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충좌(朴忠佐, 1287~1349)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화(子華), 호는 치암(恥菴). 지빈(之彬)의 손자이며, 군부총랑(軍薄摠郎)을 지낸 장(莊)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백이정(白頤正)이 원나라에서 주자학을 배우고 돌아왔을 때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제일 먼저 가르침을 받았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1332년(충숙왕 복위 1) 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로 나갔을 때 폐신(嬖臣) 박련(朴連)이 양민을 노예로 삼으려 하는 것을 막다가 그의 참소로 무고를 당하여 해도(海島)로 유배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감찰지평(監察持平)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빙자하여 취임하지 않았으며, 또다시 예문응교(藝文應敎)에 제수되어 경상도 염세(鹽稅)를 감독하게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내서사인(內書舍人)·밀직제학(密直提學)·개성부윤 등을 거쳐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피봉되었다. 1344년(충혜왕 복위 5)에는 지공거가 되어 동지공거 이천(李蒨)과 함께 진사를 시취하였다.
충목왕이 즉위하자 양천군(陽川君) 허백(許伯)과 함께 판전민도감사(判田民都監事)가 되었고, 이어 찬성사에 임명되었다. 이 때 왕에게 ≪정관정요 貞觀政要≫를 시강하여 상을 받았다.
1345년(충목왕 1) 정방(政房)을 다시 설치할 때 찬성사로 그 제조관(提調官)이 되었으며, 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라 순성보덕협찬공신(純誠輔德協贊功臣)의 호를 받았다. 성품이 온화하고 검약하며 일생 동안 글읽기를 좋아하였다. 예안의 역동서원(易東書院)에 봉향되었다. 시호는 문제(文齊)이다.
2)박눌(朴訥, 1448~1528)
본관은 함양이며 자는 여우(如愚)이고 호는 杏亭(행정)이다. 상서공(尙書公)의 15세손으로 2파 박충좌(朴忠佐)의 7대손이다. 찰방(察訪)으로 학행이 높아 추앙을 받았으며, 경북 함창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배향되었고 후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에게도 증 정부인(贈 貞夫人)이 내려졌다. 또한 중종이 사제문(賜祭文 :일종의 추모사)과 사자(使者)를 보내어 참배하고 그 산도(山圖:산의지도)를 그려 올리라 명하였으니 특이한 은전(恩典)이었다. 다섯 아들은 모두 문과에 등과(登科) 하여 소위 향오린(鄕五麟) 이라 불렸다.
3)박손경(朴孫慶, 1713~1782)
자는 효유(孝有), 호는 남야(南野), 본관은 함양, 성옥(成玉)의 아들이다. 박손경은 학문이 정통하고, 행실이 덕성스러워 1777년(정조 1)에 경상도 관찰사(觀察使)의 추천으로 영릉(英陵)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늙은 부모를 모시기 위해 오르기를 사양하였고, 1779년(정조 3)에 암행어사 황승원(黃昇源)이, 그의 학문이 선비들의 스승이 될 만하다고 임금께 글을 올려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임명받았으나 역시 오르지 않았다.
당시 예천 군수가 박손경의 높은 학문과 효행을 전해 듣고 찾아왔는데, 갑작스러운 방문을 받은 박손경은 평소에 부모님께 드리던 소박한 음식으로 정성껏 대접하였다. “어떻게 음식을 마련하였기에 이렇게 맛이 좋습니까?”라고 묻기에, “가난하여 부모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죄책감으로 매년 이른봄에 논에 있는 우렁이를 주워 말려서 가루로 만들어 음식을 마련하는 것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후 예천 군수는 부모를 위하는 그 정성에 감탄하여 박손경을 돕고자 관리들에게 우렁이 가루를 빨리 구해오라고 명했다. 그러나 우렁이 가루는 빠른 시일에 마련할 수 없는 것이어서, 다만 박손경의 집에서 조금 구해왔을 뿐이었다. 그래서 군수가 감사의 뜻으로 금일봉을 박손경에게 보냈으나, 박손경은 그 돈을 사양하였다.
이처럼! 박손경은 효행과 덕행이 뛰어날 뿐 아니라, 많은 제자를 길렀고,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무덤은 지내동 매봉산(梅峰山)에 있고, 문집 10권을 남겼다. 상금곡리의 회산사(晦山祠, 1802)와 금곡서원(金谷書院, 1984)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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