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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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금호서원(琴湖書院)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흥선리 44번지
   이운룡(李雲龍)
   1818년(순조 18)
   
   3월, 9월 중정(中丁)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08호(1995.06.19지정) 이운룡선무공신교서외관계문서 -보물 제1212호(1994.10.17지정)
금호서원은 건물은 임란 때 혁혁한 전공을 세워 경상우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식성군(息城君) 이운룡(李雲龍)장군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이운룡(李雲龍) 장군의 출생지인 매전면 은막리의 명대 마을에 상충사(尙忠祠)를 창건하여 장군의 영정(影幀)을 봉안하여 왔으나 1814년(순조 14년)에 류량(柳亮) 등 사림들 4백여명이 발의하여 이서면 금촌리에 영정을 이안해 왔다. 1868년(조선시대 고종 5년)에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해 훼철되고 동년에 남은 강당을 당시의 연지(지금의 풍야지)안 대월산 기슭에 이건 하여 효충사(孝忠祠)라 개칭하여 장군의 영정을 봉안하여 오다가 1947년에 장군의 방손인 이임호(李林浩)를 비롯하여 이정태, 김정곤, 박종현, 최재향, 박효수, 제씨 등 사림 2백여명이 발의하여 금호서원을 중창하여 향내사림에서 춘추로 향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당은 2001년 다시 중건하였다.

1)이운룡(李雲龍, 1562~1610)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경현(景見), 호는 동계(東溪). 청도 출신. 아버지는 남해현령 몽상(夢祥)이다. 1585년(선조 18) 무과에 올라 1587년 선전관에 임명되고, 1589년 정월에 옥포만호로 임명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부산에 접근하자,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은 적군의 거대한 형세에 진영을 버리고 곧 도망하였다. 이어 적군이 서남해안을 돌아 거제로 향해오자 경상우수사 원균(元均)도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해 전선과 무기를 바다 속에 침몰시키고, 수많은 군사도 흩어버리고서는 남해현의 앞 바다에 떠돌아다니다가 육지를 찾아 도망하려 하였다.
이 때 옥포만호로서 휘하에 있던 그는 원균에게, 나라의 중책을 맡은 장관으로서 강토를 사수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더욱이 이 지역이 남방의 주요 방어선으로서 최대의 관문임을 상기시키면서, 전라수군과 힘을 합쳐 왜적을 쳐부수어야지 도망은 직분과 국가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항언했다 한다.
이에 원균은 그의 강한 항변에 따라 율포만호 이영남 (李英男)을 전라좌수영으로 보내 이순신(李舜臣)에게 구원군을 요청하였다. 1592년 5월 7일, 원균이 인솔한 경상도 수군과 이순신이 지휘하는 전라도 수군이 합세해 거제도 동쪽 옥포양(玉浦洋)에서 적선을 맞아 싸웠다.
이 싸움에서 그는 선봉장으로서 아군을 진두지휘해 용전분격하니 적병이 감히 대항하지 못한 채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났다. 이 결과 적선 50여 척을 분소시키는 큰 전과를 거두었는데, 이것이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인 옥포해전의 대전과였다.
그 뒤 사천·진해·한산양·안골포·부산해 등 여러 해전에 참가, 진두에서 용감히 싸워 적군의 내양(內洋) 진출을 막아 우리 수군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는 데에 공을 크게 세웠다. 1596년 이순신의 천거로 경상좌수사에 승진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경상도의 수군을 주도하였다. 1604년 전후의 논공행상에서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책록되고, 식성군(息城君)에 봉해졌다.
1605년 내직으로는 도총부부총관·비변사당상관을 지내고, 외직으로는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어 국가의 중요 군직에 복무하면서 많은 공적을 남겼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청도의 금호서원(琴湖書院)과 의령의 기강서원(岐江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식성군실기≫ 2권이 있다.
 

서원은 대월산(對月山)을 배경으로 앞쪽의 풍양지와 학산(鶴山)을 바라보며 북서향으로 좌정하고 전체배치는 2단으로 조성된 대지에 외삼문과 강당, 사당을 일축선상(一軸線上)에 두고 강당의 좌우에 동·서재를 둔 전학후묘형식(前學後廟形式)이다.
 
1)사당
사당은 강당의 뒤편 높직한 곳에 토담으로 둘러 현충사(賢忠祠)라 하고 기둥 위를 연화와 봉두로 장식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집이며, 공포는 이익공 구조이며 가구는 3량가이다. 사당의 전면에 평삼문을 두어 신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2)강당
강당은 충의당(忠義堂)으로 중앙의 마루에 왼쪽은 충의당의 현판을, 오른쪽에는 ‘금호서원’의 현판을 달고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집으로 공포는 직절익공을 사용한 초익공 구조이며 가구는 3량가이다. 방형의 자연석 기단을 2단으로 쌓았다. 평면은 2칸 우물마루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온돌방 1칸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인데 양측 온돌방의 전면에는 퇴칸을 두었으며 마루와 방 사이에는 사분합들문을 설치하였다.
 
3)동·서재
동재와 서재 모두 정면3칸, 측면1칸의 ㅡ자형 건물이며, 홑처마 맞배지붕집이다. 공포는 민도리구조이며 가구는 3량가이다. 두 건물 모두 자연석 기단에 자연석 초석을 두고 각기둥을 사용하였다. 동재는 좌측 한 칸은 창고이며 우측 두칸은 방이다. 서재는 좌측에 마루를 한 칸 두고 우측 두 칸은 방을 배치하였다.
 
4)외삼문
외삼문은 상덕문(尙德門)이라는 현판을 달았으며 정면3칸 측면1칸의 ㅡ자형 건물로 대문간 좌우에 문간채 1칸씩을 두었다. 외삼문의 문간채는 모두 창고이다.

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던 ‘식성군이운룡선무공신교서외관계문서’와 영정 등은 현재 청도의 재령이씨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1)식성군이운룡선무공신교서외관계문서(息城君李雲龍宣武功臣敎書外關係文書)
-보물 제1212호(1994.10.17지정)
선조가 1604년(선조 37)에 임진왜란 때 옥포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이운룡(李雲龍)에게 내린 상훈교서와 교지 등 2점이다.
교서는 이운룡이 옥포해전에서 왜군을 크게 격파하고 승리한 무공을 찬양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즉 이운룡을 선무공신 3등으로 정하고 포상으로 초상화를 그려 후세에 길이 남기고, 관직의 1계급 진급과 부모 처자도 1계급씩 올리되 자식이 없을 경우 조카나 여조카까지 1계급씩 올려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손인 큰아들이 세습하여 그 녹을 잃지 않게 하여 영원히 도울 것임을 천명한 것이다.
교지는 선조 29년(1596) 이운룡을 절충장군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하는 사령장이다. 이 교서 및 교지는 조선시대 공신 연구 및 임진왜란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인물연구의 자료로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