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도응유(都應兪, 1574~1639)
조선 중기의 학자·의병장.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해보(諧甫), 호는 취애(翠厓). 아버지는 원량(元亮)이다.정구(鄭逑) ‧ 서사원(徐思遠)의 문인이다. 선조대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최영경(崔永慶)을 구호하고 오현(五賢)의 문묘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611년(광해군 3)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을 배척하자 그 잘못을 반박하였고, 박이립(朴而立) 등이 정구를 모함하자 상소하여 스승의 억울함을 해명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에 의병을 일으켰으며, 1627년 정묘호란에는 소모장(召募將)이 되어 정경세(鄭經世)를 도왔다. 주리파(主理派) 성리학을 강조하여 경험적 세계의 현실문제·사회문제보다 도덕적 원리에 대한 인식과 그 실천을 중시하였다. ≪오현예설 五賢禮說≫을 편찬하였다. 대구 병암서원(屛巖書院)에 봉향되었다.
2)도경유(都慶兪, 1596~163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내보(來甫), 호는 낙음(洛陰). 정구(鄭逑)·서사원(徐思遠)·손처눌(孫處訥) 세분선생의 문인이다.
1624년(인조 2) 사마시에 합격하고 정묘호란 때 호남으로 세자를 호종하였으며, 난이 끝난 뒤 금부도사·평양서윤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경상도관찰사 심연(沈演)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쌍령전투(雙嶺戰鬪)에서 쌓아놓은 화약의 폭발사고로 패전하였다.
그 죄로 유배갔다가 잠시 뒤에 잘못 집행되었음이 드러나 풀려나서 귀성도중에 원인(怨人)의 위해로 사하였다. 뒤에 이 화약폭발사고가, 그의 비장 박충겸(朴忠謙)(전시의 군율에 의거 참수된 자) 아들이 화풀이로 한 소행임이 밝혀져 좌승지로 추증되었다. 대구의 병암서원(屛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는 ≪낙음집 洛陰集≫ 6권 2책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