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백인관(白仁寬 1341~1421)
여말(麗末) 문신․학자. 본관(本貫)은 수원(水原), 자(字)는 사달(士達), 호(號)는 선정(禪亭) ‧ 고려 정남대장군(正南大將軍) 휘길(諱吉)의 후(後)요 평장사수원군(平章事水原君) 휘휘(諱揮)의 칠세손(七世孫)이라 고조(高祖)의 휘(諱)는 원태(元泰) 호(號)는 묵암(黙庵)이니 이부시랑(吏部侍郞) 국자좨주(國子祭酒) 세자사부(世子師傅) 수파부원군(水坡府院君)이니 시호(諡號)는 충정(忠正)이요 왕부(王父)의 휘(諱)는 천뢰(天賚)요 호는 학탄(鶴灘)이니 평장사(平章事)에 이르고 고(考)의 휘(諱)는 존유(存儒)며 중서성(中書省) 상장군(上將軍)이시다.
공이 고려충혜왕 2년 신사(辛巳)에 생(生)하여 공민왕 십17년 무신(戊申)에 생원으로 등제하여 관직이 이부전서(吏部典書) 집현전(集賢殿)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공의 강의방직(剛毅方直)과 문장덕행(文章德行)이 조야(朝野)에 유명하되 여조말기(麗朝末期) 혁명 하는 때를 당하여 조정의 풍기가 문란하므로 공이 양친을 모시고 수원 벽처산곡(僻處山谷)에 낙향하여 자경자식(自耕自食)하며 정성(定省)의 절(節)과 감지(甘旨)의 공(供)이 한가지로 예(禮)에 어긋남이 없었다. 당시에 유명한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과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도의의 교분이 있어서 경의(經義, 經書의意義)를 강론하되 주야를 불문하고 힘써 행하여 갑술년(甲戌年)에 이르니 공의 연령이 54세였다. 하루는 모정부인(母貞夫人)의 병환이 위중하여 혈지회생(血指回生)한 지 수일 만에 상사(喪事)를 당하여 애통함이 예절이 넘치게 하고 여묘(廬墓) 살기를 3년간을 다하다 태종(太宗) 2년 임오(壬午)에 세 번이나 초치(招致)하였으되 끝내 출사(出仕)하지 아니하고 선주(善州)에 들어가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같이 은거하기를 수년 또 대구 노노곡(魯老谷)으로 이거(移居)하니 노곡(老谷)은 공이 노후은거(老後隱居)하므로 인하여 이름한 것이다. 노곡산상(老谷山上) 평탄(平坦)한 곳에 가옥 수동 구축하고 현판을 선정(禪亭)이라 써 부치니 이것은 생각건대 조용하고 한적(閒寂)한 의의를 취(取)함 인 듯하다. 세종 3년 신축(辛丑)에 정침(正寢)에서 졸(卒)하시니 향년이 팔십일이라 부음(訃音)이 조정에 들려 정헌대부(正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증직(贈職)하였으나 공의 원함이 아니러라. 대구 서중면(西中面) 노노촌(魯老村) 서록임좌원(西麓壬坐原)에 장사지내고 일향(一鄕)이 칭송흠모하여 대구 장기동에 화암서원을 창건하여 향사(享祀)함이라.
2)백문연(白文連 1502~)
본관(本貫)은 수원(水原), 자(字)는 장숙(長叔), 호(號)는 노암(老庵)
관(官): 찰방(察訪) 증(贈) 통정대부(通政大夫) 예조참의(禮曹參議)
3)백용채(白龍采 1735~)
본관(本貫)은 수원(水原), 자(字)는 윤택(潤澤), 호(號)는 금암(錦庵)
독지호학(篤志好學) 향칭(鄕稱) 선사(善士)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