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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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입암서원(立巖書院)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1리 산21
   장현광(張顯光) 권극립(權克立) 정사상(鄭四象) 손우남(孫宇男) 정사진(鄭四震)
   1657년(효종 8)
   
   2월 하정(下丁)
   경상북도기념물 제70호(1986.12.11지정)
입암서원은 1657년(효종 8)에 현재 죽장면 입암리 토월봉(吐月峯) 아래에 창건된 것으로 임진왜란 때 이 지방에 피난 와서 살다가 죽은 장현광(張顯光)을 봉안하고 지방유림인 권극립(權克立), 정사상(鄭四象), 손우남(孫宇男), 정사진(鄭四震)을 배향하고 있다.
서원은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毁撤)되었으나 1913년에 복원했고, 묘우는 1907년(순종 원년)에 소실되었다가 1972년에 복원하였다.

1)장현광(張顯光, 1554~1637)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열(烈)이며, 어머니는 경산 이씨(京山李氏)로 제릉참봉(齊陵參奉) 팽석(彭錫)의 딸이다. 경상북도 인동에서 성장하였다.
18세 때 <우주요괄첩 宇宙要括帖>을 지어 대유(大儒)의 면모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침식을 잊으며 학문에 정진해 23세 때인 1576년(선조 9)에 재능과 행실이 드러나 조정에 천거되었다.
1591년 겨울 모부인의 상중에 전옥서참봉(典獄署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오산(金烏山)으로 피난하였다.
1594년 예빈시참봉·제릉참봉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해에 유명한 <평설 平說>을 지었다. 다음해 가을 보은현감에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12월 관찰사에게 세 번씩 사직을 청했고, 이듬해 2월 또 세번 사직을 청한 뒤 허가를 기다리지 않고 향리에 돌아갔다가 직무유기 혐의로 의금부에 잡혀갔다.
1597년 여러 차례 그를 조정에 추천했던 유성룡(柳成龍)을 만났는데, 그의 학식에 감복한 유성룡은 아들을 그 문하에 보내어 배우게 하였다. 1601년 경서교정청낭청(經書校正廳郎廳)에 임명되었고 여러 번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1602년 거창현감·경서언해교정낭청(經書諺解校正郎廳)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그해 11월 공조좌랑으로 부임해 ≪주역≫ 교정에 참가했고, 형조좌랑에 옮겨졌으나 이듬해 2월 돌아왔다.
1603년 용담현령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곧 의성현령에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몇 달만에 돌아갔다. 1604년 순천군수, 1605년 합천군수, 1607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55세 때 <주역도설 周易圖說>을 지었고, 68세 때 <경위설 經緯說>을 지어 ‘이체기용 (理體氣用)’, 즉 ‘이경기위설(理經氣緯說)’을 제창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김장생(金長生)·박지계(朴知戒)와 함께 여러 번 왕의 극진한 부름을 받았고, 사헌부지평·성균관사업 등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다음해 사헌부장령으로 부임해 왕을 알현했고, 곧 사헌부집의·공조참의로 승진되어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에 참석하도록 부탁받았으나 사양하고 돌아갔다. 이어 이조참의·승정원동부승지·용양위부호군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26년(인조 4) 형조참판에 특제되어 마지못해 사은했고 계속해 사헌부대사헌·부호군에, 1628년 이조참판, 1630년 다시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지중추부사·의정부우참찬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군현에 통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군량미를 모아 보냈다. 그러나 다음해 2월 삼전도(三田渡)에서의 항복 소식을 듣고 세상을 버릴 생각으로 동해가의 입암산(立嵒山)에 들어간 지 반년 후에 죽었다. 1655년(효종 6) 의정부좌찬성, 1657년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그는 일생을 학문과 교육에 종사했고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당대 산림의 한 사람으로 왕과 대신들에게 도덕정치의 구현을 강조했고, 인조반정 직후에는 공신들의 횡포를 비판하고 함정수사를 시정하게 하는 등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그는 정구(鄭逑)에게 수학한 적이 있어 퇴계학파로 분류되고 있으나 이기론·심성론 등에서는 이황(李滉)의 학설과 상이한 점이 많았다.
그는 이(理)와 기(氣)를 이원적으로 보지 않고 합일적 혹은 한 물건의 양면적인 현상으로 파악하였다. 그의 <경위설>에서는 이를 경(經)으로, 기를 위(緯)로 비유해 이·기가 둘이 아니고 체(體)와 용(用)의 관계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심성론에서는 도심(道心)을 ‘미발지성(未發之性)’으로, 인심을 ‘이발지정(已發之情)’으로 파악했으나 이미 발한 뒤에도 역시 도심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도심이 인심 가운데 있고 인심이 도심 가운데 있어 별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또한 그는 사단(四端)이 칠정(七情)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칠정 가운데에서 본성을 따라 발현해 거짓되지 않은 것이 사단일 뿐이라 하여 사단의 순수고유한 발현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철학은 명나라의 나흠순(羅欽順)과 이이(李珥)의 이기심성론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남인계열의 학자들 중에서는 매우 이색적이고 독창적인 학설이다.
저서로는 ≪여헌집≫ 11권, ≪속집≫ 5권, ≪성리설 性理說≫ 6권, ≪역학도설 易學圖說≫ 9권, ≪용사일기 龍蛇日記≫ 2권 등이 있다. 성주의 천곡서원(川谷書院), 서산의 여헌영당(旅軒影堂), 인동의 동락서원(東洛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2)권극립(權克立, 1558~1661)
자(字)는 강재(强哉), 호(號)는 동봉(東峯)이고 장현광과 종유(從遊)하였다. 주세붕의 아들 박(博)에게 수학하였다. 동당시(東堂試)에 2차나 합격했으나 매번 성시(省試)에 실패하자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시골에 은거하여 독서와 궁리, 여행으로 일생을 보냈다.
3)정사상(鄭四象, 1563~1623)
자(字)는 여섭(汝燮), 호(號)는 우헌(愚軒),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여헌 장현광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우헌실기(愚軒實記)>>가 있다.
 
4)손우남(孫宇男, 1564~1623)
자(字)는 덕보(德補), 길보(吉補), 호(號)는 윤암(綸庵)이다. 정평공 죽석 손홍양(孫洪亮)의 11대손이다. 1613년 증광진사(增廣進士)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고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의 문인으로 제현(諸賢)들과 도의로서 사귀고 유교문화를 일으켰다. 스승인 조호익이 그를 좋은 친구로 대했으며 어버이를 섬기는 정성이 지극하여 지효(至孝)로 조정에 추천되니 “나는 하늘을 속였다.”하며 탄식했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일제당을 구축하고 여러 동지들과 작전 참모로서 치밀한 계획을 세워 많은 공적을 세웠다.
 
5)정사진(鄭四震, 1567~1616)
조선 중기 학자로 자(字)는 군섭(君燮), 호(號)는 수암(守庵),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영천(永川) 출생으로 일찍부터 과거공부를 단념하고 학문에만 힘써 학행으로 조정에 계문(啓聞)되어 여러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나라와 임금에 대한 충성심이 깊어 의인왕후(懿仁王后)와 선조의 상 때는 친부모상을 당한 것과 같이 행동하였으며 나라에 상(喪)이 있을 때는 언제나 채식을 하였다. 독실한 몸가짐으로 사람들이 그를 외경(畏敬)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당, 3칸의 강당과 부속건물로 1605년에 설립된 일제당, 1609년에 설립된 만활당 등이 있다. 사당에는 장현광을 주벽(主壁)으로 좌우에 권극립, 정사상, 손우남, 정사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부속건물은 향사 때 제수(祭需)를 마련하여 두는 곳이다.
 
1)사당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집으로 공포는 이익공 구조이며 가구는 3량가이다. 방형으로 다듬은 자연석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두고 원형 기둥을 얹었다. 사당의 좌우측에는 반 칸 규모의 만살청판문을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사당의 주위는 한식기와를 얹은 토석담을 둘렀으며 사주문을 두어 신문으로 사용하였다.
2)강당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집이다. 지붕은 중앙 부분의 맞배지붕에 좌우측에 눈썹지붕을 결합한 특이한 형태이다. 눈썹지붕이 맞배지붕과 결합되는 부분에는 익공부재와 보머리가 길게 돌출되어 있다. 공포는 초익공 구조이며 가구는 5량가이다. 방형의 자연석 기단에 자연석 초석을 사용하였다. 평면은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온돌방 1칸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이다. 대청의 전면에 세살청판문을 설치하고 그 앞으로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으며 전면의 전체에 걸쳐 쪽마루를 대었다. 강당의 앞에 사주문을 두어 정문으로 사용한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