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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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고산서원(孤山書院)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 419-2
   김시습(金時習) 임유후(任有後) 오도일(吳道一)
   1628년(인조 6)
   1715년(숙종 41)
   4월 15일
   
고산서원(孤山書院)은 1628년(인조 6)에 임유휴(任有後)가 집안의 재앙을 만나 이곳에 내려와 고산(孤山)에 정자를 신축하고 20여 년간 제자를 가르치고 학문을 연구하였다. 그의 사후인 1673년(현종 14)에 제자들이 고산사(孤山祠)를 창건하여 임유휴를 봉안했다.
그 뒤 이곳의 현령으로 부임한 오도일(吳道一)은 김시습(金時習)이 자주 다녀간 행곡리 주천대(酒泉臺)에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동봉별묘(東峰別廟)를 세우고 구암사(龜巖祠)라 하였다. 그 당시 현령에게 아첨하는 자가 있어 재임 당시인 1693년 오도일의 생사(生祠)를 지었다. 그가 죽은 뒤 1715년(숙종 41) ‘孤山(고산)’이라는 사액을 받고 고산서원은 그 후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 때 철폐되었다. 위패는 땅에다 묻었으며 학위전(學位田)은 향교에 헌납하였다. 현재 서원건물은 가정집에 현판을 달고 있는 궁색한 입장이다. 매년 4월 15일 향사를 지내고 있다.

1)김시습(金時習, 1435~1493)
조선 초기의 학자·문인, 생육신의 한 사람.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청한자(淸寒子)·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법호는 설잠(雪岑). 서울 출생.
작은 키에 뚱뚱한 편이었고 성격이 괴팍하고 날카로워 세상 사람들로부터 광인처럼 여겨지기도 하였으나 배운 바를 실천으로 옮긴 지성인이었다. 이이(李珥)는 백세의 스승이라고 칭찬하기도 하였다.
그의 생애를 알려주는 자료로는 ≪매월당집≫에 전하는 <상류양양진정서 上柳襄陽陳情書>, 윤춘년(尹春年)의 전기(傳記), 이이의 전기, 이자(李耔)의 서문(序文), ≪장릉지 莊陵誌≫·≪해동명신록≫·≪연려실기술≫ 등이 있다.
그의 선대는 원성왕의 아우 김주원(周元)이다. 그의 비조(鼻祖)는 고려시대 시중을 지낸 연(淵)·태현(台鉉)로 전하고 있으나 ≪매월당집≫의 세계도에 의하면 인존(仁存)으로 잘못 전해진 것이다.
증조부 윤주(允柱)는 안주목사(安州牧使), 할아버지 겸간(謙侃)은 오위부장(五衛部將), 아버지 일성(日省)은 음보(蔭補)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냈으며, 그의 어머니는 울진장씨(蔚珍張氏)이다. 김시습은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났다. 3살 때부터 외조부로부터 글자를 배우기 시작하여 한시를 지을 줄 아는 천재였다.
≪정속(正俗)≫, ≪유학자설(幼學字說)≫, ≪소학(小學)≫을 배운 후 5세 때에 이미 시를 지을 줄 알아 그가 신동(神童)이라는 소문이 당시의 국왕인 세종에게까지 알려졌다. 세종이 승지를 시켜 시험을 해보고는 장차 크게 쓸 재목이니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하고 선물을 내렸다고 하여 5세라는 별호를 얻게 되었다.
5세 때에 이웃집에 살고 있던 예문관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으로부터 ≪중용≫과 ≪대학≫을 배웠고, 이후 13세까지 이웃집의 성균관 대사성 김반(金泮)에게서 ≪맹자≫·≪시경≫·≪서경≫을 배웠고, 겸사성 윤상(尹祥)에게서 ≪주역≫·≪예기≫를 배웠고, 여러 역사책과 제자백가는 스스로 읽어서 공부했다.
15세에 어머니 장씨를 여의자 외가의 농장 곁에 있는 어머니의 무덤 옆에서 여막을 짓고 3년상을 치렀다. 그러나 3년상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어머니처럼 돌보아주던 외숙모가 죽고 아버지는 계모를 맞아들였으나 병을 앓고 있었다.
이 무렵 그는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원만한 가정이 되지 못하였다. 어머니의 죽음은 인간의 무상함을 깨닫게 되었고. 18세에 송광사에서 선정에 드는 불교입문을 하였다. 그 후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로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였다.
21세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3일간 통곡을 하고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불사른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산사를 떠나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
사육신이 처형되던 날 밤 온 장안 사람들이 세조의 전제에 벌벌 떨고 있을 때에 거리에서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진 사육신의 시신을 바랑에 주섬주섬 담아다가 노량진 가에 임시 매장한 사람이 바로 김시습이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관서지방을 유람하며 역사의 고적을 찾고 산천을 보면서 많은 시를 지었다. 이는 ≪매월당집≫에 ≪탕유관서록 宕遊關西錄≫으로 남아 있다.
그가 쓴 발문에서 방랑을 시작한 동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질탕(跌宕)하여 명리(名利)를 즐겨하지 않고 생업을 돌보지 아니하여, 다만 청빈하게 뜻을 지키는 것이 포부였다. 본디 산수를 찾아 방랑하고자 하여, 좋은 경치를 만나면 이를 시로 읊조리며 즐기기를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하였지만, 문장으로 관직에 오르기를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세조의 왕위찬탈)을 당하여 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도(道)를 행할 수 있는데도 출사하지 않음은 부끄러운 일이며, 도를 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홀로 그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고 적었다.
26세(1460) 때에는 관동지방을 유람하여 지은 시를 모아≪탕유관동록 宕遊關東錄≫을 엮었고, 29세(1463) 때에는 호남지방을 유람하여 ≪탕유호남록 宕遊湖南錄≫을 엮었다.
그 해 가을 서울에 책을 구하러 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유로 세조의 불경언해사업(佛經諺解事業)에 참가하여 내불당에서 교정(校正)일에 참여하라고 권유하여 열흘간 내불당에 거쳐한 일이 있었다. 1465년 원각사 낙성식에 불려졌으나 짐짓 뒷간에 빠져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평소에 경멸하던 정창손(鄭昌孫)이 영의정이고, 김수온(金守溫)이 공조판서로 봉직하고 있는 현실에 불만을 품고 31세 때인 1465년 봄에 경주로 내려가 경주의 남산인 금오산(金鰲山)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칩거하였다. 이때 매월당이란 호를 사용하였다.
이곳에서 31세 때부터 37세까지 우리 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불리는 ≪금오신화≫를 비롯한 수많은 시편들을 ≪유금오록 遊金鰲錄≫에 남겼다.
그동안 세조와 예종이 죽고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1471년(성종 2) 37세에 서울로 올라와 이듬해 성동(城東) 폭천정사(瀑泉精舍), 수락산 수락정사(水落精舍) 등지에서 10여 년을 생활하였으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1481년 47세에 돌연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아들여 환속하는 듯하였으나, 이듬해 ‘폐비윤씨사건(廢妃尹氏事件)’이 일어나자, 다시 관동지방 등지로 방랑의 길에 나섰다. 당시 양양부사(襄陽府使)였던 유자한(柳自漢)과 교분이 깊어 서신왕래가 많았으며,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강릉·양양·설악 등지를 두루 여행하였다.
이 때 그는 육경자사(六經子史)로 지방청년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시와 문장을 벗삼아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는데, ≪관동일록 關東日錄≫에 있는 100여 편의 시들은 이 기간에 쓰여진 것이다.
10대에는 학업에 전념하였고, 20대에 산천과 벗하며 천하를 돌아다녔으며, 30대에는 고독한 영혼을 이끌고 정사수도(靜思修道)로 인생의 터전을 닦았고, 40대에는 더럽고 가증스러운 현실을 냉철히 비판하고 행동으로 항거하다가 50대에 이르러서는 초연히 낡은 허울을 벗어 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충청도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였다.
이곳에서 59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유해는 불교식으로 다비(茶毗)를 하여 유골을 모아 그 절에 부도(浮屠)로 안치하였다. 그는 생시에 이미 자기의 초상화인 노·소(老少) 2상(二像)을 손수 그리고 스스로 찬(贊)까지 붙여 절에 남겨두었다고 하나, 현재는 ≪매월당집≫(신활자본)에 <동봉자화진상 東峯自畫眞像>이 인쇄되어 전한다.
그 밖에 작자 미상인 김시습의 초상화가 무량사에 소장되어 있다. 그는 단종이 복위된 숙종 33년(1707)에 사헌부 집의(執議)에 추증되었고, 정조 6년(1782)에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동 8년에는 청간(淸簡)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그가 쓴 많은 시가 유실되었으나 그의 문집은 중종 때에 정부관료들에 의해서 그의 시가 좋다고 하여 편찬이 논의되었고, 이자(李耔)에 의하여 10여 년 동안 수집하여 겨우 3권으로 모아졌으며, 윤춘년·박상이 문집 자료를 모아 1583년 선조의 명에 의하여 이이가 전을 지어 교서관에서 개주 갑인자로 23권이 간행되었다. 일본 봉좌문고와 고려대학교 만송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2)임유후(任有後, 1601~167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효백(孝伯), 호는 만휴(萬休). 윤(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서 국로(國老)이고, 아버지는 홍문관교리 수정(守正)이다.
1626년(인조 4)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627년 정묘호란 때 가주서로 척화를 주장하였다. 이듬해 반란을 음모하던 아우 지후(之後)와 숙부 취정(就正) 등이 죽음을 당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울진 산중으로 내려가 향인을 교유하면서 학문을 연구하였다.
그 뒤 문장이 뛰어나고 지행(至行 : 지극히 훌륭한 행위)이 있다는 조신들의 의론으로 특채되어 1653년(효종 4) 장령이 되었다. 이어 1658년 종성부사가 되어 수항루(受降樓)를 세우고 학사(學舍)를 지어 변경에 치적이 많았다.
1661년(현종 2) 담양부사가 되고, 1663년 승지를 거쳐 예조참의가 되었다. 그 뒤 1669년 다시 담양부사로 나가 재난에 처한 백성들을 잘 구휼한 관계로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관품도 승자되었다.
이듬해 병조참판이 되자 정언 윤지선(尹趾善)으로부터 전에 아우가 저질렀던 역모사건을 들어 탄핵을 받았으나 본인이 저지른 죄가 아닐 뿐더러 문재와 행의가 뛰어난 관리임을 내세운 왕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이어 1672년 경기감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은퇴한 뒤 유유자적하며 <목동가 牧童歌>를 지었다고 한다. 그는 문장이 뛰어났고, 만년에는 ≪주역≫을 가장 좋아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울진의 고산서원(高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정희(貞僖)이다.
 
3)오도일(吳道一, 1645~170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관지(貫之), 호는 서파(西坡). 선공감역(繕工監役) 희문(希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윤겸(允謙)이고, 아버지는 달천(達天)이며, 어머니는 조간(趙幹)의 딸이다.
1673년(현종 14) 춘당대문과에 을과로 급제, 1680년(숙종 6) 지평·부수찬, 1683년 지제교(知製敎)를 거쳐 1687년 승지가 되어 자파(自派)를 옹호하다가 파직되었다. 1694년 개성부유수를 거쳐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대사간·부제학·강원도관찰사에 이어 다시 부제학을 거쳐 1696년 도승지·부제학·대사헌을 지냈다.
다음해 예문관제학·사직·이조참판, 1698년 이조참판·공조참판을 지내고 양양부사로 좌천, 삭출(削黜)되었다가 1700년 대제학·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고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1702년 민언량(閔彦良)의 옥사에 연루, 장성에 유배되었다. 특히, 문장에 뛰어나 세칭 동인삼학사(東人三學士)라 하였으며, 술을 좋아하여 숙종으로부터 과음의 경계를 받았다. 죽은 뒤 복관되고 울산의 고산서원(孤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서파집≫이 있다.

애초 서원자리는 마을 북쪽의 주천대(酒泉臺) 부근이었고, 지금 고산서원으로 쓰인 건물은 서원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현판만 걸려있는 상황이다. 지금의 고산서원건물로 쓰이는 살림집은 근처의 민가를 사서 현판을 달고 1년에 한번씩 모임을 가지는 장소로 쓰고 있다. 평면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집형으로 지붕은 골기와를 이은 팔작집이다. 지금은 관리인이 살림집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존하는 고산서원의 액편은 불영사 현판을 쓴 황림(皇林) 윤사진(尹思進)선생이 쓴 것으로 확인된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