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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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오천서원(烏川書院)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오천읍 원동리 590
   정습명(鄭襲明) 정몽주(鄭夢周) 정사도(鄭思道) 정 철(鄭 澈)
   1588년(선조 21)
   1613년(광해군 5)
   3월, 9월 초정(初丁)
   
1588년(선조 21) 지방유림의 공의로 정습명(鄭襲明)과 정몽주(鄭夢周)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2년(광해군 4) 현 위치에 중건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오천(烏川)’이라고 사액되었으며, 1740년(영조 16)에 정사도(鄭思道)와 정철(鄭澈)을 추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어 위패를 땅에 묻고 단을 만들어 향사하다가 1975년에 복원되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변 4두(豆)이다. 재산으로는 전답 2,500여 평이 있다.

1)정습명(鄭襲明, ?~1151)
고려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일(迎日). 호는 형양(滎陽). 영일정씨 형양공파(迎日鄭氏 滎陽公派)의 시조이다. 향공(鄕貢)으로 문과에 급제해 내시(內侍)에 보임되었다. 1134년(인종 2) 안흥정(安興亭) 밑의 조운(漕運)을 쉽게 하기 위해 홍주(洪州) 소대현(蘇大縣)에 하천을 팠으나 실패하였다.
이듬해 묘청(妙淸)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내시지후(內侍祗候)로서 수군을 이끌고 순화현(順化縣) 남강(南江)에서 적을 막았다. 이어 병선판관(兵船判官)이 되어 상장군 이녹천(李祿千) 등과 함께 서적토벌(西賊討伐)을 도모했으나 크게 패하고 말았다.
1140년 김부식(金富軾)·임원애(任元敱, 元厚)·최자(崔滋) 등과 함께 시폐10조(時弊十條)를 올렸으나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주언(奏言)을 좇지 않는다며 홀로 사직하였다.
1142년 김부식의 집에 임시로 머물자 간관의 체통을 잃었다는 탄핵을 받아 국자사업 기거주(國子司業 起居注)에서 파직되었으나 곧 예부시랑에 승진되었다.
1146년 ≪서경≫의 <대우모 大禹謨>를 강독하였다. 인종과 공예태후 임씨(恭睿太后 任氏)가 의종 대신에 둘째아들인 대령후 경(大寧侯 暻)을 태자로 세우려 하자 이를 막기도 하였다. 오랫동안 간관직에 있었으므로 인종이 승선으로 발탁해 동궁의 스승으로 삼았으며, 왕이 죽을 때 의종을 잘 보위하라는 부탁을 받았다.
1148년(의종 2) 한림학사가 되고, 이듬해 좌승선으로 고시관이 되어 시부(詩賦)로 오광윤(吳光允), 십운시로 조정시(趙挺時) 등 인재를 뽑았다. 1151년 추밀원지주사가 되었는데,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의종의 잘못을 간하다가 왕의 미움을 샀다.
또한 김존중(金存中)·정함(鄭諴) 등의 무리로부터 비방을 받았다. 병이 들어 김존중이 대직(代職)을 하게 되자 자살하였다. ≪동문선≫에 세태(世態)를 읊은 <석죽화 石竹花> 등 3편의 시와 2편의 표전(表箋)이 전한다.
 
2)정몽주(鄭夢周, 1337~1392)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영일(迎日). 경상도 영천 출생. 초명은 몽란(夢蘭) 또는 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습명(襲明)의 후손으로 운관(云瓘)의 아들이다. 어머니 이씨(李氏)가 난초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놀라 깨어나 낳았기 때문에 초명을 몽란이라 했다가 뒤에 몽룡으로 개명하고, 성인이 되어 다시 몽주라 고쳤다.
1357년(공민왕 6) 감시(監試)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해 1362년 예문관의 검열·수찬이 되었다. 이 때 김득배(金得培)가 홍건적을 격파해 서울을 수복하고서도 김용(金鏞)의 음모로 상주에서 효수되자, 그의 문생으로서 왕에게 청해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냈다.
1363년 낭장 겸 합문지후(郎將兼閤門祗候)·위위시승(衛尉寺丞)을 거쳐,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종군, 서북면에서 달려온 병마사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여진토벌에 참가하고 돌아와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전농시승(典農寺丞)을 역임하였다.
당시 상제(喪制)가 문란해져서 사대부들이 모두 백일 단상(短喪)을 입었는데, 홀로 부모의 상에 여묘(廬墓)를 살아 슬픔과 예절을 극진히 했기 때문에 1366년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이듬해 예조정랑으로 성균박사를 겸임하였다. 당시 고려의 ≪주자집주 朱子集註≫에 대한 그의 강설이 사람의 의표를 찌르게 뛰어나 모두들 의아해 하였다. 그러다가 송나라 유학자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 四書通≫이 전해지면서 이와 서로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고 모두 탄복하였다.
대사성 이색(李穡)은 그를 높이 여겨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 하였다. 태상소경(太常少卿)과 성균관 사예·직강·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372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풍랑으로 배가 난파되어 일행 12인이 익사하였다.
다행히 그는 13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명나라 구조선에 구출되어, 이듬해 귀국하였다.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등을 거쳐, 1376년(우왕 2) 성균관대사성으로 이인임(李仁任)·지윤(池奫)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가 언양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당시 왜구의 침해가 심해 나흥유(羅興儒)를 일본에 보내어 화친을 도모했으나 그 주장(主將)에게 붙잡혔다가 겨우 죽음을 면하고 돌아왔다. 그에게 앙심을 품었던 권신들의 추천으로 구주(九州)지방의 패가대(覇家臺)에 가서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으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건너가, 교린(交隣)의 이해(利害)를 설명해 맡은 임무를 수행했고, 왜구에게 잡혀갔던 고려 백성 수백명을 귀국시켰다.
이어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전공사(典工司)·예의사(禮儀司)·전법사(典法司)·판도사(判圖司)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380년 조전원수로 이성계를 따라 전라도 운봉에서 왜구를 토벌하였다.
이듬해 성근익찬공신(誠勤翊贊功臣)에 올라 밀직부사 상의회의도감사 보문각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密直副使商議會議都監事寶文閣提學同知春秋館事上護軍)이 되었다. 1382년 진공사(進貢使)·청시사(請諡使)로 두 차례 명나라에 갔으나, 모두 입국을 거부당해 요동(遼東)에서 되돌아왔다.
동북면조전원수로서 다시 이성계를 따라 함경도에 다녀온 뒤, 1384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명나라는 고려에 출병하려고 세공(歲貢)을 증액하며, 5년간의 세공이 약속과 다르다 하여 고려 사신을 유배하는 등 국교관계가 몹시 악화되어 있었다.
이에 모두 명나라에 봉사하기를 꺼렸으나, 사신의 임무를 다해 긴장상태의 대명국교를 회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1385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우홍명(禹洪命) 등 33인을 뽑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가서 증액된 세공의 삭감과 5년간 미납한 세공의 면제를 요청해 결국 관철하였다.
귀국 후 문하평리(門下評理)를 거쳐 영원군(永原君)에 봉군되었으며, 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나 다시 국교가 악화되어 요동에서 되돌아와, 삼사좌사(三司左使)·문하찬성사·예문관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389년(공양왕 1)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세워, 이듬해 문하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사 호조상서시사 진현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대사성 영서운관사(門下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事戶曹尙瑞寺事進賢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兼成均大司成領書雲館事)로 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에 봉군되고, 순충논도동덕좌명공신(純忠論道同德佐命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초(彛初)의 옥사가 일어나, 당시 조정에서 몰려난 구파정객들에 대한 대간의 논죄가 끊임없이 계속됨을 보고 이를 부당하다고 말해 탄핵을 받았다.
이에 사직하려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며, 이어 벽상삼한삼중대광 수문하시중 판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사 영경령전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경연사 익양군충의백(壁上三韓三重大匡守門下侍中判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事領景靈殿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 館事經筵事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
고려 말 다사다난하던 때 정승의 자리에 올라 아무리 큰 일이나 큰 의혹이라도 조용히 사리에 맞게 처결하였다. 당시 풍속이 모든 상제(喪祭)에 불교의식을 숭상했는데, 사서(士庶)로 하여금 ≪가례≫에 의해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만들어 제사를 받들게 하도록 요청해 예속이 다시 일어났다.
또, 지방수령을 청렴하고 물망이 있는 사람으로 뽑아 임명하고, 감사를 보내 출척(黜陟)을 엄격하게 했으며,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에 경력과 도사를 두어 금전과 곡식의 출납을 기록하게 하였다.
서울에는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를 두어 교육의 진흥을 꾀하였다. 그리고 기강을 정비해 국체를 확립하고, 쓸데없이 채용된 관원을 없애고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였다. 또, 의창(義倉)을 세워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고, 수참(水站)을 설치해 조운(漕運)을 편리하게 하는 등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1391년 인물추변도감제조관(人物推辨都監提調官)이 되고,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더했으며, 이듬해 ≪대명률 大明律≫·≪지정조격 至正條格≫ 및 본국의 법령을 참작, 수정해 신율(新律)을 만들어 법질서를 확립하려고 힘썼다.
당시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조준(趙浚)·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 등이 그를 추대하려는 책모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제거하려 하였다.
그런 와중에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석(奭)을 마중나갔던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벽란도(碧瀾渡)에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먼저 이성계의 우익(羽翼)인 조준 등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이를 눈치챈 이방원(李芳遠)이 아버지 이성계에게 위급함을 고해 그날 밤으로 개성으로 돌아오게 하는 한편, 정몽주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정몽주도 이를 알고 정세를 엿보려 이성계를 문병하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橋)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었다.
그는 천품이 지극히 높고, 뛰어나게 호매(豪邁)해 충효를 겸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성리학을 연구해 조예가 깊었다. 그의 시문은 호방, 준결하며, 시조 <단심가 丹心歌>는 그의 충절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후세까지 많이 회자되고 있으며, 문집으로 ≪포은집≫이 전하고 있다.
1405년(태종 5) 권근(權近)의 요청에 의해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修文殿大提學監藝文春秋館事益陽府院君)이 추증되었다.
1517년(중종 12) 태학생(太學生) 등의 상서(上書)로 문묘에 배향되었고, 또 묘에 비석을 세웠는데, 고려의 벼슬만을 쓰고 시호를 적지 않아 두 왕조를 섬기지 않은 뜻을 분명히 하였다.
또,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3개의 서원에 제향되었고, 묘 아래에 있는 영모재(永慕齋),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등 몇 곳의 서원에는 그의 초상을 봉안하고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3)정사도(鄭思道, 1318~1379)
고려 후기의 문신.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이 침입하였을 때 전직 밀직제학으로서 김규(金㺩)와 함께 절령책(岊嶺柵)을 지키는 임무를 부여받았으나 적의 공격을 받아 후퇴하였다.
1365년에는 경상도순문사에 임명되어 합포(合浦 : 마산)에 있었는데, 마침 최영(崔瑩)이 신돈(辛旽)의 참소를 입고 동서강도지휘사(東西江都指揮使)에서 계림윤(鷄林尹)으로 전보되어 경주에 오게 되자, 왕의 조처에 불만을 가진 신돈이 다시 일을 꾸며 보고하고 그의 당류(黨類) 이득림(李得霖)을 경주에 보내어 최영을 사죄(死罪)로 엮어 죽이려고 하자, 이에 죽음을 무릅쓰고 반대하다가 파면되었다.
그 뒤 1368년에는 왕이 왕륜사(王輪寺)에 있는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영전(影殿)이 협소하다고 하여 마암(馬巖)으로 옮겨 짓게 하자 첨서밀직(僉書密直)으로서 첨의시중(僉議侍中) 유탁(柳濯), 동지밀직(同知密直) 안극인(安克仁)과 함께 백성을 괴롭히고 재물을 낭비한다는 이유로 영전의 역사를 중지할 것을 건의하다가 왕의 비위을 건드려 감옥에 일시 갇혔다가 곧 석방되었다.
1371년에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승진되어 명나라에 하정사(賀正使)로 갔다왔으며, 1375년(우왕 1)에는 당시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을 죽이려 하였다고 의심받아 정몽주(鄭夢周)·김구용(金九容)·이숭인(李崇仁)·임효선(林孝先)·염정수(廉廷秀)·염흥방(廉興邦)·박형(朴形)·이성림(李成林)·윤호(尹虎)·최을의(崔乙義)·조문신(趙文信)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
 
4)정철(鄭澈, 1536년~1593년)
조선 중기의 문인·정치가.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서울 장의동(藏義洞 :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출생. 아버지는 돈녕부판관 유침(惟沈)이다.
어려서 인종의 숙의(淑儀)인 누이와 계림군 유(桂林君 瑠)의 부인이 된 막내누이로 인연하여 궁중에 출입, 같은 나이의 경원대군(慶源大君 : 명종)과 친숙해졌다.
10세 되던 해인 1545년(인종 1·명종 즉위)의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련되자 그 일족으로서 화를 입어 아버지는 함경도 정평(定平)으로, 맏형 자(滋)는 유배당하였다. 곧이어 아버지만 유배가 풀렸다.
12세 되던 1547년(명종 2) 양재역 벽서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을사사화의 여파로 아버지는 경상도 영일(迎日)로 유배되었고, 맏형은 이 때 장류(杖流) 도중에 32살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이 시기 정철은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 생활을 하였다.
1551년 원자(元子) 탄생의 은사(恩赦)로 아버지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자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전라도 담양 창평 당지산(唐旨山) 아래로 이주하게 되고, 이곳에서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년간을 보내게 되었다.
여기에서 임억령(林億齡)에게 시를 배우고 양응정(梁應鼎)·김인후(金麟厚)·송순(宋純)·기대승(奇大升)에게 학문을 배웠다. 또, 이이(李珥)·성혼(成渾)·송익필(宋翼弼) 같은 큰 선비들과도 사귀었다.
17세에 문화유씨(文化柳氏) 강항(强項)의 딸과 혼인하여 4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25세 때 <성산별곡>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 노래는 성산(별뫼) 기슭에 김성원이 구축한 서하당(棲霞堂)과 식영정(息影亭)을 배경으로 한 사시(四時)의 경물과 서하당 주인의 삶을 그리고 있다.
1561년(명종 16) 26세에 진사시 1등을 하고, 이듬해 문과 별시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성균관 전적 겸 지제교를 거쳐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 이어 좌랑·현감·도사를 지내다가 31세에 정랑·직강·헌납을 거쳐 지평이 되었다.
함경도암행어사를 지낸 뒤, 32세 때 이이(李珥)와 함께 호당(湖堂)에 선출되었다. 이어 수찬·좌랑·종사관·교리·전라도암행어사를 지내다가 35세 때 부친상을, 38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경기도 고양군 신원(新院)에서 각각 2년여에 걸쳐 시묘살이를 하였다.
40세인 1575년(선조 8) 시묘살이 복을 벗고 벼슬길에 나아가 직제학 성균관 사성,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이 무렵 본격화된 동서분당에 따른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벼슬을 버리고 담양 창평으로 돌아갔다. 창평 우거시에 선조로부터 몇 차례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43세 때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으로 승진하여 조정에 나아갔다. 그 해 11월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나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반대파인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1580년 45세 때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 때 <관동별곡>과 <훈민가 訓民歌> 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하였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도승지·예조참판·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48세 때 예조판서로 승진하고 이듬 해 대사헌이 되었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해(1585)에 사직, 고향인 창평으로 돌아가 4년간 은거생활을 하였다. 이 때 <사미인곡>·<속미인곡> 등의 가사와 시조·한시 등 많은 작품을 지었다.
54세 때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로서 최영경(崔永慶) 등을 다스리고 철저히 동인들을 추방하였다.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고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에 봉해졌다.
56세 때 왕세자 책립문제인 건저문제(建儲問題)가 일어나 동인의 거두인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와 함께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였다.
이에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던 왕의 노여움을 사서 “대신으로서 주색에 빠졌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는 논척을 받고 파직되었다. 명천(明川)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진주(晋州)로 옮기라는 명이 내린 지 사흘 만에 또다시 강계(江界)로 이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592년(선조 25) 5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왕을 맞이하고 의주까지 호종, 왜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체찰사를 지내고 다음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동인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의 송정촌(松亭村)에 우거(寓居)하다가 58세로 별세하였다.
작품으로는 <성산별곡>·<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등 4편의 가사와 시조 107수가 전한다. 시조는 ≪송강별집추록유사 松江別集追錄遺詞≫ 권2에 <주문답 酒問答> 3수, <훈민가> 16수, <단가잡편 短歌雜篇> 32수, <성은가 聖恩歌> 2수, <속전지연가 俗傳紙鳶歌> 1수, <서하당벽오가 棲霞堂碧梧歌> 1수, <장진주사 將進酒辭> 등이 실려 있다.
상당히 중복되기는 하나 성주본(星州本)과 이선본(李選本) ≪송강가사 松江歌辭≫에도 많은 창작시조가 실려 있다. 그의 작품세계는 대체적으로 애군(愛君)·애민(愛民) 사상을 저변에 깔고 있다.
이 외에도 훈훈한 인정을 느끼게 하는 인간미 넘치는 작품, 강호 산수의 자연미를 노래한 작품이 있다. 그리고 선취(仙趣)적 기풍과 풍류적 호방함을 담아낸 작품 등 폭넓은 사대부의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송강집≫과 시가 작품집인 ≪송강가사≫가 있다. 전자는 1894년(고종 31)에 간행한 것이 전한다. 후자는 목판본으로 황주본(黃州本)·의성본(義城本)·관북본(關北本)·성주본(星州本)·관서본(關西本)의 다섯 종류가 알려져 있다. 그 중 관북본은 전하지 않고 나머지도 책의 일부만 전한다.
필사본으로는 ≪송강별집추록유사≫와 ≪문청공유사 文淸公遺詞≫가 있다. 한시를 주로 실은 ≪서하당유고 棲霞堂遺稿≫ 2권 1책도 판각본으로 전한다. 창평의 송강서원, 영일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경내에 현존하는 건물로는 사당인 충정묘, 강당, 동재, 재실, 신문(神門)이 있다. 사당인 충정묘에는 정습명을 주벽(主壁)으로 좌우에 정몽주, 정사도, 정철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인 명륜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동재는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는 곳으로 사용되어 왔다.
 
1)사당
사당인 충정묘(忠正廟)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의 겹처마 구조로 되어 있다.
 
2)강당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로 팔작지붕의 홑처마 건물이다. 정면에 세살사분합문이 펼쳐져 있다.
 
3)동재
동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규모로 중간에 마루를 두고 양쪽에 실(室)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 구조이다.
 
4)오천재
재실인 오천재(烏川齋)는 강당의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의 홑처마 구조로 되어 있다. 중앙의 대청과 양쪽 협실로 구성되어 있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