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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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중양서원(中陽書院)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동해면 중산리 185-2
   서 섭(徐 涉) 서시복(徐時福) 서 종(徐 淙)
   1794년(정조 18)
   
   3월 하정(下丁)
   
경북 포항시 남구 동해면 중산리에 있는 서원이다. 조선시대에 서섭(徐涉)과 서시복(徐時福)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794년(정조 18)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당시의 경내 건물로는 상충사(尙忠祠), 강당, 동재, 서재, 신문(神門), 전사청(典祀廳), 고직사 등이 있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뒤 언제 복설되었는지 확실치 않으며, 매년 3월 하정(下丁)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1)서섭(徐涉)
호(號)는 남은(南隱),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판서공파(判書公派)의 파조(派祖)로 세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문종을 거쳐 단종에 이르기까지 벼슬이 대호군(大護軍)을 거쳐 자헌대부이조판서(資憲大夫吏曹判書)에 이르렀다. 그는 단종초에 왕족과 간신들의 발호(跋扈)를 경계하여 척간소(斥姦疏)로 개혁을 주장하다가 유배당하기도 하였다.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호(號)를 남애(南涯)에서 남은(南隱)으로 바꾸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은둔생활을 했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도 그의 행적을 모르고 있다가 문녕월사변통곡(聞寧越事變痛哭), 문륙신순절감음(聞六臣殉節感吟), 재적소시시(在謫所時詩)와 여손격재(與孫格齋) 업서(業瑞), 계자손설(戒子孫說), 백형친감제문(伯兄親監祭文)들이 포함된 유고(遺稿)와 그 행장(行狀)이 1924년 그가 살던 낡은 집 친정에서 발견되어 늦게나마 그의 충절을 알게 된 후손과 유림에서 1926년 그의 묘소아래 담모재(膽慕齋)를 건립, 그를 주향(主享)하고 1994년 그의 자인 서차원(徐次元)과 아울러 두 부자를 배향(配享)하면서 유림에서 덕산서원(德山書院)으로 개칭 중
건(重建)하였다. 감원(坎元)은 성종(成宗)때의 충신이며 성균생원(成均生員)으로 구언상소(求言上疏)를 올려 성종(成宗)의 실정을 직담하였다가 충반위죄(忠反爲罪)로 심한 고문을 당한 직신(直臣)인데 성종실록(成宗實錄)에도 상재되어있으며 문집도 간행하였다. 경내에는 위패를 모신 경의사(景義祠)를 비롯하여 방 3칸, 대청 1칸의 정침외(正寢外)에 동서의 존성재(存誠齋), 구인재(求仁齋)와 남은선생(南隱先生) 신도비각(神道碑閣)이 함께 있다.
 
○ 달성서씨 판서공파 남은선생 휘 섭 사적 : 군신대륜은 하늘에 경이요, 땅에 의라, 만고에 뻗혀 없어지지 않는다. 석에 단종이 손위할 때에 강상(綱常)을 붙들고 의리로 항거하여 충에 죽고 절을 세움은 삼상과 육신이 동일하다. 또 생육신과 같이 자취는 다르나 의리가 같은 이 있어 육신(六臣)을 칠신(七臣)이라 해야 가할 자는 고 달성서판서(達城徐判書) 휘(諱) 섭(涉) 남은공(南隱公)이다. 공이 삼조 재상으로 단종조에 국세가 의난함을 보고 목욕 상소하니 왈 선왕이 재세할 때 집현전 제신에 하신 말씀 신도 선왕 곁에서 들었다 하고 또 주나라에 관채가
있고 한나라에 오초(吳楚)가 있다. 등어(等語)는 그 마음은 충성하나 그 말은 심히 위태하다. 이로 인하여 멀리 귀향 갔다가 세조가 천명에 응함에 공은 홍안처럼 멀리 날아 남산 아래 은거하더니 단종의 변을 듣고 백형 현감공이 또한 하양현감(河陽縣監)을 버리고 귀가하여 통울이 병이되어 몰하거늘 공이 제문(祭文)을 지어 통곡하되 조석으로 머리를 모아 말하되 생존을 도모하지 아니 하였다 하고 또 수양산(首陽山)이 어디 있나 아사(餓死)와 다름없다. 나도 곧 형을 따르리라. 하였으니 형제간에 일이 같고 마음이 같음을 볼 수 있다. 그 감절음 망경사
화견시와 손격제와의 왕복서와 계자설등제편은 시사를 통도하여 공의 뜻을 자술 함이니 다 혈충을 토로한 글이다. 은나라에 세 충신이 있으니 비간은 간하다가 주왕(紂王)의 노여움을 사서 죽고 미자는 제기를 안고 발길을 돌리고 기자는 거짓 광인이 되여 종이 되니 그 일은 서로 같지 아니하나 같은 것은 마음인지라 이러므로 공자께서 은나라 삼인(三仁)이라 하시니 공이 비록 자취를 감추어 자정 하였으나 그 마음은 곧 삼상과 육신의 마음이다. 오호라 세대가 멀고 언행이 인민 하여 나라의 사기에 기록되지 아니하고 집의 보첩에도 사적이 나타나지 아니 하여 문헌으로 고증할 수 없으므로 세인이 공을 알 길이 없고 자손 되는 자도 또한 조선의 덕을 알지 못하고 천양하지 못한 한탄을 면할 바 없더니 어찌 다행하게도 의곤(義坤)가에 대대로 비전해 오던 시렁위에 비밀히 간직한 묵은 상자 속에서 단란고지의 유문이 수백 년 뒤에 처음으로 나타나니 벽중의 서와 항두(航頭)의 문과 같은지라 이 또한 천명이라 하겠다. 공의 충성심과 의리가 다 이글에 있는지라. 이로서 세상에 전한 즉 옛날에 굴한 것이 금일에 피어지고 전자에 침회한 사적이 후자에 현양하리니 어찌 반드시 문적이 많아야만 하리요.
아! 황청산이 그 반드시 공의 마음을 밝게 하리라 뒤에 세조의 실기를 속편할 자는 반드시 남은공(南隱公)을 채택하여 이것을 도울 것이라. 남은(南隱)은 공의 호요,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인천채씨에 참의 륜(倫)의 따님이며, 다의당 귀하의 증손이라. 묘는 동국간좌(同局艮坐)에 있다. 사남 십사세손을 두었으니 맏에는 진원(震元), 다음에는 감원(坎元), 삼남에 간원(艮元), 끝에는 태원(兌元)이며, 증손에 시중은 문과 현감이요, 오세손(五世孫) 승준의 호는 경제며 효자로 참봉에 추천되었으며 임진난에 충익공 곽재우와 같이 의병을 일으키었으니, 이 사실이 임진록과 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 斥 姦 疏(척 간 소) : 엎드려 삼가 상소 하옵니다. 신은 고금의 치와 난을 보건데 치는 요순보다 더 성함이 없고 난은 걸주보다 더 심함이 없으나 그러나 군주가 독단함이 아니요. 신하와 함께 모의하니 신하가 현량하면 모의가 선할 것이요. 신하가 불현 하면 모의가 불선 하나이다 그런고로 요순도 스스로가 요순이 아니라 군자를 친근하여 요순의 덕을 이루었고 걸주도 스스로가 걸주가 아니라, 소인을 친근하여 걸주의 악을 조장함이니 사람을 가려 직책을 임명함을 어찌 신중하지 아니하리까 옛날에 동중서가 말하되 인군이 대위를 수수하는 그사이가
심히 두렵다 하였으니 이제 전하가 즉위하시고 저 불쾌한 수삼 무리가 전하가 유충하심을 틈타서 필연한 세력을 암암 중에 잠장하고 있으니 전하는 혹 살펴 아시나이까. 고어에 말하되 크게 간사함은 충성과 같다하니 대개 충과 간은 분간하기 실로 어렵나이다. 그러나 비유컨데 경중을 알고져 할진대 먼저 저울로 달 것이요. 시와 비를 알고서 알고져 할진대 먼저 사리로 참착할 것이니 인군이 인하고 신하가 충직한 사리로 행하면 가히 군자가 누구이며 소인이 누구임을 알 수 있을 것이요. 또 충신과, 간신을 인군이 대우여하에 좌우되나이다.
석에 예양이 범중행씨를 섬겨서 간신이 되고, 지백을 섬겨서 의사가 되니 이 어찌 허언이리까 차호라 선왕이 재세하실 때 집현전제신에 말씀하시되 짐이 천추 만세후라도 경들이 차아를 잘 보호하라 하시니 신이 비록 어질지 못한 사람이오나 역시 선왕 곁에서 듣고 지금 오히려 귀에 분명남아 있나이다. 엎드려 원하옵건데 집현전 제신을 심복으로 추천하고 고굉으로 총애하시면 현인은 조정에 다투어 이를 것이요. 간신은 자연 두려워 전율 할 것이니 이러한 즉 국가는 아무런 우환이 없나이다. 증자 말씀에 명주가 위에 있어 선과 악을 판시하고 예법으로
바로잡지 아니하면 백성이 어찌 금함을 알아 바른대로 돌아 가리요 하니 금일의급무는 인당의 난동을 제지하면 천하는 거의 반석과 같이 안전 하리이다. 무릇 왕족은 비록 번신이라 하나 주나라에는 관채의 난이 있어 주공과 같은 성인이 아니면 육형하기 어려웠을 것이며 한나라에는 오초의 변란이 있어 주아부의 역량이 아니면 누가 능이 평정 하였으리까 이것을 보건데 군병도 교양하지 아니할 수 없나이다. 가사불의의 변이 있을 때 전하의 성무로 더욱 분의를 가다듬어 결단하시면 하물며 훈련한 군사가 먼저 병사의 용맹을 연습하니 누가 죽음을 맹서하고 성열에 도모하지 아니 하리까 엎드려 원 하건데 전하의 명철한 지려로 잠시도 안침하지 마시고 오직 심상에 크게 관념 하소서 어진 재상을 선임하고 양장을 택함을 선무로 하사 난을 제거하여 정으로 돌이키면 저 불쾌한 무리들도 어찌 개과하지 아니하리까. 오직 전하의 조처 좌우에 있나이다. 신은 본래 먼 시골에 미천한 사람으로 외람하게 천은을 입어 대부직에 종사한지 이미 세월이 오래 이로데, 아직 시폐를 구제하는 한 말씀도 드리지 못 하와 황공 황공하나이다. 삼가 죽음을 무릎 쓰고 천정에 들리게 하노이다.(終)
 
2)서시복(徐時福)
호(號)는 용은(傭隱),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포항의 중양서원에 배향되었다.
 
3)서종(徐淙)
호(號)는 월봉(月峯),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포항의 중양서원에 배향되었다.

중양서원은 망월문(望越門)을 정문으로 하여 앞에 강당, 뒤에는 한 단을 높인 곳에 사당인 상충묘(尙忠廟)를 배치하여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보여준다. 강당의 좌측에 서재를 두었다. 사당의 좌측 뒤편에는 묘소가 있으며 산지에 터를 잡아 비교적 작은 규모이다.
 
1)사당
사당인 상충묘(尙忠廟)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집으로 공포는 초익공 구조이며 가구는 3량가이다. 방형으로 다음은 자연석 기단 위에 원형초석을 두고 원형 기둥을 얹었다. 사당의 전면에 평삼문을 두고 주위로 와편담장을 둘러 영역을 형성하였다.
 
2)강당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집이다. 공포는 이익공 구조이며 가구는 5량가이다. 방형의 자연석 기단에 항아리모양의 특수형 초석을 사용하였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온돌방 1칸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이며 전면에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강당의 앞에 솟을삼문을 두어 정문으로 사용하며 정문의 우측에 협문을 두었다.
 
3)서재
강당 앞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창건 당시에는 대칭으로 동재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서재만 남아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 되어 있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