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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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청호서원(靑湖書院)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271
   손조서(孫肇瑞) 손처눌(孫處訥) 유시번(柳時藩) 정호인(鄭好仁)
   1685년(숙종 11)
   
   음력 8월 하정(下丁)
   
이 서원은 1685년(숙종 11)에 손처눌(孫處訥)을 추모하기 위해 사우로 창건되었는데, 1694년(숙종 20)에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731년(영조 7)에 소실된 것을 1732년(영조 8)에 중건하였으며, 1755년(영조 31) 손처눌의 고제인 유시번(柳時蕃), 1795년(정조 19)에 정호인(鄭好仁)과 손처눌의 6대조인 손조서(孫肇瑞)를 추가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이후 1930년 경 강당을 건립하였으나 1971년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이듬해인 1972년에 강당과 상인사(尙仁祠)를 중건하고 서원 입구에 유허비를 세웠으며, 1981년에 중수하였다. 서원의 입구에 있는 모당선생유허비(慕堂先生遺墟碑)는 일제 때 의병장이던 김도화(金道和)가 지은 것이다.

1)손처눌(孫處訥, 1553~1634)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일직(一直). 자는 기도(幾道), 호는 모당(慕堂). 할아버지는 현감 치운(致雲)이다. 성주(星州) 출신.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장현광(張顯光)·서사원(徐思遠)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과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왜군과 투쟁하려다가 친상을 연이어 당하여 실행하지 못하였다. 임진왜란 후 향교의 재건에 앞장서서 후진양성에 노력하였고, 정인홍(鄭仁弘)의 이황(李滉) 배척에 대항하여 척사부정(斥邪扶正 : 사악함을 물리치고 바르고 옳은 것을 세움)의 글을 지어 도내사림을 규합하기도 하였다.

공은 유년부터 천자(天姿)가 크게 뛰어나서 총명강기하여 날로 수천언을 誦(송)하드라. 14세에 친명으로 계동전공 경창문에 취학하니 계동은 곧 退陶淵源(퇴도연원)이다.

19세에 外舅(외구) 송암이공 장례시에 한강 정선생을 배알하고 구도할것을 心定(심정)하고 檜淵(회연)과 泗水之間(사수지간)에 출입, 50여년에 지성으로 服師(복사)하니 정선생은 항상 익우로 대하였다.

교우는 낙재 서사원, 여헌 장현광, 우복 정경세, 금간 조정서선생과 緊切(긴절)하였다.

임진왜란(1592)에 선생이 팔공산 창의에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군무에 전념하든중 친상으로 재임 8개월에 의병대장을 해임하였다.

정유재란(1597)에 다시 의병대장이 되어 방백이공용순에 군무 7조를 書陳(서진)하니 사기는 충분의격하고 條列(조열)은 해박심유하였다. 시년 9월에 달성하에서 왜적을 대파하니 방백 한유천준겸이 훈공을 조정에 알리려고 하거늘 선생이 강력하게 사양하였다.

광해 을묘(1615)에 영모당에서 문회를 대설하고 제생강학규약을 정하여 매월삭에 통강하니 강록에 재록된 제자가 202명이다.

선생이 시월로 위시하여 고종일에 이르도록 후진교육에 일심불권하였으니 명현과 달사가 다 선생문하에서 배출되었다.

林下(임하)에서 선생이 연세와 덕망이 점점 높아짐에 방백과 지주가 시시로 존문드리러 오고 일대명현이 선생을 방문하여 혹 강론하고 혹 觴詠(상영)하니 문풍이 진작하였다.

그후 인조갑자(1624)에 이괄의 반란과 정묘년(1627)호란에도 의병대장으로서 초야의 충성을 다 하였다.

선생이 난중에 양친상을 당하시어 예를 미진하였다고 한이 되어 황청동 송추아래 영모당을 건립하고 종신토록 廬墓(여묘)하려고하니 문인들이 선생을 모당선생이라 칭호하드라. 이해 원조부터 일기를 닦아 천년이 다 하는 날에 절필하니 일기가 7권에 이르렀고 세상이 春秋筆法(춘추필법)이라 하였다.

조석으로 성묘하고 영모당에서 諸生(제생)을 더부려 강론하니 사방에서 원학자가 모여 들어 동서에 협실을 지으니 동은 山澤齋(산택재)라하고 서는 風雷軒(풍뢰헌)이라 하였다.

墳鶴庵(분학암)을 중수하고 望思庵(망사암)을 신축하고 動鶴庵(동학암)을 수리하여 학도를 수용하고 儈徒(쾌도)로 供飯(공반)케하고 梧野書室(오야서실)을 지어 강론경학을 하였다.

정인홍이 매퇴양선생을 毁詆(훼저)하여 문묘종사를 반대하거늘 선생이 분통함을 참을수 없어 佗冑(타주)에 비하여 부정척사문을 지어 수선도내에 통고하니 인홍은 權奸(권간)하니 시인이 화기를 우려하니 선생은 태연하게 천의에 맡기고 행장을 갖추어 대기하노라 하고 시를 지어 굳은 의리를 示意(시의)하였다.

인조정묘(1627)6월에 선생을 위하여 연경유생이 영모당에서 壽酌(수작)을 베푸는데 방백하담김공시양과 지주 설죽조공이 동회하혔고 익년4월 팔공산 淸遊(청유)에 문인과 연경유생이 선생을 위하여 藍輿(남여)로 호행하니 종자 70여인이었다. 갑술에 선생이 82세이다. 입춘일에 시를 지어 술회하고 유월삭일에 성묘한 후 망사암에서 강학하고 귀화한 몽사를 제생에게 이르고 自輓詩(자만시) 일수를 지었다. 이달 15일 의관을 정재하고 좌우명과 箴戒(잠계)를 읽은 후에 문생과 제자에게 방실을 命掃(명소)하시고 자리와 枕衾(침금)을 바로하고 홀연히 서거하였다.

9월에 사림이 會葬(회장)하니 400여인이요 挽詞(만사)와 祭文(제문)이 200여폭이다.

遺文(유문)2책과 永慕堂通講諸子錄(영모당통강제자록) 1책은 세상에 公諸(공제)되었고 喪祭禮纂(상제예찬)과 警世論경세론)과 만제 200여폭은 佚失(일실)되여 전하지 못하고 있다.

병자(1636)8월 선생담일에 사림과 문생이 公享(공향)할 것을 의정하였고 숙종을축에 祠宇(사우)를 유허에 건립할 시 시초에 오야로 정한 바 있으니 영모당은 선생40년강학지소라하여 황청동으로 정하였고 갑술(1694)에 위판을 청호서원으로 봉안하였다.

방금이후 경오(1930)년에 청호서원을 건립하여 유림이 修稧(수계)하여 오든중 신해(1971)년 대회일에 실화로 소멸되고 임자추(1972)에 사림공의로 사우를 건립하여 復享(복향)하니 규모와 체제는 서원에 변함이 없고 혜산 청호 양원하다.

 

2)류시번(柳時藩, 1569~1610)

선생의 휘는 시변(時藩)이요 자는 위중(衛仲)이며 호는 사월당(沙月堂)으로 문화(文化)인이다.

선조 기사년 1569년에 태어났고 인조 경진년 1640년에 졸하셨으니 향년 72세이다.

9세에 괴헌(槐軒) 곽선생에게 소학을 수업했는데 곽선생이 그 청명함에 놀랐다 한다. 한강(寒岡)정선생과 낙재(樂齋) 서선생, 여헌(旅軒) 장선생, 모당(慕堂) 손선생에게 사사하였다. 과거시험에는 일체 응시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여 모당 손선생과 청호서원에서, 또 만년에는 사월당에서 많은 후학을 양성하였다.

학식이 탁월하고 성품이 너그러워 당시의 사림들이 추앙하였는데 문장과 학덕으로 달성십현으로 ≪달성지(達城誌)≫ 덕행록에 기록되어 있다. 영조 을해년 1755년에 사림들의 공의로 청호서원에 배향되었다. 유집(遺集) ≪사월당문집≫과 대구광역시 동구에 월천재(月川齋 ;사월당)가 있으며 후손 천여세대는 대구 동구와 전남 구례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3)정호인(鄭好仁, 1597~165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자현(子見), 호는 양계(暘溪). 할아버지는 의병장 세아(世雅)이며, 아버지는 안번(安藩)이다. 장현광(張顯光)을 사사하였으며, 문장과 재행(才行)이 탁월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27년(인조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향리에서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도왔다. 1637년 이후 1654년까지 여러 고을의 수령으로 임명되었으나, 때로는 부임하지 않기도 하였다.

벼슬은 진주목사에 이르렀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에는 간단한 고리짝과 서책 몇 권이 행장의 전부였을 정도로 청빈하였으며, 만년에는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저서로는 ≪양계문집≫이 있다.

 

4)손조서(孫肇瑞, 1412~1473)

휘는 조서 자는 인보 호는 면재 또는 격재 정평공의 현손이며 진성현감 관의 맏아들로 태종12년(1412) 일직 송리에서 출생하여 밀양 용평리 증벌촌에서 성장하다. 몰은 성종4년 계사(1473)享(향)61세.

세종14년(1432) 20세에 진사시에 합격 동 17년(1435) 23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감찰, 병조정랑을 거쳐 집현전학사로 박팽년,성삼문 제현과 함께 한림원에서 함께 계시다가 단종원년(1453)외직으로 옮겨 봉산군사로 재임중에 세조2년(1456) 성삼문등이 단종임금의 복위를 꾀하다가 순절하자 결연히 벼슬을 던지고 환향하시다.

세조는 공의 高忠學德(고충학덕) 을 기용코자 누차 召官(소관)하였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하고 학문에 힘써 경전에 깊이 통하고 시문에 능했으며 도학이 깊어 <心經衍義심경연의><近思錄衍義근사록연의>를 지었고 김굉필,정여창 등 거유들이 공에게 師事(사사)하셨고 문장,학문으로 점필재와 아울러 일컬을 만큼 당대의 거벽이었다. 옛 임금 단종을 사모하여 충절에 命(명)을 바친 예벗(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등)들을 슬퍼하여 未死人(미사인)으로 자처하면서 원근에서 많은 선비들이 가르침을 청하여 찿아 들었으나 공은 한결같이 사양하여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어 비분강개로 생애를 지웠다.

年來袍笏己還君(연래포홀기환군)

高臥何嘗夢五雲(고와하상몽오운)

이는 공의 높은 절개를 기려 점필재가 공에게 보낸 시의 한귀다.

정조24년(1800)임금이 예조에 명하여 본도 관찰사에게

「… 翰林孫肇瑞 卓卓名節 可稱而何不入人物條 詳細懸注也(…한림손조서 탁탁명절 가칭이하불입인물조 상세현주야 : 손조서는 드높은 명망과 절조가 있어 일컬을만한데 어찌하여 인물조에 올려 상세히 주를 달지 않는가.) 라는 諭示(유시)를 내렸으며 순조12년(1812)이조참의,兩舘提學(양관제학)에 증직됨과 함께 그 자손에게 잡역을 면제하게 했다.

뒤에 가선대부 이조참의겸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 예문제학 세자좌빈객 오위도총부도총관 행통정대부 집현전 한림학사에 추증되었다.

俎豆(조두)는 밀양 혜산 대구 청호 兩院(양원)하여 請謚䟽首 (청익소수)는 진사 정경선생이 짓고 문집서문은 구와 김선생이 서하였다.

유집 4책이 있었으나 병화에 유실되고 1권이 전하고 있다.

청호서원은 사당과 강당이 병렬로 배치된 형태를 띄고 있으며, 사당의 경우 강당의 동측에 위치하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사우인 상인사(尙仁祠)와 내삼문, 이 서원의 강당 부교당(敷敎堂), 전사청과 외삼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우(祠宇)인 상인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에 맞배지부에 민도리 양식이며 측면에 풍판을 달았다. 손처눌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유시번과 정호인, 손조서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부교당은 서원의 강당으로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규모에 팔작지붕에 홑처마이다. 민도리 양식이며 굴도리를 사용하였다.유생들이 각종 행사 때 강론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전사청은 사당의 내삼문 서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맞배지붕이다. 그리고 외삼문으로는 현판에 ‘집의문(集義門)’이라 쓰여있는 정면3칸, 측면1칸의 외삼문이 있다.

유물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 때의 일기 등 많은 서적이 있다. 서원의 입구에는 일제 때 의병장이던 김도화(金道和)가 지은 모당선생유허비(募堂先生遺墟碑)가 있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