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1. 홈
  2. 로그인
  3. 회원가입

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소암서원(嘯巖書院)
   경상북도 칠곡군 기산면 평복리 203
   채몽연(蔡夢硯) 채 무(蔡 楙) 장내범(張乃範)
   1702년(숙종 28)
   
   매년택일
   
기산면 평복리에 있는 소암 서원은 채몽연(蔡夢硯), 채무(蔡楙) 부자와 장내범(張乃範)을 모신 서원이다. 1703년(숙종 29) 10월 유학자인 장벽, 장세휘, 박정석 등 20여명이 소암동 팜암바위 뒷산에 사당과 강당을 지어 소암사(嘯巖祠)라 하고 1712년(숙종 38) 11월 2일 채몽연(蔡夢硯), 채무(蔡楙)부자를 봉안하였다.
1803년(순조 3)에 서원으로 승격하고 1847년(헌종 13)에는 장내범(張乃範)을 배향하였다. 1871년(고종 8)에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모두 훼철되었으나, 1932년 3월 강당만 복원하면서 소암서당이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채몽연(蔡夢硯, 1561-1638)
조선 중기 칠곡 출신의 유생.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정응(靜應), 호는 투암(投巖). 고려 말에 호조전서(戶曹典書)를 지내다가 조선이 개국되자 절개를 지켜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은거한 채귀하(蔡貴河)를 중조(中祖)로 하고 본관을 인천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는 칠곡의 입향조 거경(巨敬) 채영우(蔡瀛佑)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였으며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동문들과 도의(道義)를 강론하고 후학을 양성하여 선비들의 모임에서 인정을 받았다.
아들 채무(蔡楙)와 함께 경상북도 칠곡군 기산면의 소암서원에 제향되었다.
 
《투암문집》

『투암선생문집』은 채몽연(蔡夢硯 ; 1561~1638)의 시문집이다. 채몽연의 자는 정응(靜應), 호는 투암(投巖)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 채몽연(蔡夢硯)의 시문집. 7권 2책. 목활자본. 1858년(철종 9) 7대손 죽와공 채국렬(國烈)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원조(李源祚)의 서문이 있다.

권1∼4에 시 19수, 소(疏) 3편, 서(書) 19편, 권5·6에 잡저 3편, 제문 6편, 묘지명 6편, 묘갈명 8편, 행장 3편, 권7에 부록으로 제문·묘갈명·소암사봉안문(嘯巖祠奉安文)·상향축문·승호고유문(陞號告由文)·승호후상향축문(陞號後常享祝文)·소암서원이건상량문(嘯巖書院移建上樑文) 각 1편, 사우척독(師友尺牘) 6편, 서개정한강선생신도비명후(書改正寒岡先生神道碑銘後) 1편, 유사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소에는 연경서원(硏經書院)에 대한 청액소(請額疏)가 있는데, 그 결과 사액(賜額)을 윤허받았다. 서(書)에는 부인이 사당(祠堂)을 배알하는 문제와 상제에 관한 것을 정구(鄭逑)에게 질의한 문목이 있다. 또 정구의 행록(行錄)과 연보 등을 찬술하면서 장현광(張顯光)·신흠(申欽)·정경세(鄭經世)·이이(李珥) 등과 의문점을 의논한 문목 등이 있다.

잡저 가운데 〈오망설 五妄說〉은 조망(躁妄)·우망(愚妄)·광망(狂妄)·패망(悖妄)·노망(老妄) 등 다섯 가지에 관해 조목마다 각각 논설을 붙여 학문과 덕행을 닦는 데 평생의 귀감으로 좌우명을 삼은 것이다.

그 밖에 자찬(自撰) 묘지명이 있고, 정구·박성(朴惺)·정추(鄭錘) 등에 대한 제문과, 8대조 이하 선대의 묘지·묘갈, 서사원(徐思遠)·정사철(鄭思哲)·정광천(鄭光天) 등의 행장이 있다. 그러나 저자의 약력을 상세히 기록한 행장은 없고, 다만 유사에 대략 나타나 있을 뿐이다. 이로써 저자의 유고는 오랜 세월 속에 모두 소실되어 사우(師友) 등의 문중에서 수집,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국립중앙도서관과 장서각도서에 있다.
 
2)채무(蔡楙, 1588~1670)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자후(子後), 호는 백포(栢浦) 또는 귀은자(歸隱子). 아버지는 몽연(夢硯)이며, 어머니는 죽산박씨(竹山朴氏)로 배(培)의 딸이다. 서사원(徐思遠)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사마시에 합격, 1628년(인조 6) 성균관에 들어가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163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학유로 기용되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켜 남한산성으로 달려갔다. 1645년 연원도찰방(連原道察訪)이 되어서는 부당한 제도를 개혁하고 세금과 부역을 감면하는 등의 선정을 베풀었다.
1648년 성균관전적을 지냈으며, 이어서 병조좌랑이 되었다. 만년에는 고향에 돌아가 당시 영남의 대학자 유진(柳袗)·김응조(金應祖) 등과 도의의 교제를 맺고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힘썼다. 저서로는 ≪백포문집≫ 4권이 있다.
 
《백포문집》
『백포선생문집』은 채무(蔡楙 ; 1588~1670)의 시문집이다. 채무의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자후(子後), 호는 백포(栢浦) 또는 귀은자(歸隱子)이다.

이 책은 1858년(철종 9) 6세손 국열(國烈)이 간행하였다. 권1·2에 시 175수, 만사 32수, 권3에 서(書) 2편, 서(序) 6편, 기(記) 5편, 제문 9편, 봉안문 3편, 권4는 부록으로 가장·행장·묘갈명·상량문·봉안문·축문·척독(尺牘)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 중 「벽련정(碧連亭)」·「사월정(沙月亭)」 등은 고적의 아름다운 모습을 묘사한 것이며, 「술회(述懷)」·「만흥(口興)」 등은 관직생활을 하면서 느낀 감회를 시로 표현한 것이다. 「남초(南草)」에서는 담배의 신기한 효능을 찬미하였고, 「심촌팔영(口村八詠)」에서는 한적한 농촌의 아름다움을 묘사하였다.

특히 「명궁가(名窮歌)」는 선비의 궁색한 생활은 하늘이 내린 것이라 하고 그 때문에 안빈낙도를 할 수 있다는 역설적인 내용을 고시조의 형식으로 묘사한 글이다. 「상남순상(上南巡相)」은 순찰사에게 국가에 공이 있는 자기 아버지의 묘석을 운반하는데 필요한 인부의 동원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유용기사일기(遊龍起寺日記)」는 가야산 일대를 10일간 유람한 사실을 적은 것으로, 광녕(廣寧)·마천(馬川)·안언현(安彦峴)·운계(雲溪)·금당(金堂) 등을 거쳐 해인사로 오는 노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밖에 「벽련정서(碧連亭序)」와 「소암도원동기(嘯巖桃源洞記)」에는 저자의 문재(文才)가 나타나 있으며, 「충주독제문(忠州纛祭文)」과 「기우제문(祈雨祭文)」에서는 당시의 민속과 신앙을 엿볼 수 있다.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채무는 시의 품격이 높고 시의가 아름다우며, 그 소재가 다양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채무의 아버지는 몽연(夢硯)이며, 어머니는 죽산박씨(竹山朴氏)로 배(培)의 딸이다. 서사원(徐思遠)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12년 사마시에 합격, 1628년 성균관에 들어가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163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학유로 기용되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켜 남한산성으로 달려갔다. 1645년 연원도찰방(連原道察訪)이 되어서는 부당한 제도를 개혁하고 세금과 부역을 감면하는 등의 선정을 베풀었다. 1648년 성균관전적을 지냈으며, 이어서 병조좌랑이 되었다. 만년에는 고향에 돌아가 당시 영남의 대학자 유진(柳袗)·김응조(金應祖) 등과 도의의 교제를 맺고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힘썼다.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채무(蔡楙)의 시문집. 4권 1책. 목활자본. 1858년(철종 9) 6세손 국렬(國烈)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원조(李源祚)의 서문이 있다. 권1·2에 시 175수, 만사 32수, 권3에 서(書) 2편, 서(序) 6편, 기(記) 5편, 제문 9편, 봉안문 3편, 권4는 부록으로 가장·행장·묘갈명·상량문·봉안문·축문·척독(尺牘)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상남순상 上南巡相〉은 순찰사에게 국가에 공이 있는 자기 아버지의 묘석을 운반하는 데 필요한 인부의 동원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유용기사일기 遊龍起寺日記〉는 가야산 일대를 10일간 유람한 사실을 적은 것으로, 광녕(廣寧)·마천(馬川)·안언현(安彦峴)·운계(雲溪)·금당(金堂) 등을 거쳐 해인사로 오는 노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밖에 〈벽련정서 碧連亭序〉와 〈소암도원동기 嘯巖桃源洞記〉에는 저자의 문재(文才)가 나타나 있으며, 〈충주둑제문 忠州纛祭文〉과 〈기우제문 祈雨祭文〉에서는 당시의 민속과 신앙을 엿볼 수 있다.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인동지에 지주중류비등 시문이 몇편수록됨.)
 
3)장내범(張乃範, 1563~1640)
자(字)는 정남(正南), 호(號)는 극명당(克明堂),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 사영(士瑛)의 아들로 영해(寧海) 출신이며 장현광(張顯光),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1세때 장현광(張顯光)을 찾아가 수학(受學)했으며 18세 때는 정구(鄭逑)를 찾아 가르침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해 평생을 학문연구로 보냈다.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으며 효행으로 칭송받았다. 1606년(선조 39) 학행으로 천거받기도 했다. 만년에는 시골에 완전히 은거하면서 독서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소암서원에 제향되었다.
 

경사진 산록을 평평하게 정지하고 방형으로 토석담과 시멘트담을 두르고 일자형의 강당을 남향으로 앉혔다. 진입은 정면의 높은 계단을 올라 대문을 지나면 건물기단 정면의 계단을 통해 대청으로 진입하는 정면진입구성이다. 강당 정면에는 팔작지붕의 단칸 4주문이 있고 좌측 담 복판에는 별도의 지붕 없는 철재문을 두어 차량의 진입이 용이하게 했다. 강당 뒤로는 울창한 산죽이 숲을 이루고 있다.
 
1)강당
‘소암서당’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으며, 강당의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1.5칸이다. 평면구성은 중앙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1칸씩 온돌방을 들이고 방 전면으로 퇴칸을 둔 전퇴 중당협실형이다.
구조는 두 단의 견치석을 쌓은 기단 위에 원형으로 가공한 주초를 앉히고 전면과 대청 후면 중앙부에만 두리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방형기둥을 세워 상부구조를 받고 있다. 모서리 서까래는 선자연 형태이고, 지붕은 홑처마에 팔작지붕으로 처리했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