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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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명곡서원(明谷書院)
   경상북도 의성군 가음면 양지리 3
   박성양(朴成陽)
   1818년(순조 18)
   
   2월 하정(下丁)
   
이 서원은 정몽주(鄭夢周)의 문인 박성양(朴成陽)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818년(순조 18) 지방 유림의 공의로 위패를 모시고 제향(祭享)하는 곳이다. 그 후 1851년(철종 2)에 당초 사우(祀宇)와 강당(講堂)을 지어 의식을 봉행(奉行)하던 것을 확장하여 신축하여 서원으로서 면모를 갖추었다. 또한 「명곡서원」으로서 선현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이후 서원 구지에 단(壇)을 모아 예향(禮享)해오다 1895년에 지방 사림들의 노력으로 중건하여 명곡서당(明谷書堂)이라 개칭하여 제향(祭享)과 사숙(私塾)으로서 유지하여 왔다. 1975년 후손들의 힘으로 사우와 강당이 중수되었고, 1979년에 도내 유림의 공의로 다시 명곡서원으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박성양(朴成陽, 생몰년 미상)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 본관은 함양(咸陽). 호는 금은(琴隱). 중랑장 윤후(允厚)의 아들이다.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고려가 망하자 문소현(聞韶縣 :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 봉두산(鳳頭山)에 은거하여 세상에서는 28은의 한 사람으로 칭하였다.
태조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남쪽지방에 왜구가 쳐들어왔을 때 조정에서 그를 원수(元帥)로 천거하자 명을 받고 군사를 이끌고 가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 뒤 보덕(輔德)·좌장사(左長史)·우장사(右長史) 등에 임명되었고, 태종이 즉위하자 전라도안렴사·함경도북영병마사를 역임하였다. 1419년(세종 1) 왜구들이 다시 출몰하자 우군절제사(右軍節制使)가 되어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공으로 동지총제(同知摠制)에 승진되었고, 그 뒤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이조참판과 도총부부총관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정헌(正憲)이며, 명곡서원(明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실기로 ≪금은실기≫ 1책이 있다.

명곡서원은 강당의 후면으로 사당이 배치되어 있는 전학후묘의 형태이다. 현존하는 건축물로는 사당인 경덕사(景德祠)와 강당인 명교당(明敎堂), 동․서재인 향도재(向道齋)와 강의재(講義齋), 전사청, 외삼문 등 총 6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현판에 ‘유정문(由正門)’이라 쓰여있는 외삼문을 들어서면 강당인 명교당(明敎堂)이 정면에 자리 잡고 있으며 좌우측으로 동·서재인 향도재(向道齋)와 강의재(講義齋)가 배치되어 있다. 강당의 좌우측 언덕 위에는 사당인 경덕사(景德祠)와 전사청(典祀廳)으로 이루어진 묘(廟)의 공간이 별도의 영역을 이루며 자리 잡고 있다.
 
 
贈吏曹判書定憲公琴隱朴成陽(증 이조판서 정헌공 금은 박성양)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무신. 본관은 함양(咸陽). 호는 금은(琴隱). 중랑장 윤후(允厚)의 아들이다.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고려가 망하자 문소현(聞韶縣: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 봉두산(鳳頭山)에 은거하여 세상에서는 28은(二十八隱)의 한사람으로 칭하였다. 태조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남쪽지방에 왜구가 쳐들어왔을 때 조정에서 그를 원수(元帥)로 천거하자 배명(拜命)하여 군사를 이끌고 가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 뒤 보덕(輔德), 좌장사(左長史), 우장사(右長史) 등에 임명되었고, 태종이 즉위하자 전라도안렴사·함경도북영병마사를 역임하였다.
1419년(세종 1) 왜구들이 다시 출몰하자 우군절제사(右軍節制使)가 되어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공으로 동지총제(同知摠制)에 승진되었고, 그 뒤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이조참판과 도총부부총관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정헌(定憲)이며, 명곡서원(明谷書院)에 제향 되었다.
실기(實紀)로 《금은실기》 1책이 있다.

세종실록

1. 세종 즉위년 무술(1418,영락 16) 12월7일 (임오)
박성양(朴成陽)으로 중군 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를 삼았다.

2. 세종 1년 기해(1419,영락 17) 5월16일 (경신)
상왕이 광주 목사(廣州牧使) 박성양으로 이숙묘를 대신하여 중군 절제사를 삼았다.

3. 세종 1년 기해(1419,영락 17) 5월18일 (임술)
임금이 수강궁에 문안드리고, 상왕과 임금이 두모포(豆毛浦) 백사정(白沙汀)에 거둥하여 이종무 등 여덟 장수를 전송하고, 상왕이 친히 여러 장수와 군관에게 술을 줄 때, 환관 최한(崔閑)에게 명하여, 술을 치게 하고, 여러 장수에게 활과 화살을 주었다. 상왕(태종)이 박성양에게 말하기를,
“경이 광주 목사가 되어 행사에 어긋남이 있었으나, 작은 일이기에 용서하거니와, 만일에 큰 일이 있으면, 어찌 감히 용서하겠는가.”

4. 세종 1년 기해(1419,영락 17) 7월7일 (경술)
정역(鄭易)에게 한성 부사를 맡기고, 권홍(權弘)으로 영가군(永嘉君)을 삼고, 이종무로 의정부 찬성사, 이순몽으로 좌군 총제, 박성양(朴成陽)으로 우군 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를 삼아 동정(東征)하게 하였다. 또, 박성양으로는 중군 절제사를 삼아 바다에서 싸우게 하고, 종무 이하 10 장수에게 갑옷과 옷 한 벌을 주었다.

5. 세종 1년 기해(1419,영락 17) 7월27일 (경오)
동지총제 박성양에게 가선(嘉善을 주었다.

6. 세종 1년 기해(1419,영락 17) 8월4일 (병자)
이종무·우박(禹博)·박성양(朴成陽)과 서성재(徐省材)·상양(尙陽)·이징석(李澄石)들이 돌아오니, 상왕이 병조 참의 장윤화(張允和)를 보내고, 임금이 우부대언(右副代言) 최사강(崔士康)을 보내어 한강 가에서 영접하여 위로하게 하고, 상왕이 임금과 함께 낙천정(樂天亭)에 거둥하여 그들을 기다리니, 종무 등이 들어와서 뵈오므로, 주연을 베풀어 위로하였다.

7. 세종 1년 기해(1419,영락 17) 8월10일 (임오)
상왕이 임금과 함께 선양정(善養亭)에 납시어 주연을 베풀고 동정(東征)하였던 유정현·이종무·최윤덕·이지실·이순몽·우박·박성양·박초·이천 등 여러 장수들을 위로하고, 정현과 종무에게 각각 말 한 필과 안장 한 벌씩을 하사하고, 윤덕 등 일곱 사람에게는 각각 말 한 필씩을 하사하였다.
8. 세종 1년 기해(1419,영락 17) 11월3일 (계묘)
상왕이 임금과 더불어 강원도에서 강무하였는데, 양녕 대군 이제(李禔), 효령 대군 이보(李補), (중략)·박성양(朴成陽)·이순몽(李順蒙)·(중략)들이 어가를 따랐다. 상호군(上護軍)·대호군(大護軍)·호군(護軍)·사금(司禁)·사엄(司嚴) 및 사사로 부리는 반당(伴儻)을 제한 외에도 갑사(甲士)·별패(別牌)·시위패(侍衛牌)를 아울러 2천여 명이었으며, 말이 만여 필이고, 별군 방패(別軍防牌)가 수천 명이었는데, 연사종·이화영·이춘생·박성양·박실·황상들로써 3군 장수를 삼았다.
9. 세종 3년 신축(1421,영락 19) 5월14일 (을해)
대열(大閱)할 때에 모든 군사들은 모두 갑옷을 입고 병기(兵器)를 가지게 하며, 별군(別軍)은 각기 화통(火桶)을 가지게 하고, 또 2품 이상의 관원으로서 군직(軍職)을 가진 자는 오위(五衛)에 나누어 소속하게 하였는데, 후위(後衛)의 우소(右所)에는 별시위 절제사 박성양(朴成陽)을 이에 속하게 하였다.

10. 세종 3년 신축(1421,영락 19) 6월2일 (계사)
박성양(朴成陽)으로 경상도 병마도절제사를 삼았다.

11. 세종 6년 갑진(1424,영락 22) 4월14일 (기미)
전 동지총제(前同知摠制) 박성양(朴成陽)의 직첩을 거둬들였다. 당초에 박성양이 김자이(金自怡)의 과전과 바꾸고자 하여 김자이 〈명의의〉 문서를 위조하여 거짓으로 자원한다고 말하며, 자기 〈소유인〉 농사(農舍)와 경작하던 땅을 서로 바꾸는 양 하여 호조에 정고(呈告)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헌부에서 탄핵하여 장형(杖刑) 80에 해당하는 율을 청하였으나, 직첩만 거두도록 명하였다.

12. 세종 7년 을사(1425,홍희 1) 6월28일 (병인)
박성양(朴成陽) 등의 직첩을 도로 내어 주라고 명하였다.

13. 세종 10년 무신(1428,선덕 3) 8월13일 (임진)
박성양(朴成陽)으로 좌군 총제(左軍摠制)를 삼았다.


국역승정원일기

14. 고종5년 무진(1868, 동치7)11월1일(갑술)
고(故) 이조 참판 박성양(朴成陽)에게 이조 판서와 그에 따른 예겸(例兼)을 추증하였는데, 충의와 절개가 탁월하므로 추증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15. 고종8년 신미(1871, 동치10)5월3일(임진)
증 이조판서 겸 좨주 박성양(朴成陽)에게 정헌(定憲)의 시호를 내렸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