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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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병암서원(屛巖書院)
   경상북도 청송군 부남면 부천리
   이 이(李 珥) 김장생(金長生)
   1702년(숙종 28)
   1702년(숙종 28)
   3월 상정(上丁)
   
병암서원은 1702년(숙종 28)에 이이(李珥)와 김장생(金長生)을 봉안하기 위해 지방유림의 공의로 창건되었으며, 1702년(숙종 28)에 조정에서 ‘병암(屛巖)이라고 사액(賜額)을 내렸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毁撤)되었다. 1882년(고종 19)에 청운동으로 이건(移建)하였고, 1928년 구평동으로 재이건(再移建)하였으며, 1974년에 토지를 기증받아 1978년에 부남면 홍원동 송전리 입구에 복원 건립하고, 2004년 중건을 완료하였다.
 

1)이이(李珥, 1536~1584)
조선 중기의 학자·정치가.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강릉 출생. 아버지는 증 좌찬성 원수(元秀)이며,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師任堂 申氏)이다.
아명을 현룡(見龍)이라 했는데, 어머니 사임당이 그를 낳던 날 흑룡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 들어와 서리는 꿈을 꾸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 산실(産室)은 몽룡실(夢龍室)이라 하여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8세 때에 파주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花石亭)에 올라 시를 지을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뛰어 났다. 1548년(명종 3) 13세때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세 때에 어머니가 돌아가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장례하고 3년간 시묘(侍墓)하였다, 그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고 다음해 20세에 하산해 다시 유학에 전심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였다. 23세가 되던 봄에 예안(禮安)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했고, 그 해 겨울의 별시에서 <천도책 天道策>을 지어 장원하였다. 전후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6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29세에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예조좌랑·이조좌랑 등을 역임, 33세(1568)에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부교리로 춘추기사관을 겸임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 해에 19세 때부터 교분을 맺은 성혼과 ‘지선여중(至善與中)’ 및 ‘안자격치성정지설(顔子格致誠正之說)’ 등 주자학의 근본문제들을 논하였다. 34세에 임금에게 <동호문답 東湖問答>을 지어올렸다.
37세에 파주 율곡리에서 성혼과 이기(理氣)·사단칠정(四端七情)·인심도심(人心道心) 등을 논하였다. 39세(1574)에 우부승지에 임명되고, 재해로 인해 <만언봉사 萬言封事>를 올렸다.
40세 때 주자학의 핵심을 간추린 ≪성학집요 聖學輯要≫를 편찬했다. 42세에는 아동교육서인 ≪격몽요결 擊蒙要訣≫를, 45세에는 기자의 행적을 정리한 ≪기자실기 箕子實記≫를 편찬했다.
47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고, 어명으로 <인심도심설 人心道心說>을 지어 올렸다. 이 해에 <김시습전 金時習傳>을 쓰고, ≪학교모범 學校模範≫을 지었으며, 48세에 <시무육조 時務六條>를 올려 외적의 침입을 대비해 십만양병을 주청하였다.
49세에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영면, 파주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었다.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풍덕의 구암서원(龜巖書院), 황주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등 20여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1545년 을사사화가 발생해 수많은 사류(士類)가 죽고 유배되었다. 사림은 출사(出仕)를 포기하고 물러서서 학문을 닦을 수밖에 없었다. 1565년(명종 20) 문정대비(文定大妃)의 죽음과 20년간 정사를 전횡하던 권신 윤원형(尹元衡)의 실각으로 나라 안의 정세가 바뀌었다.
을사사화 이후 죄를 입은 사람들이 풀려나고, 사림은 다시 정계로 복귀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이이는 30세로서 출사 1년째 되는 해였다. 1567년에는 이황이 상경하였다. 그 해 6월,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하면서 8월에는 을사사화 이후 피죄되었던 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 등이 서용(敍用)되었다.
선조 즉위 다음해인 1568년에는 조광조(趙光祖)에게 영의정을 추서, 이황이 일시에 대제학에 취임하고 남곤(南袞)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이황은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지어 올렸고, 1569년(선조 2)에는 이이가 <동호문답>을 지어 올렸다.
1570년에는 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의 신원이 이루어지는 등 정국이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면서 사림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오랜 구습이나 폐풍은 일시에 시정될 수 없었고 유림의 활동은 떨쳐 일어나지 못했다.
더구나 1575년부터는 동서의 분당으로 사림이 분열되고 정쟁이 심각해졌다. 연산군 이래의 폐법은 고쳐지지 않은 채 국가의 기강은 무너지고 민생의 곤고는 극도에 달하였으며, 군사적으로도 무력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1565년부터 1592년(선조 26)까지의 약 30년 간은 국정을 쇄신해 민생과 국력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이는 16세기 후반의 조선사회를 ‘중쇠기(中衰期)’로 판단해 일대 경장(更張)이 요구되는 시대라 보았다.
이이는 <만언봉사>에서 “시의(時宜)라는 것은 때에 따라 변통(變通)하여 법을 만들어 백성을 구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는 조선의 역사에 있어서도 “우리 태조가 창업했고, 세종이 수성(守成)해 ≪경제육전 經濟六典≫을 비로소 제정하였다. 세조가 그 일을 계승해 ≪경국대전≫을 제정했으니, 이것은 모두 ‘시의(時宜)에 따라 제도를 개혁한(因時而制宜)’ 것이요, 조종(祖宗)의 법도를 변란(變亂)함이 아니었다. ”고 하였다. 그러므로 시대의 변천에 따른 법의 개정은 당연한 일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이에게 성리학은 단순한 사변적 관상철학(觀想哲學)이 아니었다. 그는 성리학의 이론을 전개함에 있어 시세(時勢)를 알아서 옳게 처리해야 한다는 ‘실공(實功)’과 ‘실효(實效)’를 항상 강조하였다.
그는 <만언봉사>에서, “정치는 시세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일에는 실지의 일을 힘쓰는 것이 중요한 것이니, 정치를 하면서 시의를 알지 못하고 일에 당해 실공을 힘쓰지 않는다면, 비록 성현이 서로 만난다 하더라도 다스림의 효과를 거둘 수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이는 항상 위에서부터 바르게 하여 기강을 바로잡고 실효를 거두며, 시의에 맞도록 폐법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사화로 입은 선비들의 원을 풀어주고, 위훈(僞勳)을 삭탈함으로써 정의를 밝히며, 붕당의 폐를 씻어서 화합할 것 등 구체적 사항을 논의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기(國基)를 튼튼히 하고 국맥(國脈)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이는 성현의 도는 ‘시의와 실공’을 떠나서 있지 않으므로 현실을 파악하고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요(堯)·순(舜)·공(孔)·맹(孟)이 있더라도 시폐(時弊)를 고침이 없이는 도리가 없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이이는 진리란 현실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고, 그것을 떠나서 별도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여기서 이(理)와 기(氣)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하는 이이 성리설의 특징을 보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2)김장생(金長生, 1548~1631)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서울 출신. 할아버지는 지례현감 호(鎬)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계휘(繼輝)이며, 어머니는 평산 신씨(平山 申氏)로 우참찬 영(瑛)의 딸이다. 아들이 집(集)이다.
1560년 송익필(宋翼弼)로부터 사서(四書)와 ≪근사록 近思錄≫ 등을 배웠고, 20세 무렵에 이이(李珥)의 문하에 들어갔다. 1578년(선조 11)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고, 1581년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로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돈녕부참봉이 되었다.
그 뒤 순릉참봉(順陵參奉)과 평시서봉사(平市署奉事)를 거쳐 활인서(活人署)·사포서(司圃署)·사옹원(司饔院) 등의 별제(別提)와 봉사(奉事)가 내렸으나 모두 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 뒤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인의(引儀)를 거쳐 정산현감(定山縣監)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이 된 뒤, 명나라 군사의 군량 조달에 공이 커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로 승진하였다. 1596년 한 때 연산으로 낙향했는데, 단양·양근 등지의 군수와 첨정(僉正)·익위(翊衛)의 관직이 거듭 내려졌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 해 봄에 호남 지방에서 군량을 모으라는 명을 받고 이를 행해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이 되었다가 곧 안성군수가 되었다.
1601년 조정에서 ≪주역구결 周易口訣≫의 교정에 참가하도록 불렀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이듬 해 청백리로 올려졌으나, 북인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1605년 관직을 버리고 연산으로 다시 내려갔다. 그 뒤에 익산군수를 지내고, 1610년(광해군 2) 회양·철원부사를 역임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 때 동생이 연좌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나자, 관직을 버리고 연산에 은둔해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 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75세의 나이에 장령으로 조정에 나갔으나, 곧이어 사업(司業)으로 옮겨 원자보도(元子輔導)의 임무를 겸하다가 병으로 다시 낙향했다.
이듬 해 이괄(李适)의 난으로 왕이 공주로 파천해오자 길에 나와 어가를 맞이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왕을 따라 서울로 와서 원자보도의 임무를 다시 맡고 상의원정(尙衣院正)으로 사업(司業)을 겸하였다. 집의(執義)를 거친 뒤 낙향하려고 사직하면서 13가지의 중요한 정사(政事)를 논하는 소를 올렸다.
그 뒤 좌의정 윤방(尹昉), 이조판서 이정구(李廷龜) 등의 발의로 공조참의가 제수되어 원자의 강학을 겸하는 한편, 왕의 시강과 경연에 초치되기도 하였다. 1625년에 동지중추부사를 임명받았으나 이듬해 다시 사직해 행호군(行護軍)의 산직(散職)으로 낙향한 뒤 이이·성혼(成渾)을 제향하는 황산서원(黃山書院)을 세웠다.
같은 해 용양위부사직으로 옮기고, 1627년 정묘호란 때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서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세자를 호위하였다. 곧 화의가 이루어지자 모은 군사를 해산하고 강화도의 행궁(行宮)으로 가서 왕을 배알하고, 그 해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한달 만에 다시 사직해 용양위부호군으로 낙향한 뒤 1630년에 가의대부로 올랐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고 줄곧 향리에 머물면서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고 과거를 거치지 않아 요직이 많지 않았지만, 인조반정 이후로는 서인의 영수격으로 영향력이 매우 컸다.
인조 즉위 뒤에도 향리에서 보낸 날이 더 많았지만, 그의 영향력은 이이의 문인으로 줄곧 조정에서 활약한 이귀(李貴)와 함께 인조 초반의 정국을 서인 중심으로 안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학문과 교육으로 보낸 향리 생활에서는 줄곧 곁을 떠나지 않은 아들 집의 보필을 크게 받았다.
그의 문인은 많은데,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강석기(姜碩期)·장유(張維)·정홍명(鄭弘溟)·최명룡(崔命龍)·김경여(金慶餘)·이후원(李厚源)·조익(趙翼)·이시직(李時稷)·윤순거(尹舜擧)·이목(李楘)·윤원거(尹元擧)·최명길(崔鳴吉)·이상형(李尙馨)·송시영(宋時榮)·송국택(宋國澤)·이덕수(李德洙)·이경직(李景稷)·임의백(任義伯) 등 당대의 비중 높은 명사를 즐비하게 배출하였다. 아들 집도 문하이지만, 문인들 사이에는 그를 ‘노선생’, 아들을 ‘선생’으로 불렀다고 한다.
학문적으로 송익필·이이·성혼 등의 영향을 함께 받았다. 하지만 예학(禮學) 분야는 송익필의 영향이 컸으며, 예학을 깊이 연구해 아들 집에게 계승시켜 조선 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한 주류를 형성하였다.
인조 즉위 뒤 서얼 출신이던 송익필이 아버지 사련(祀連)의 일로 환천(還賤 : 천인으로 되돌아감)되자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같은 문하의 서성(徐渻)·정엽(鄭曄) 등과 신변사원소(伸辨師寃疏)를 올렸다.
또한, 이이와 성혼을 위해 서원을 세우고 1만 8000여 자에 달하는 이이의 행장을 짓기도 하였다. 스승 이이가 시작한 ≪소학집주≫를 1601년에 완성시켜 발문을 붙였는데, ≪소학≫에 대한 관심은 예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저서로는 1583년 첫 저술인 ≪상례비요 喪禮備要≫ 4권을 비롯, ≪가례집람 家禮輯覽≫·≪전례문답 典禮問答≫·≪의례문해 疑禮問解≫ 등 예에 관한 것이 있고, ≪근사록석의 近思錄釋疑≫·≪경서변의 經書辨疑≫와 시문집을 모은 ≪사계선생전서≫가 전한다.
1688년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을 비롯해 안성의 도기서원(道基書院) 등 10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좌우로 동·서재가 자리잡고 있으며 외삼문 정면에는 ‘병암서원’의 현판이 걸린 사우가 동·서재와 높이를 달리하여 자리잡고 있으며, 강당은 따로 건립되어 있지 않다.
사우는 정면 3칸·측면 1칸 규모의 사우에는 이이(李珥)와 김장생(金長生)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매년 3월 상정일(上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사우 앞에는 비석 1기가 있다.
동재와 서재는 책판 및 유물을 보관하고 있으며, 동서재 모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