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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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우곡서원(愚谷書院)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업리
   오국화(吳國華)
   1818년(순조18년)
   
   
   

순조 18년(1818년)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건립하였다. 오국화 선생은  고려말 충신이며 학자, 이성계의 문인으로 경상도 안렴사로 재임 중 정몽주가 이성계 일파에게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은거하였다. 그는 조선 건국 후 이성계가 불렀으나 그때마다 귀를 씻었다는 세이천이 있다. 저서로 “금산실기”가 전한다. 우곡서원은 오국화를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 주로 선현배향과 교육기능을 담당하였으나, 고종5년(1868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렸다가 1980년 복원하였다.
 

1)오국화(吳國華)
- 오국화의 생애와 가족
본관은 해주(海州)로 그의 선조는 중국에서 와서 수양산(首陽君)에 봉해졌고, 인하여 관향으로 삼았다. 보계(譜系)가 실전(失傳)되어 공이 역임한 벼슬, 치적(治積), 생몰년월일 등을 아울러 상고할 수 없다. 공이 의성에서 은둔하고 생을 마쳤기 때문에 자손들이 의성인이 되어 흩어져 거주하고 있으며, 모두 공을 조상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에게는 자식이 셋 있는데, 이름은 책(策), 순(淳), 진(進)이다. 책에게는 자식이 없으며, 순은 자식 하나가 있는데, 이름은 종신(宗信)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진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찰(札)과 변(變)이다. 찰은 생원에 합격하였다. 종신은 자식 둘을 두었는데, 세인(世仁)과 처인(處仁)이다. 세인은 참봉에 이르렀으며, 처인(處仁)은 승지에 이르렀고, 찰(札)은 삼남을 두었다. 
선생이 은거한 우곡(愚谷)의 묘소 앞에 1918년에 사림의 공의에 의거하여 단소(壇所)를 만들어 봉향(奉享)하였고, 지금의 세천정 뒤에 고려징사금산오선생유허비(高麗徵士錦山吳先生遺墟碑)를 세워 선생의 절의를 기렸다. 그 후 1983년 3월에 우곡단(愚谷壇)에서 서원으로 격상되었다. 
금산선조실기중간발(錦山先祖實記重刊跋)에는 「공이 평생토록 지은 책은 “시렁에 넘치고 용마루를 채우며 책이 담긴 수레를 끄는 소가 땀이 날 정도로 많았으나 여러 차례의 병선(兵燹)을 겪으면서 오늘날에는 수지잔묵(數紙殘墨)만이 전해진다.”」라고 하였고, 일실된 원고들을 모아서 만든 것이 금산선생실기(錦山先生實記)인데, 오늘날에는 이본(異本) 2권만이 전해질 뿐이니, 각각 을해년(1935)에 간행된 금산선생실기(錦山先生實記)1,2권과 금산실기(錦山實記)이며 무오년(1918)에 중간된 것은 전해지지 않는다.
 
- 고려(高麗)의 대부 금산(錦山) 오국화(吳國華)
고려(高麗)의 대부 금산(錦山) 오국화(吳國華)는 떳떳함을 지켜 망국(亡國)의 신하로서 의리와 절개를 지켜 통곡하면서 관인(官印)을 땅에 묻은 지가 501년된 1892년(고종 29)에 재루(齋樓)가 지어졌고, 27년 뒤 1918년에 단(壇)이 이루어져 비로소 이곳에서 향사를 지냈다. 단 위에는 오국화의 묘소가 있고, 오른편에는 신도비가 있다. 
 

숭절사, 숭의당, 신문, 동재, 서재, 전사청, 정문, 주소 등이 있다. 숭절사에는 오국화의 위패가 있다.
숭의당은 원내의 행사와 유림의 학문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신문은 제사 때 제관의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고 전사청은 제수를 마련하는 곳으로 사용한다.
 
건축 배경
우곡서원은 1983년 3월 우곡단(愚谷壇)에서 격상되었으며 조선왕조에 벼슬하지 않고 고결한 선비로 종신불출한 오국화의 의절을 기려 1918년 유림에서 우곡에 축단하고 봉향하여 왔던 곳이다. 그 옆에 신도비각(神道碑閣), 묘우(廟宇) 등이 건립되었다.

건축 특징
우곡서원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인 강당이 자리 잡고 있는데, 강당의 전면에는 동.서재를 두었으며 좌측에는 방형의 토석담을 두른 별도의 공간 안에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인 숭절사가 자리 잡고 있다.
오국화신도비는 우곡서원 내 숭절사 좌측에 있다. 비석은 귀부(龜趺)와 비신(碑身), 사각형의 옥개형 지붕이 있는 형태이다. 전면에 고려징사금산오선생신도비 라고 제액이 새겨져 있으며 측면에 기미 구월립 건비연대가 각자되어 있다. 비의 크기는 비신 폭 56㎝, 높이 174㎝, 두께는 39㎝이다.
 
건축 구성
돈륜문(敦倫門)이라는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우곡서원이라 편액한 강당이 있으며, 뒤로는 토석담을 둘렀다. 강당 앞에는 양쪽으로 동.서재를 두었는데, 동재인 순화재(醇化齋), 서재인 영모재(永慕齋)가 있다. 강당의 좌측에는 동쪽으로 나 있는 경절문(景節門)을 들어서면 방형의 토석담을 두른 별도의 공간 안에 숭절사(崇節祠)가 자리 잡고 있다. 숭절사의 좌측이며, 우곡서원 내의 가장 서편에는 ‘고려징사금산오선생신도비(高麗徵士錦山吳先生神道碑)’라고 비명이 새겨진 오국화신도비가 세워져있다.

서원 내에 있는 유시비(遺詩碑)에 있는 내용인데, 오국화의 시로 전한다.

-오언일구(五言一句)
“맑은 바람은 전원생활을 즐기던 도연명을 생각하게 하고
가을의 황국화는 백이숙제의 높은 절개를 그리워하게 하는구나”

-칠언일수(七言一首)
“나무는 붉은 빛을 먹은 듯하건마는
나의 일편단심은 날로 허송함이 애석하도다

세상에 깊은 정을 풀기에는 술독에 술이 있고
내 마음 속에 지닌 상념은 도덕의 글이 끼쳐있네

하늘은 지기를 연하여서 시냇물 소리가 불어나고
산은 구름머리에 둘러 안겨 그림자만 남았도다

맑은 바람이 유별한 곳 없다고 이르지 말라
시절이 이러하니 숨어살기를 즐기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