 사임하고, 영천(永川)의 호연정(浩然亭)에서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정진하였다. 30여 년간 초야에 있다가 1728년(영조 4) 경상도소모사(慶尙道召募使)로 부임, 그 해 소론 일파인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진압해 공을 세웠으나 집권당인 노론의 모함을 받아 76세의 고령으로 투옥되었다.
그 뒤 억울함이 드러나 석방되고 경주부윤에 임명되어 서반직(西班職)을 받아 국록(國祿)을 받았다. 1735년 영천의 성남서원(城南書院)에 제향되었고, 1796년(정조 20) 청백리에 올랐다.
1829년(순조 29) 제주 유생들이 그의 유덕을 추모해 영혜사(永惠祠)에 추향(追享)하였다. 저서로는 문집 ≪병와집≫ 18권을 손자인 만송(晩松)이 간행하였다. 이 밖에도 ≪둔서록 遯筮錄≫·≪악학편고 樂學便考≫·≪강도지 江都志≫·≪예학편고 禮學便考≫·≪성리학대전≫ 등 수십권이 있다.
목민관으로서 활동 중 제주도에 관한 기록은 인호(人戶)·인구(人口)·전(田)·국마(國馬)·국우(國牛) 등 상세한 통계 자료가 있으며, 제주도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廟宇)인 구인사(求仁祠)와, 3칸의 전사청(典祀廳), 5칸의 강당 쌍전당(雙全堂), 4칸의 포사 등이 있다. 묘우에는 이형상과 5성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전사청은 향례 때 제수(祭需)를 마련하고 제기(祭器) 등을 보관하여 두는 곳이다.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된 강당은 원내의 여러 행사 및 유림의 회합 장소로 사용되며, 포사는 고자(庫子)가 거처하는 곳이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 초정(初丁 : 첫번째 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변 4두(豆)이다.

유물로는 보물 제652호로 지정된 ≪병와유고 甁窩遺稿≫ 240여 권과 중요민속자료 119호로 지정된 병와이형상유품(甁窩李衡祥遺品)이 있다. 이 밖에도 몇 권의 문집이 있다.
 
1)병와유고(甁窩遺稿)-보물 제652호(1979.02.08지정)
조선 숙종 때의 국학자이자 실학의 선구자였던 이형상(李衡祥)이 남긴 원고본이다. 이형상 선생은 대저술가로서 학문의 영역도 매우 넓고 깊어, 경학(經學) 및 성리학을 비롯하여 예학, 역사, 전기, 지리, 시문에 이르는 넓은 분야를 다루었다.
이것에는 그의 저서와 함께 그와 관련된 편지글, 임금이 내린 교지 등의 고문서와 인각(印刻), 기타 유품들이 포함되었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