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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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명계서원(明溪書院)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정명리 81
   황응청(黃應淸) 황여일(黃汝一)
   1671년(현종 12)
   
   2월 중정(中丁)
   
1671년(현종 12)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과 해월(海月) 황여일(黃如一)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창건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881년(고종 18)에 서원 유지(遺址)에 강학소를 세우고 향촌의 교육을 담당했다. 1982년에 지방 유림에서 서원과 대해·해월선생을 모시는 사당인 덕유사(德裕祠)를 복설하였다.
서원은 강당과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에는 대해와 해월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강당인 상교당(尙敎堂)은 유림 회합과 학문 강론장소로 사용한다. 산을 등지고 경사면을 이용해 건축하였다. 남향으로 정명천을 끼고 넓은 들을 마주하고 있다.
 

1)황응청(黃應淸, 1524~1605)
황응청은 평해 인으로 자(字)는 淸之(청지), 호(號)는 대해(大海)로 당시 평해군 지금의 기성면 정명촌(正明村)에 살았다.
1552년(명종 7)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뒤 1560년(명종 15)에 세자의 입학을 경축하는 별시문과에 응시하였다가 책제(策題)에 좋지 않은 말이 있음을 보고 과장을 뛰쳐나왔다. 그 후 두문불출하고 산림에 묻혀 유유자적한 삶을 살면서 행실을 더욱 바르게 하고 절조를 닦았다. 부모와 형제 사이에 효제(孝悌)의 도리를 다하여, 양친이 돌아갈 때마다 각각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 같은 지행고절(知行高節)과 효성에 감동한 고을 군수들이 관찰사에게 알리어 1578년(선조 11)에 살아 있을 때 정려가 내려졌다.
1584년(선조 17) 조정에서 학행지사(學行之士)를 수용할 때 그도 반열에 들어 예봉사 참봉(禮奉寺 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다시 개성 연은전(延恩殿) 참봉에 제수되었는데, 일단은 명을 받들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서 사직하였다.
1594년(선조 27) 조정에서 장원서 별제(掌苑署 別提)로 그를 불렀다. 당시는 왜란을 치르고 있을 때였는데, 마침 선조가 의주로 몽진하였다가 환도하였다.
이에 신하의 의리로 끝내 자신의 지조만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여 대궐로 나아가고 아울러 시폐(時弊) 4조를 논한 상소를 올렸다. 선조가 그의 상소문을 가납하고 그를 진보현감에 임명하였다. 진보현감으로 부임하여 포용력 있는 정사로 다스리다가 2년도 채 안 되어 정명리로 돌아와 버렸다.
낙향 후 후학을 가르치며 독서와 사색으로 사상의 경지를 넓혀갔으며 월천 조목(月川 趙穆, 1524∼1606)이나 대암 박성(大菴 朴惺, 1549~1606)과 편지를 주고받고,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 1538~1609)등 당대 지성들과의 교류를 갖다가 1605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1671년(현종 12) 기성면 정명리에 있는 명계서원(明溪書院)에 봉안되었다.
 
2)황여일(黃汝一, 1556~1622)
창주(滄州) 황응징(黃應澄)의 아들로 중부(仲父)인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에게 수학하였다. 그 뒤 퇴계 문하 학봉(學峰) 김성일(金誠一)의 제자가 된다. 더구나 해월은 학봉의 중형(仲兄) 되는 귀봉(龜峰) 김수일(金守一)의 사위가 된다.
1576년(선조 9)에 진사가 되고 1585년 개종계별시문과(改宗系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겸춘추관기사관(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을 시작으로 경상도어사(慶尙道御使), 1592년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맡았다. 
임진왜란이 나자 지략을 발휘해 함경감사 윤탁연(尹卓然)의 종사관이 된다.
1593년 형조정랑(刑曹正郞), 병조정랑(兵曹正郞)을 거쳐 1594년 형조정랑이 되고, 곧 도원수 권율(權慄)의 종사관으로 행주대첩에서 많은 공을 세운다.
1598년 명나라와 국교가 위태롭자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를 정사(正使)로, 해월은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가서 외교에 공을 세운다.
1601년 예천군수를 거쳐 1611년 길주목사(吉州牧使), 창원부사(昌原府使), 1615년에 동래부사, 공조참의 벼슬에 오른다. 1622년(광해 14)에 졸하였다.
1758년 고을 사람들이 기성면 정명리의 명계서원(明溪書院)에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과 배향하였다.
 

명계서원은 원래 현재의 위치보다 조금 아래쪽에 있었으나 홍수 등의 재해로 지금의 위치로 1758년 옮겨 세웠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기 전에는 강당과 사당, 동재인 솔성재(率性齋), 서재인 수도재(修道齋), 전사청, 영방루(盈放樓)와 대문간 채가 있었다.
1982년 지방 유림에서 서원과 덕유사(德裕祠)를 복설하였다.
건물은 강당과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형에 따라 고저의 차이는 있지만, 건물의 축은 일직선상에 두었다.
사당은 정면 2칸, 측면 한 칸 반의 맞배기와집으로 단청을 하고 측면에 풍혈판을 달았다. 3량가에 겹처마를 하고, 전열의 기둥만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강당은 담장을 두르지 않은 것에 비하여 사당 영역은 담장을 두르고 한 칸의 사주 문으로 출입문을 내어 건물이 지니는 의미와 위계성을 보여준다.
강당은 ‘상교당(尙敎堂)’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집으로 3량 구조에 홑처마로 꾸몄다. 중앙의 2칸은 마루이며, 좌우에 방을 들였다. 마루의 전면으로도 각각의 칸마다 공간의 성격을 달리할 수 있도록 했다. 방은 모두 한 칸 반의 규모인데, 서쪽 방에는 ‘격치재(格致齋)’, 동쪽 방에는 ‘독역재(讀易齋)’라는 현판을 달아 동서재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마루와 방의 전면으로 모두 툇마루를 두었으며, 방들의 툇마루 아래는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다. 
방은 측면으로도 문을 내어 통풍과 채광에 유리하도록 하였다. 전면으로는 두 짝의 여닫이문을 달았다. 기둥은 전열만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경내에는 덕유사(德裕祠), 격치재(格致齋), 독역재(讀易齋)라는 현판과 비석 1기가 있다. 
1868년(고종 5)에 훼철되기 전에는 황림(篁林) 윤사진(尹思進)이 쓴 명교당(明敎堂), 영방루(盈放樓), 솔성재(率性齋), 수도재(修道齋) 현판이 있었다.
 
1758년 명계서원 이건공사 기록
1758년에 거행된 명계서원 이건 행사는 당시 초헌관을 맡았던 복재(復齋) 이춘룡(李春龍, 1701-1770)의 일기에 그림처럼 펼쳐진다. 개인이 기록한 일기 형식으로 지역의 18세기 서원의 모습과 일하던 정황을 잘 묘사하여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마치 동영상을 보는 듯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건 일기는 이춘룡의 후손인 이태호씨가 보관하고 있는데, 중요 부분의 대략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서원은 1671년(현종 12)에 창건하였으니 그 터가 심히 낮아 지금의 우측 백호자락이 끊어진 끝머리로 두 하천이 합류하는 목이다. 앞은 촉박하고 뒤는 억누르고 있어 큰 규모로 시설할 수 없다. 다만 옛 석축의 섬돌 위에 조그마하게 열었다. 사당은 마치 다락(樓堂) 같으며 사당의 동서 모퉁이에 두 재실을 지으니 건물 배치 법도에 미흡했다.
그 후 정해(丁亥) 및 을축(乙丑)년의 큰 홍수에 대문이 떠내려가고 재소가 물에 잠겼다. 어찌할 겨를도 없이 탄식만 할 뿐 황류(黃流) 물결이 누(樓)의 계단까지 올라오고 둑이 거의 파여 나가는 급한 형편이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이건하기로 논의하였으나 서원의 재력이 적어 큰일을 도모하는 것은 어려웠다.
정인년에 동규(洞圭 : 마을원로) 황종하(黃宗夏)가 40전(錢)을 희사하였고, 다음 해에 또 곡식 십 두(十斗)를 기금으로 세워 여럿이 각각 분담하자고 말하기를 “우리가 함께 힘을 다하면 반드시 하나로써 열을 얻어 준공할 수 있을 것이라” 하고 취지문을 돌려 알리고 재원이 모이도록 기다렸다. 재원으로 돈과 곡식이 수백을 헤아리게 되었다.
(중략)
봉안(奉安)과 추향(秋享)하는 대례(大禮) 날이다. 옷깃을 여미고 제단을 성대하게 마련하니 싱그러운 바람과 맑은 달이 서로 교감하는 듯하였다.
아! 이건(移建)하고자 함이 여러 해였으나 이루지 못했다. 합향(合享)을 옛 좋은 시절에 행하지 아니하였음은 돌아보니 우리가 쇠잔하고 세상의 도(道)가 떨어져 그전에 능히 행할 수 있었던 여러 해 동안 이루지 아니한 바를 이제 거행코자 함은 소위 때를 기다렸음이 아닐까?
사묘(祠廟)를 전의 모습을 따라 반듯한 강당으로 점점 넓혔고 전에 없었던 별채 누사(樓舍)를 증축하였다. 옛 법식에 의한 건물 배치로 모두 동규(東規 : 주자강학소의 서원 규정)의 건설에 따른 것이다. 비록 백록동 서원의 모습에는 모자라지만 사당과 누대(樓臺)는 오히려 옛날의 단출함보다는 나아졌다. 또한 전에는 서재에 현판이 없었고 다만 누대 중에 서원의 이름 편액 하나만 걸려 있었다. 새롭게 선사(仙槎 : 울진)의 원남면 매화의 윤사진(尹思進)의 글씨로 현판을 새겼다.
윤사진의 서법은 인근 군·읍에서 명성이 높았다. 당을 명교(明敎)라 하고, 누(樓)를 영방(盈放)이라 하였다. 동·서재 이름을 동을 솔성(率性), 서를 수도(修道)라 명명하였다. 글자에 분(粉)을 칠한 현판을 정연하게 걸고 보니 한 인물이 난다.
선비는 지혜로 경영하고 양민들이 호응하였다. 매일 열심히 공역함에 선비들은 수고로움을 잊고 양민들은 또한 원망하는 자 없었다. 이는 덕(德)을 존중하고, 의(義)를 즐기는 인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같기 때문이다. 서고(書庫) 책임에 장응한(張應漢), 물자 관리에는 을선(乙先), 노비의 인솔에는 강영(江永)으로 하였다.
선임 노비들로 하여금 모든 노비들을 관리, 목수들의 일을 도왔다. 재목도 공교하게 다듬고 벽을 바르는 일 등에 손이 갈라 터져도 꺼리지 아니하였으며, 피곤해도 게으름 피우지 않고 각자 맡은 바 임무를 다하였다. 선현을 추모하는 정성과 천륜의 떳떳함을 잊은 바가 없었다.
도목수는 우천명(禹千命)이고 김중구(金重九)와 남윤찬(南允贊)이 보좌했다. 
춘룡(春龍)은 특출하지 않으나 도간역(都幹役)을 맡아 사람들을 중히 여기며 최선을 다해 준공을 마쳤다. 나는 비록 일개의 임무이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면 어찌 허물없이 마치리요?
이에 전말을 서술하여 일기책 머리에 적는다. 
上之三十五年 戊寅秋日 李春龍 謹敍(1758년, 영조 34)
■ 정월
- 무인(戊寅, 1758) 정월(正月) 6일 계축 비 조금 내림, 사당 터 사역 처음 시작함. 서원 인부 약간 명. 지휘도감 우천명(禹千命).
- 24일 신해 맑음. 정명동과 인근 마을 모두 참여.
- 25일 임자 맑음. 신곡동 여러 명, 사동의 젊은 유생 차례로 참여.
- 27일 갑인 맑음. 주담, 엄곡 두 마을 여러 명 참여.
- 28일 을묘 맑음. 상사동 여러 명 참여.
- 29일 병진 맑음. 하사동 여러 명 참여.

■ 2월
- 1일 정사 맑음. 황보동 여러 명과 전일 미참자 여러 명 참여.
- 3일 기미 맑음. 황보동 미참자, 모두 참여하여 지금까지 500명 정도 참여하였다.
- 4일 경신 이슬비 내림. 비량동 여러 명 참여. 별감 이인춘(李仁春)은 그 마을 어른 지위로서 함께 나와 장정들이 각각 모래와 나무 1속, 또 마을 쌀을 점심 양곡으로 내어 공역자들을 독려하는 등 본소의 일을 도왔으며, 이날 많은 사람이 돌을 날라 석축을 쌓아 명교당 터를 다듬어 가장 낮은 곳이 높아졌다.
- 6일 임술 맑음. 사동 황상하(黃尙夏) 집 뒤 소나무를 목재로 벌채 후에 사당을 넓히는데 사용.
- 11일 정묘 맑음. 사당 합향에 대해 논의하여 유사 황사하(黃師夏)에 서신을 지참시켜 단양부사에게 질의하다.
- 14일 경오 맑음. 재목, 서까래 나무 등을 각처에서 벌채. 이후 사당의 상량을 하였음.
- 21일 정축 맑음. 오시(午時)에 사당의 상량을 함. 
- 22일 무인 맑음. 골마동 여러 명 참여. 읍내 거주 관원 손광억(孫光億)이 스스로 나와 장정들과 우차로 판자를 실어 날랐으며 종일토록 사역하였다.
- 23일 을묘 비 옴. 월야동의 매입한 집에서 벌목함. 그 마을 인부들이 깨어진 기와를 정리했다.
- 26일 임오 맑음. 정명동에서 나머지 사람 참여하였다 본동의 일이라 하여 특히 열심히 하였음.
■ 3월
- 4일 경인 맑음. 사당의 기와 올림. 신곡의 여러 사람 참여. 
- 11일 정유 맑음. 범밭(虎田), 熊淵(곰못) 두 마을에서 함께 나와 명교당 공역을 시작함.
- 12일 무술 이슬비, 정명동 여러 명 참여, 명교당 초석을 놓음.
- 29일 을묘 맑음, 화구동 여러 명 참여. 공사 시작 후 참여자 거의 1,000명이다.
■ 4월
- 8일 계해 맑음. 명교당 기와 올릴 공역을 하였으며 서원 유생 또한 모여 공사를 독려함.
- 9일 갑자 맑음. 황보동 여러 명 참여, 월야동의 파옥 후 남은 재목 운반.
■ 5월
- 24일 기유 맑음. 합향의 일로 이향복(李享福)을 관찰사에게 보내어 회답을 받아 실행하기로 함에 따라 더위를 무릅쓰고 황사하(黃師夏)와 함께 보냄.
- 26일 신해. 우천명(禹千命)이 단청하고자 하였으나 연로하여 불가하므로, 향청의 선임 노비 김덕룡(金德龍)이 경주의 채색을 사오니 서울의 문채를 도입하게 되었다.
■ 6월
- 8일 임술 맑음. 다천동 여러 사람이 나왔음.
- 9일 계해 맑음. 남아동 여러 사람이 나왔음.
- 11일 을축 맑음. 원주에 글을 올린 유생들이 허락을 받아 돌아왔다. 즉시 군수에게 보이니 군수가 전에 했던 바를 믿었다.
- 13일 정묘 맑음. 7월 초 3일 봉안택일을 각 읍에 통문했다.
- 14일 무진 맑음. 달면동 여러 사람이 나왔음. 봉안 준비 절차를 논의하여 이달 30일에 해월선생 위판을 본 서원 임시 안소(安所)에 봉위한다는 뜻을 관아에 고하였다.
- 18일 임신 맑음. 황종하(黃宗夏)가 친히 매야의 윤사진(尹思進)에게 편액 글씨를 청하여 허락을 얻었다. 누판(樓版)은 이윤시(李允時)가 새기고 그 나머지는 황수하(黃受夏), 황응한(黃應漢)이 새겼다.
- 27일 신사 맑음. 관가로부터 제수와 각 종류의 물건 보내와 실로 기대했던 이상이었다. 이로 제향이 흡족했다. 봉안 시 모든 절차를 아는 황수하를 도감으로 하여 동재의 입재자로 각종 일을 감독하게 하고 서재에서 일을 보는 이는 많으므로 정 위치에 두도록 도감이 친히 배치하고 각 노복과 사환을 불러 시켰다. 황상하(黃尙夏) 일가에서 전문십우(錢文十雨), 백미 2석과 각종 물건수단을 보내왔고 또 문중에서 백미 1석, 명고정사 및 사동, 노동, 소곡의 세 서당에서 각각 백미 5두. 원생(院生) 각각 땔나무 1태(駄), 그리고 호장(戶長) 이동혁(李東赫)이 관가 관원으로부터 삼결(三結)과 땔나무. 근처의 노은동에서 황일청(黃一淸)이 전일관(錢一貫) 보내오니 고을에서 드문 일이다.
- 29일 계미 맑음. 향로(鄕老) 및 유생들이 일제히 서원으로 돌아갔다. 봉안하는 날이 7월 초3일이기 때문이다. 해월(海月) 선생의 위판(位版)은 이달 30일에 서원 재실에 옮기기로 하였다.
- 30일 갑신 맑음. 새벽에 고유하다. 향사(鄕社) 참판 정공(정담). 해월 신위전 고유문/영해부사 정옥이 지음. 제관 장동준(張東浚) 집례 ㅇㅇㅇ, 祝 이향원(李享遠), 봉향 남수희(南壽禧), 봉로 장동욱(張東旭) 행사를 마치고 이봉(移奉)하다. 해월공위판(海月公位版)을 모셔올 때에 관청에서 정한 관리가 나와 창(唱)을 하고 길을 인도하는 순라 1쌍(2명), 북, 장구, 피리, 해금, 태평소 1쌍, 길안내 4명, 일산 1명으로 갖추었다. 오시(午時)에 명계에 도착하여 동재에 우선 봉위하다.
■ 7월
- 1일 을유 맑고 바람. 영해부사 백사윤(白思潤) 참례 및 유생 3명, 울진 유생 3명 같이 왔음. 울진 매야(梅野) 윤원장(尹院長) 사근(思近)이 치하문과 동일관(銅一貫) 보내옴. 노은동 황일청(黃一淸), 황용하(黃龍河) 서간문과 동일관(銅一貫) 보내옴. 울진 유생 9명 오후에 옴. 서울 거주하는 유생 黃○이 옴. 영외(嶺外) 유생 1명도 오지 않았다. 이는 필시 너무 더운 날씨 탓이라 한(恨)스러웠다. 타읍의 유생들도 오지 못한 고로 정한바 대로 되지 못하였다. 영해교장 이인숙(李仁塾), 장의 권무령(權武齡)과 유생 1명이 저녁에 도착하였다. 저녁에 영방루(盈放樓)에 자리를 열고 도집례(都執禮)에 영해 교장 이인숙으로 하여 읍례를 마쳤다.
- 2일 병진 흐리고 가는 비 오다 맑음. 새벽에 도집례 수하 사람으로 하여금 북을 치게 하고 자리에 위치하도록 외침. 초헌 이춘용, 아헌 영해 백사윤, 종헌 영해의 이인숙 이하 생략. 
- 3일 정해 맑음. 행사 시에 집사는 건복(巾服)을 하였고 건복하지 않은 유생들도 다 참배하니 도산(陶山)의 예이다. 예(禮)를 마치니 아침 해가 떠올랐다. 제관과 집사는 명교당(明敎堂)에서 음복하고 유생들은 영방루에서 음복하였으며 이날은 잔치로 마치니 실로 우리 고을에서 드문 일로 성대하고 위대한 행사였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