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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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녹동서원(鹿洞書院)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585-1
   김충선(金忠善)
   1789년(정조13)
   
   춘추향사
   
임진왜란 때 경상도병마절도사 박진(朴晋)에게 귀화한 후 많은 전공을 세웠던 김충선(金忠善)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1789년(정조 13)에 건립하였다.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었다. 그 후 1885년(고종 22) 영남 유림과 김충선의 후손들이 합심하여 재건하였고, 1914년 다시 중건하였다. 1972년에는 서원의 규모가 협소하다고 하여 원래의 위치에서 100m 떨어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면서 증축하였다. 1998년에는 유물전시관인 충절당을 개관하였다.

1)김충선(金忠善)

시조(始祖) 모하당(慕夏堂) 김충선(金忠善)은 일본인(日本人)으로 본래 이름은 사야가(沙也可)였다. 무예를 닦아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오른팔, 가등청정(加藤淸正)의 부하 장수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가등(加藤)의 우(右) 선봉장으로 우리나라에 귀화, 사성김해김씨(賜姓金海金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그런데 널리 알려지기는 우록김씨(友鹿金氏)로 김해김씨(金海金氏)로 속칭하여 김수로왕(金首露王)을 시조로 하는 김해김씨(金海金氏)와 경주김씨(慶州金氏)에서 분적(分籍)한, 이른바 법흥파(法興派)인 김해김씨(경순왕 4자인 김은열공의 손자 계열과 조선조계유정난의 단종복위의 주동자이신 백촌김문기 8촌의 김춘계열인 김녕김씨 계열임)와 구별한다.

그 연유는 시조 김충선(金忠善)이 여러 공을 세워 김해(金海)로 사관(賜貫)된 데에 있다.

사성김해김(賜姓金海金)씨는 우리나라 여러 귀화성씨(歸化姓氏) 가운데 유일한 일본(日本)계 성씨다.

역사 이래 수많은 왜인(倭人)들이 선진문화국이자 원래의 조상(祖上)나라이기도 한 한국(韓國)을 우러러 귀화(歸化)해 왔지만 왜인(倭人)조상을 내세우고 독자의 가문을 창립하지 않은 탓이리라.

올해로 귀화 418년만인 사성김씨(賜姓金氏)는 그들을 한국인으로 만들어준 시조(始祖)를 지극한 정성으로 모시며 그의 가르침을 따라 충효예의(忠孝禮義)의 한국인(韓國人)상을 어느 토착성씨(土着姓氏) 가문(家門)보다 더 잘 보여주는 한국인(韓國人)으로 깊이 뿌리내려 꿋꿋이 살아가고 있다.

시조(始祖) 김충선(金忠善)은 폭력과 궤계(詭計)로 일본(日本)을 통일(統一)한 풍신(豊臣)이 대륙침략의 야욕(野慾)을 터뜨려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킬 때 21세 나이로 가등(加藤)의 선봉장이 되어 3천 병력(兵力)을 이끌고 4월 13일 부산(釜山)에 상륙했다.

동래(東萊)에 상륙한 지 1주일만인 4월20일 경상좌우병사(慶尙左右兵使) 김응서(金應瑞), 박진(朴晋) 등에게 몰래 글을 보냈다.

“내가 비겁하고 못난 것도 아니요, 나의 군대(軍隊)가 약한 것도 아니나 조선(朝鮮)의 문물(文物)이 일본(日本)에 앞서 있고 학문(學文)과 도덕(道德)을 숭상하는 군자(君子)의 나라를 짓밟을 수 없어 귀순(歸順)하고 싶다.”

김충선(金忠善)은 총(銃)을 돌려 조선(朝鮮)의 장수가 되어 울산(蔚山), 경주(慶州), 영천(永川) 등지에서 왜적(倭敵)을 무찔렀다.

아군에 화포와 조총이 없음을 보고 화포(火砲), 조총(鳥銃) 만드는 법과 사격술을 진중에 보급, 왜적(倭敵)을 서생포(西生浦)(지금의 경남 蔚州郡 西生面)로 내쫓아 마침내 18개 왜성(倭城)을 탈환하게 됐다. 그의 역전의 무공(武功)과 충정에 감복한 선조(宣祖)임금은 친히 그를 불러 “바다를 건너온 모래(沙)를 걸러 금(金)얻었다”며 뜻을 살려 김해김씨(金海金氏)의 성(姓)과 충선<忠善>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원래의 김해(金海) 김씨(金氏)와의 혼돈(混沌)을 피하기 위하여 사성김해김씨(賜姓金海金氏)로 칭하면서도 호적에는 아직 김해김씨(金海金氏)로 올라 있는 연유이다.

7년전쟁이 끝난 뒤 김충선(金忠善)은 나이 30세에 진주목사(晋州牧使) 장춘점(張春點)의 딸을 아내로 맞아 우록(友鹿)골에 터를 잡았다.

선조 36년(1603년) 북방(北方)에서 여진족이 국경(國境)을 어지럽히자 그는 국경(國境)방어를 자청, 10년간 잉방소(仍防所)를 지키다 물러났고 1624년 이괄(李适)의 반란 때는 또다시 출정해 이괄(李适)의 부장(副將) 서아지(徐牙之) 왜병장(降倭將)를 목베어 평정에 공(功)을 세웠다.

그 공(功)으로 사패지(賜牌地)(지금의 대구주변 6개군)을 조정(朝廷)에서 내렸으나 굳이 사양하고 수어영(守禦營)에 넘기어서 둔전(屯田)으로 쓰게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다.

자신이 10년간이나 지켰던 북방(北方)이 일시에 오랑캐들의 말 발굽에 허물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66세의 김충선(金忠善)은 분연히 노구(老軀)를 일으켰다.

의병(義兵)을 모아 경기도 광주(廣州)의 쌍령(雙嶺)에 150명의 병사를 매복시켰다. 연전(連戰) 연승(連勝)에 도취된 호병(胡兵)에 조총(鳥銃)을 퍼부어 그 시체가 시산시해(屍山屍海)를 이루었다.

호병(胡兵)의 코를 베어 전대에 담고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달리던 중 인조(仁祖) 임금이 이미 청장(淸將) 용골대(龍骨大)에게 화평(和平)을 청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예의(禮儀)의 나라 군신으로서 어찌 오랑캐 앞에 무릎을 꿇는단 말인가.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도 이제 끝이 났구나.” 그는 땅을 치며 통곡(痛哭)했다.

모하당(慕夏堂) 김충선(金忠善)은 1642년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벼슬은 정2품 정헌대부지중추부사(正憲大夫知中樞府事),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인 金敬元(上護軍,贈戶曹判書), 金敬信(贈工曹參判), 金佑祥(上護軍), 金繼仁(副護軍), 金敬仁(贈吏曹參判) 등 5형제가 모두 벼슬길에 나서 초기 가문(家門)의 기틀을 다졌고 김경원(金敬元)의 둘째 아들 진영(振英)은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참찬관(參贊官)에 올랐고 그중에서도 金振傑(漢城府左尹,副摠管), 金汝奎(工曹參判), 金汝采(知中樞府事), 金汝明(嘉善大夫), 金養玉(知中樞府事), 金汝明(折衝將軍),金五南(嘉善大夫), 金汝達(知中樞府事), 金龍河(通政大夫軍司馬), 金儀奉(嘉善大夫) 등이 벼슬을 하였고,4세 김여삼(金汝三)은 조모(祖母)가 죽자 삼정산(三頂山) 유택(幽宅)에 초막을 치고 3년간 시묘(侍墓)를 극진히 하여 그 행적이 효행록(孝行錄)에 기록돼 있고 오늘날 후손들은 그래서 삼성산(三聖山)을 시모산(侍母山)으로도 부르고 있다.

외삼문인 항양문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인 숭의당(崇義堂)이 위치하고 있다. 강당 오른쪽으로 내삼문에 둘러싸인 사당 녹동사(鹿洞祠)가 자리하고 있으며 강당 오른쪽, 내삼문 앞에는 비석이 1기 있다. 강당의 오른쪽에는 1998년에 개관한 유물전시관 충절당이 있다.

중요물건

1998년에 개관한 유물전시관인 충절당에 소장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으며, 

참고-한국국학진흥원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