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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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사양서원(泗陽書院)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중평리 257
   신 현(申 賢) 신용희(申用羲) 원천석(元天錫)
   1888년(고종 25)
   
    3월 15일
   
사양서원은 평산신씨 영해파 시조인 신현(申賢)을 주벽 (主壁)으로, 그의 아들 신용희(申用羲)와 원천석(元天錫)를 배향하고 있다. 1888년(고종 25)에 충청남도 논산군 두마면 용동 계룡산 아래에 있는 묵방리에 전국 사림의 공의로 화해사(華海祠)를 창건하여 신현(申賢), 신용희(申用羲), 정몽주(鄭夢周)를 배향하였다. 농지개혁 당시 서원의 땅이 분배되면서 사당의 유지관리책이 막연한 형편이 되자, 1966년에 종택이 있는 현 위치로 이건 봉안하였으며 문인 원천석(元天錫)을 봉안하였다. 사양이라 함은 사천의 양지쪽을 뜻함에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15일 향사를 지낸다. 사양서원내의 화해사의 편액은 백범 김구 선생의 친필이다

1)신현(申賢, 1298~1377)
고려의 학자. 자는 신경(信敬), 고려 개국공신(開國功臣) 숭겸(崇謙)의 후손. 우탁(禹倬)의 문인. 충숙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원나라에 가서 주공천(朱公遷)·허겸(許謙)·전당(錢唐) 등 유명한 학자들과 교우(交遊)하며 더욱 깊이 학문을 연구하여 당시의 대학자로 추앙되었다. 명나라에 자주 초빙되어 명제(明帝)로부터 스승의 대우를 받고 불원재(不諼齋)라는 호를 받았다. 공민왕조에 영해군(寧海君)으로 봉하고 문정(文貞)으로 증시(贈諡)되었다고도 한다. 율리사(栗里祠), 경백사(景白祠)에 추배되고), 화해사(華海祠)에 봉안했었고 낙동서원(洛東書院)에 배향(配享), 사양서원(泗陽書院)에 봉안(奉安)하였다.
 
2)신용희(申用羲, 1315~1382)
신현의 아들이며, 평산(平山) 1333년(충혜왕 3)에 생원(生員)과 진사시(進士試)에 급제(及第)하였으며, 문과(文科)에도 급제(及第)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 감찰어사(監察御使)에 이르렀다. 화해사(華海祠), 사양서원(泗陽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3)원천석(元天錫, 1330~? )
고려 말 조선 초의 은사(隱士).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 두문동(杜門洞) 72현의 한 사람이다. 할아버지는 정용별장(精勇別將) 열(悅)이며, 아버지는 종부시령(宗簿寺令) 윤적(允迪)이다. 원주원씨의 중시조이다.
어릴 때부터 재명(才名)이 있었으며, 문장이 여유있고 학문이 해박해 진사가 되었다. 그러나 고려 말에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개탄하면서 치악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고 살았다.
일찍이 방원(芳遠 : 太宗)을 왕자 시절에 가르친 적이 있어 그가 즉위하자 기용하려고 자주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태종이 그의 집을 찾아갔으나 미리 소문을 듣고는 산 속으로 피해버렸다. 왕은 계석(溪石)에 올라 집 지키는 할머니를 불러 선물을 후히 준 후 돌아가 아들 형(泂)을 기천(基川 : 지금의 豊基) 현감으로 임명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그 바위를 태종대(太宗臺)라 했고 지금도 치악산 각림사(覺林寺) 곁에 있다. 그가 치악산에 은거하면서 끝내 출사하지 않은 것은 고려에 대한 충의심 때문이었음을 그가 남긴 몇 편의 시문과 시조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시조로는 망한 고려 왕조를 회고한 것으로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 년 왕업이 목적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겨워하노라.”라는 회고시 1수가 전해온다. 시문들은 뒤에 ≪운곡시사 耘谷詩史≫라는 문집으로 모아져 전해온다. 그 문집에 실린 시 중에는 고려의 쇠망을 애석하게 여기는 몇 편의 시문이 있다.
대표적인 시의 제목을 보면, 우리 나라 2현(賢)을 기리는 시문 중에 최영(崔瑩)을 기린 <전총재육도도통사최영 前摠宰六道都統使崔瑩>과 우왕·창왕을 중 신돈(辛旽)의 자손이라 해 폐위시켜 서인을 만든 사실에 대해 읊은 <왕부자이위신돈자손폐위서인 王父子以爲辛旽子孫廢位庶人>이 있다.
여기서 그는 만일 왕씨의 혈통으로 참과 거짓이 문제된다면 왜 일찍부터 분간하지 않았느냐고 힐문하면서 저 하늘의 감계(鑑戒)가 밝게 비추리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 만년에 야사 6권을 저술하고 “이 책을 가묘에 감추어두고 잘 지키도록 하라.”고 자손들에게 유언하였다. 그러나 증손대에 이르러 국사와 저촉되는 점이 많아 화가 두려워 불살라버렸다고 한다. 강원도 횡성의 칠봉서원(七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청송군 파천면 중평리 입구에 200년 묵은 300여 그루의 울창한 송림을 옆에 두고 필봉(筆峯)기슭에 아담하게 세워져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좌우로 동서재가 자리하고 정면에는 ‘사양서원’의 현판이 걸린 강당이 자리잡고 있다. 강당 뒤로는 지대가 높은 곳에 사당인 화해사가 자리잡고 있다.
사당인 화해사(華海祠)는 정면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겹처마집이며 신현(申賢), 신용희(申用羲), 원천석(元天錫)을 배향하고 있다. ‘화해사’의 편액은 백범 김구 선생의 친필이다.
강당인 선교당(宣敎堂)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강당으로 팔작지붕 홑처마 집이며 전면에는 툇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이루어져 있다.
동․서재는 함양재(涵養齋)와 극소재(克紹齋)이며 각각 정면 3칸, 측면 1칸반 규모이며 정면에는 툇마루가 있다. 책판 및 유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