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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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장대서원(藏待書院)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장대리 산38
   김광수(金光粹) 신원록(申元祿) 신지제(申之悌) 이민성(李民宬)
   1672년(현종 13)
   
    2월 하정(下丁)
   
이 서원은 1610년(광해군 2)에 국란의 극복과 선정을 베푸는데 앞장선 신지제(申之悌)가 후진을 가르치기 위하여 강당을 짓고 강서(講書)하던 곳이다. 장현광(張顯光)이 “藏待取藏 修以待之意也장대취장 수이대지의야”라 하여 장대서당(藏待書堂)으로 이름하였다. 1623년에 신지제가 63세로 돌아간 뒤 인근 지방의 사림들이 그의 덕을 받들어 모시는 곳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1672년(현종 13)에 사당을 세워 경현사(景顯祠)라 하고 제향하였다. 1673년에(현종 14)는 정묘호란때의 좌도의병장 이민성(李民宬)을 병향하였다. 1702년(숙종 28) 장대서원으로 승격하고 김광수(金光粹)와 신원록(申元祿)을 추향하였다.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던 것을 1987년에 묘우, 1996년에 강당을 복원하였다. 향사는 매년 음력 2월 하순 천간이 정(丁)으로 된 날에 지내고 있다.

1)김광수(金光粹, 1468~1563)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국화(國華), 호는 송은(松隱). 할아버지는 사직 효온(孝溫)이고, 아버지는 지례현감 극해(克諧)이다. 1501년(연산군 7)에 진사가 되었으나 과거에 집착하지 않았다.
고향인 의성의 북촌에 머물면서 시가를 읊조리며 청빈하게 지냈으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여 부근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죽은 뒤 대곡산(大谷山)에 장사지냈는데, 그 뒤 외손인 유성룡(柳成龍)이 왕의 명을 받아 제사지내고 묘를 살펴보았다. 의성의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송은집≫과 ≪경심잠 警心箴≫이 있다.
 
2)신원록(申元祿, 1516~1576)
본관 아주(鵝洲). 자는 계수(季綏). 호는 회당(悔堂). 수(壽)의 자(子). 이황 문인. 특히 그는 이황이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재임할 때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 머물면서 조목(趙穆), 구봉령(具鳳齡), 김원팔(金八元) 등과 함께 강론하면서 교유함. 학행(學行)으로 관학(官學)의 교수(敎授)를 지냄. 장천(長川)에 빙계서원(氷溪書院)을 창건하는데 앞장섰으며, 이 일이 조정(朝廷)에 알려져 선조(宣祖) 때는 장천서원(長川書院)으로 사액(賜額)됨. 의성의 장대서원(藏待書院)에 배향되었다.
 
3)신지제(申之悌, 1562~162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순부(順夫), 호는 오봉(梧峰)·오재(梧齋). 경상도 의성 출신. 증창례원판결사 한(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공조참판 응규(應奎)이고, 아버지는 증좌승지 몽득(夢得)이며, 어머니는 의흥박씨(義興朴氏)로 민수(敏樹)의 딸이다.
1589년(선조 22)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 1601년 정언(正言)·예조좌랑, 이듬해 지평(持平)·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등을 거쳐 1604년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을 역임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창원부사로 나가 백성을 괴롭히던 명화적(明火賊)을 토평하고 민심을 안정시켜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고, 인조반정초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죽었다.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고 경사(經史)에 통달하여 유성룡(柳成龍)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예안현감 재직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대를 모집, 적을 토벌하였다. 간관으로 있을 때 직간하였고, 수령재임 때에는 치적을 남겼다.
그의 시문은 문집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의성에서 장대서원(藏待書院)을 세워 지방자제교육에 힘썼고, 죽은 뒤에는 김광수(金光粹)·이민성(李民宬)·신원록(申元祿)과 함께 그 서원에 배향되었다.
 
4)이민성(李民宬, 1570~162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관보(寬甫), 호는 경정(敬亭). 경상도 의성 출생. 아버지는 관찰사 광준(光俊)이며, 어머니는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인의(引儀) 권(權)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서를 두루 통달하였으며, 효성과 우애가 있어 재덕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1597년(선조 30) 정시문과에 갑과로 급제, 승문원 정자에 뽑혔으며, 1601년 승정원 주서를 거쳐 그 이듬해 시강원 설서에 제수되고 사서로 승진, 서장관(書狀官)으로 차출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3년 예조좌랑을 거쳐 병조좌랑에 전임되고, 곧 정랑으로 승진되었다.
1605년 이조정랑에 천거되었으나 정인홍(鄭仁弘) 일당의 반대로 제주점마어사(濟州點馬御史)가 되었다. 그 뒤 얼마간 일을 보다가 시사(時事)의 동향이 심상치 않아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1608년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으며, 문학(文學)으로 옮겨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 이듬해 옥당(玉堂)에 선입(選入)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해 귀향, 여묘(廬墓) 3년을 마치고 홍문관 수찬에 다시 임명되었으며, 그 뒤 교리·세자 시강원 겸 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1617년(광해군 9) 정조(鄭造)·윤인(尹訒) 등이 폐모론을 발의하자 윤기(倫紀)에 득죄(得罪)함이 심하다는 내용의 차자(箚子)를 올렸다가 이이첨(李爾瞻) 등의 모함을 받아 삭직되었다. 고향에 내려가서 거의 10년 동안 글씨와 그림으로 소일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 때 사헌부 장령에 복직하였다.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그 공로로 성균관 사성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가자(加資 : 정삼품(正三品)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를 받고, 아울러 전답과 노비를 하사받았다. 그 뒤 동부승지를 거쳐 좌승지에 승진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영남호소사(嶺南號召使) 장현광(張顯光)의 추천으로 경상좌도 의병 대장이 되어 전주까지 진출, 왕세자를 보호하였다.
1629년 형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 그 해에 죽었다. 직언을 잘하기로 이름 높았으며, 의리가 강해 광해군의 난정 때 간당(奸黨)들에게 모함을 받은 이덕형(李德馨)·이원익(李元翼)과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출하려고 힘썼다.
시문과 글씨가 뛰어나, 명나라에 갔을 때 그 곳의 학사·대부들과 수창(酬唱)한 시는 사람들에게 애송되어 중국 사람들이 그를 이적선(李謫仙 : 이태백을 이름)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까지 전하는 시는 1,000여 수에 이른다. 의성의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경정집≫ 13권, 보유(補遺) 합 4책과 ≪조천록 朝天錄≫ 등이 전한다.

서원은 마을 뒤쪽의 산허리에 위치하고 있다. 우측으로는 4칸 규모의 팔작기와집 강당이 자리잡고 있으며, 사당인 경현사가 배치되어 있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건물로는 강당, 주사(廚舍)가 있으며, 향사를 올리는 상석 4좌가 있다.
현재 이곳에는 내삼문과 경현사로 이루어진 제향공간이 왼편에 있고, 장대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린 중정당이 오른편에 있다. 중정당 건물에는 외삼문을 비롯한 동·서재, 담장이 전혀 없이 중정당 건물만이 있다. 건물 천정에 장대서원중건기 등 기문이 걸려 있다. 先院後廟라는 서원의 전형적인 배치구조와는 다른 형태로 되어 있는 셈이다.


참고- 한국국학진흥원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