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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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용강서원(龍岡書院)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학산리 450
   박 익(朴 翊) 박경신(朴慶新) 박경인(朴慶因) 박경전(朴慶傳) 박경윤(朴慶胤) 박경선(朴慶宣) 박 선(朴 瑄) 박 찬(朴 璨) 박지남(朴智男) 박 린(朴 璘) 박 근(朴 瑾) 박 숙(朴 琡) 박 우(朴 瑀) 박철남(朴哲南) 박 구(朴 球)
   1816년(순조 16)
   
   8월 중정(中丁)
   용강서원충열사및14의사묘정비 -경상북도기념물 제129호(1988.08.03지정)
청도에 정착해온 밀양박씨(密陽朴氏) 문중의 그 현조(玄祖)인 충숙공 박익(忠肅公 朴翊)과 임란14의사(壬亂14義士)를 재향하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건립한 용강서원(龍岡書院)이다.
서원 내에 있는 충열사(忠烈祠)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청도·밀양·경산 등지에서 왜적에게 큰 타격을 준 박경신(朴慶新), 경인(慶因), 경전(慶傳), 경윤(慶胤), 경선(慶宣), 선(瑄), 찬(璨), 지남(智男), 철남(哲南), 린(璘), 우(瑀), 구(球), 숙(琡), 근(瑾) 14의사를 모신 사당이다. 14의사는 부자, 형제, 숙질, 종형제 사이로 이 가운데 12분은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2·3 등에 각각 책봉되었고, 한 분은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1등에 녹훈 되었다. 이에서 주목되는 점은 1개 사족(士族)가문의 부자, 형제, 숙질, 종반사이의 14명이 함께 국가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궐기하였다는 점은 역사상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을 제향하는 용강재(龍岡齋)는 1794년(정조 18)이래 후손들을 위시한 지역 사림들이 사우로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 있었으나 관철되지 못하다가 1816년(순조16)충열사(忠烈祠)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1868년(고종5) 훼철 되었지만 일제강점기인 1913년에 용강서당(龍岡書堂)이 건립되었고 1935년 요사, 관리사, 창고, 14의사를 봉안한 숭의사(崇義祠)가 충열사(忠烈祠)로 용강서당(龍岡書堂)이 용강서원(龍岡書院)으로 개명(改名)되었다. 1960년 강당(講堂)이 건립되었다. 한편 1876년에는 14의사 묘정비가 건립되었다.

1)박익(朴翊, 1332~1398)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초명은 천익(天翊), 자는 태시(太始), 호는 송은(松隱). 판도판서(版圖判書) 영균(永均)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능주구씨(綾州具氏)로 좌정승(左政丞) 위(褘)의 딸이다.
고려왕조에서 예부시랑(禮部侍郎)·중서령(中書令)·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의 벼슬을 지내고, 여러 번 왜구와 여진을 토벌하여 전공을 세웠다.
조선이 개국되자 두문동(杜門洞)의 귀은제(歸隱第)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1395년(태조 4) 공조판서·형조판서·예조판서·이조판서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고, 이듬해에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었지만 부임하지 않았다.
집 뒤의 산을 송악(松岳), 마을을 송계(松溪), 호를 송은, 집을 송암(松庵)이라 한 것은 모두 송경(松京)의 ‘송(松)자’의 뜻을 잊지 말자는 뜻이다.
별세 후 좌의정에 추증되고 충숙(忠肅)이라는 시호가 내렸으며, 밀양의 덕남서원(德南書院)과 신계서원(新溪書院), 용강사(龍岡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송은집≫이 있다.
 
2)박경신(朴慶新, 1544~)
박경신은 십사의사(十四義士)의 한 분으로 호는 삼우정(三友亭)이며 박하담(逍遙堂 朴河淡)의 손자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으로 1544년(중종 39)에 태어났다.
1579년 (선조 12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때에는 조전장(助戰將)으로 안동(安東), 문경(聞慶) 등지에서 싸우면서 내려와 청도의 의병진(義兵陣)과 연합하여 곽 망우당 (郭忘憂堂)과 연결지워 전공을 세우니 공일등(功一等)에 록하였다. 그 후 밀양부사(密陽府使)로서 더욱 활동하였으나 아깝게도 전몰하였다.
그는 일찍 한강 정구(寒岡 鄭逑)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 등과 도의의 교가 두터웠고 후에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증하였다. 십사의사가 다같이 숭의사에 향배 되었다.
 
3)박경인(朴慶因)
선생의 호는 용연(龍淵)이며 박경신(朴慶新)의 동생이다. 종제 박경전(朴慶傳)과 같이 창의(倡義)하여 대장(大將)으로 싸웠다. 1592년(선조 25) 5월 8일 서지산 (西芝山)에서 전사하였다. 임종시 아들 선(瑄)에게 기필고 국적을 칠 것을 유언하였다. 후에 도신계문(道臣啓聞)에 의해 사헌부 지평 (持平)을 증하고 숭의사에 향배되었다.
 
4)박경전(朴慶傳, 1553~1623)
자는 효백(孝伯)이요. 호는 제우당(悌友堂)이며 박하담(朴河淡)선생의 차자(次子)인 이 (頤)의 큰아들이다. 본관은 밀성(密城)으로 1553년(명종 8)에 태어났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서 창의맹약문(倡義盟約文)과 격문을 발표하고 중제인 국헌 박경윤(菊軒 朴慶胤)선생을 위시하여 종숙질(從叔姪) 등 일문 10여인과 더불어 이득복(李得福), 이정욱(李廷部), 이경 (李磬), 정희호(鄭希漢) 등과 합세하여 청도를 보전하였다. 당시의 군수 배응경(郡守 裵 應褧)이 최정산(最頂山)으로 란을 피해 있다가 돌아오니 선생은 배 군수(裵郡守)에 양공(讓功)하고 조정에 알리니 배응경(裵應褧)은 일등공(一等功)이 내리고 선생에게는 이등공(二等功)이 내렸다.
정유재란 (丁酉再亂)때에는 홍의장군 곽재우(紅衣將軍 郭再祐)와 더불어 화상산성(火旺山城)을 같이 싸워 지켰다. 그 후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약포 정탁(藥團 鄭 琢)의 천으로 창녕군수(昌寧郡守)가 되어 많은 치적을 남기고 운문산하에 은거하며 이모당(二慕堂)이라 하니 즉 충군(忠君), 효친(孝親)을 말 하는 것이라 한다. 평소 행의도덕(行誼道德)이 높았고 한국학 연구에 공헌한바 큰 예부운략(禮部韻略) 판본이 적천사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임진왜란때 불타버리고 없었는데 선생은 이 판본을 복각하기 위해 동생 국헌 박경윤(菊軒 朴慶胤)선생과 더불어 영동(永同) 까지 가서 복각하였는데 지금 선암서원에 보존되어 있다. 순조조(純朝朝)에 어사 (御史)의 천으로 병조판서를 증직하고 증의사에 향사하고 문집(文集)이 있다.
5)박경윤(朴慶胤)
선생의 자는 효중(孝仲)이고 호는 국헌(菊軒)이며 박경전(朴慶傳)의 중제이다. 임진왜란때에 백씨인 의병장(義兵將)과 더불어 창의하여 아익장(亞翼將)으로 불후의 전공으로 이등공신(二等功臣)이 내리고 1603년(선조 36)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첨정(訓練僉正)이 되고 백씨인 박경전(朴慶傳)과 같이 예부운략(禮部韻略)의 판본 복각에 힘써서 이를 완성하였다. 후에 수의포계(繡衣褒啓)에 의해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증하고 뒤에 숭의사에 향사하였다.
 
6)박경선(朴慶宣)
선생은 제우당 박경전(朴慶傳)의 세째 동생으로 일찍 무과에 급제하여 천성만호(天城萬戶)를 하다 임진왜란을 당해 백씨 중씨와 더불어 창의(倡義)하여 어성(禦城)에서 모부인(母夫人)을 보위하고 적의 침공을 격퇴하다 마지막으로 적장을 안고 봉황애(鳳凰崖)에서 떨어져 전사하였다. 모두 충효경전이라 하였다. 후에 도신계문(道臣啓聞)으로 좌승지(左承旨)를 증직하고 후에 숭의사에 향배하였다
 
7)박선(朴瑄)
선생의 호는 괴정(槐亭)이며 박경인(朴慶因)의 아들이다. 선생은 임진왜란 때 아버지와 같이 창의(倡義)하여 임란초두에 아버지 지평공(持平公)이 전사할 때 기필코 국적을 물리치라는 유언을 받들어 분신용전하여 공을 세워 삼등공신(三等功臣)이 되고 후에 군자감 봉사(軍資監 奉事)를 거쳐 경조우윤(京兆右尹)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숭의사에 향배되었다.
 
8)박찬(朴璨)
선생의 휘는 찬이오 호는 운옹(雲翁)이며 박하담(朴河淡)의 장손인 박경연(朴慶延)의 아들로서 중부 박경신(朴慶新)과 합진하여 청도 밀양 두 고을에서 공을 세워 상등공신(三等功臣) 이 되었다. 일찍 무과에 올라 훈련원 주부(訓練院 主簿) 동첨경성판관(同簽鏡城判官)이 되었다. 다시 한음 이상국(漢陰 孝相國)이 상언하여 특별히 가선동중추(嘉善同中樞)로 제수되어 부임하였다. 후에 숭의사에 향배되었다.
 
9)박지남(朴智男)
선생은 박경신(朴慶新)의 장자로서 어릴 때부터 담략이 뛰어나고 병서를 즐겨 읽었다. 임란 때는 항상 선봉을 서서 전후 수성전을 치루고 이겼다. 1603년(선조 36)에 무과에 오르고 이등공신에 록되어 충추부 동지(中樞府 同知)에 오르고 뒤에 숭의사에 향사하였다.
 
10)박린(朴璘)
선생은 자는 군헌(君獻), 호를 행와(杏窩)라 하며 박경윤(朴慶胤)의 장자로서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였을 때는 약관 19세였다. 부친 삼형제분을 따라 토적에 공이 많어 이등공(二等功)이 내리고 훈련원 주부(訓練院 主簿)로 있었다. 다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청병(淸兵)이 처들어을 때 62세로서 의병으로 나갔다. 후에 숭의사에 향배되었다.
 
11)박근(朴瑾)
선생의 휘는 근(瑾)이오 박하담(朴河淡)의 박하청(朴河淸)의 증손으로 임란창의(壬亂倡義)에 일사보국하며 창의맹약문(倡義盟約文)과 격문을 작성하여 각지로 널리 발초하고 선전하며 운문진(雲門陣)을 지켰으니 이등공훈(二等功勳)이 내렸다. 선생은 일찌기 성균관 진사(成均館 進士)로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후에 숭의사에 향배 되었다.
 
12)박숙(朴琡)
선생의 호는 용암(龍巖)이며 박우(朴瑀)의 동생으로 임란창의 때 겨우 15세였다. 어린나이로 여러 부형을 따라 공을 세우니 삼등공(三等功)이 내리고 군자감 봉사(軍資監 奉事)를 제수하였다. 문한(文翰)이 놀라우며 만년에는 서사로 자오하여 이창석(李蒼石), 조정(趙靖) 등 제현들과 시문을 지어 서로 주고받았으며 조지산(曺芝山), 박대암(朴大庵), 서낙재(徐樂齋)와 교의하였다. 저서에는 남정록(南征錄)이 있으며 후에 숭의사에 향배되었다.
 
13)박우(朴瑀)
선생의 호는 기포(杞圃)이고 박찬(朴璨)의 아우로서 임진왜란을 당해 중부 박경전(朴慶傳)의 창의진(倡義陣)에서 많은 모책(謀策)을 세워 큰 전공을 세웠다. 후에 무과에 올라 1624년 (인조 2)의 이괄란(李适亂)에 공이 많아 일등훈(一等勳)이 내리고 1630년(인조 8)에 남포현감(藍浦縣監)이 되었다. 1636년(인조 14)의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출진하여 쌍령(雙嶺)에서 전사 하였다. 후에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추증받고 숭의사에서 향사하고 있다.
 
 
14)박철남(朴哲南)
선생은 박경신(朴慶新)의 둘째아들로 어릴 때부터 전성이 강개하고 신장이 8척거구이며 임란 때는 여러 부형을 따라 어렵고 위태로움을 피하지 않고 운문(雲門), 이화(耳火), 송라(松羅)에서 전첩(戰捷)하니 이등공훈(二等功黨)이 내렸으며 뒤에 숭의사에 향배되었다.
 
15)박구(朴球)
선생은 박경윤(朴慶胤)의 둘째 아들인데 박하담(朴河淡)의 삼자인 기의 손자로 출생하였다. 어릴 때부터 담략이 크고 무예를 습득하였다. 부형을 따라 동맹창의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토적하니 상등공이 내리고 훈련원 판관(判官)을 제수하였다. 후에 숭의사에서 향사하고 있다.
 

현존하는 경내의 건물로는 누각이 있는 삼문을 들어서면 양 옆으로 창고인 수장고와 동재가 있으며, 정면에는 강당이 자리잡고 있다. 강당 뒤쪽으로 사당인 여충사가 있다.
사당인 여충사(麗忠祠)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이며 겹처마 구조에 익공집이다. 강당인 상의당(尙義堂)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겹처마 건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었있다. 동재는 용강재(龍岡齋)로 정면 4칸, 측면 1칸에 방 1칸은 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수장고는 강당의 정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우진각 지붕으로 되어 있다.
 
1)14의사 묘정비(廟庭碑)
14의사 묘정비(廟庭碑)는 본 서원과 함께 경상북도기념물 제12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876년 건립한 것으로 비문은 동몽교관(童蒙敎官) 김시질(金是瓆)이 찬하고 서자(書者)는 천주교도(天主敎徒) 이가환(李家煥)이다. 임란 당시의 상황을 매우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으며 비각의 구조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생명을 돌보지 않고 분연히 일어난 밀양박씨 일족의 위국충절(爲國忠節)과 그 전통을 400년이 넘도록 면면히 이어온 후손들의 의지는 후대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