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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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영산서원(英山書院)-미복설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현리
   이황(李滉), 김성일(金誠一)
   1577년(宣祖10)
   1694년(숙종 20)
   
   미복설(복원예정)
영산서당은 1577년(宣祖10) 9월에 그 당시 청기면 초동(椒洞 현 靑杞面)에 일시 우거하던
진사 청계((靑溪) 김진(金璡)선생이 이 향내 노소인사 수십 인으로 더불어 주창하고 발기하여 창설하게 되었다.

그 당시 발기인은 김진(金璡) 김호(金虎), 남문성(南文成), 오시준(吳時俊), 남필성(南弼成), 남천수(南天授) 김응현(金應鉉), 오익수(吳益壽), 남천흥(南川興), 오민수(吳敏壽) 정홍(鄭洪), 남윤조(南胤曺), 권응우(權應虞), 남경(南璟), 조광인(趙光仁),조광의(趙光義)등 16인이 각자 곡물 2곡(1斛은 10斗)을 출자하여 그 곡식을 해마다 장리로서 거두어서 장차 서당을 창설코자 하였는데, 청계공(靑溪公) 김진(金璡) 선생은 영양이 영해부(寧海府)에 속하여 인구가 적고 풍속이 미개하여 향풍과 예문이 뒤떨어진 것을 느끼고 타향인데도 불구하고 곡물을 15곡을 회사하여 영산서당 건립에 많은 공적을 남기었다.

그러나 그 곡식을 가지고는 서당을 건립할 수가 없어서 매년 향회를 열고 곡물을 거두었는데 이듬해 거둔 곡식이 18석 4두 6승이라 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해 추가로 권성(權誠), 남국간(南國幹), 박봉서(朴鳳瑞), 이귀승(李貴承), 남사문(南士文), 남사명(南士明), 남인록(南仁錄)등 7인이 가입하였다. 그 후 1637년에 서당 향회(鄕會)를 열고 서당창설취지와 향풍개선을 위한 강령을 다음과 같이 정하고 죄과(罪過)의 경중(輕重)에 따라 처벌하여 기강(紀綱)을 세웠다, 부모불효 형제불화(父母不孝 兄弟不和), 붕우불신 능만장상(朋友不信 凌慢長上), 비방토주 사비보상(誹謗土主 私費寶上), 이렇게 매년 향회를 열어 상호강신과 곡물의 출납을 하였으며 1638년에 서당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이 때 청계선생이 필목(명과, 삼베) 등 15필(1필은 40자)을 영산서당에 기증하였다. 그 해 서당을 세우게 되었는데 위치는 영산하로서, 영양읍내의 우편이었다고 전하는데 현재 현1동(縣一洞)이 아닌가 생각된다. 서당을 창설한 후 7년이 지나서 청계선생의 장자인 김극일(金克一)과 권춘계(權春桂), 구찬조(具贊祚), 오극성(吳克成; 吳敏壽의 子)등 4인이 추가로 가입하여 부자간에도 서당건립에 참여하였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1592년(宣祖25)에 뜻하지 않은 임진란이 일어나자 국사가 어지럽고 인심이 흉흉하여 사람들이 흩어지는 바람에 자연적으로 10여년 간은 향회와 학도의 수업이 1602년(宣祖35)까지 중단되었다.

그 때의 서당 규모는 방과 마루, 부엌방 창고, 오양간까지 지었으며 규모가 상당히 컸다. 서당은 처음에는 훈장을 두었다가 차차 학도의 수와 재정 형편이 좋아져서 교관 또는 교수를 두어 당사(堂舍)에서 기거(起居)하고 학자들이 담당하여 가르치니 곡식과 의복을 공급하고 숙직을 두고 사역(使役)에 충당하였다. 이것은 그 당시의 서당의 규모와 학도의 수가 많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매년 춘추로 향회를 열어 그 비용은 보상곡(寶上穀:창설자가 낸 곡식) 의 취리를 거두어서 강회시 훈장(訓長)의 요식미(料食未), 말의 사료대. 기타 제경비 들을 지출하고 유사(有司)를 두어 매년 교대하면서 서당 살림을 살았다.

그 후 1655년(孝宗6)에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선생이 당장(堂長)으로 있을 때, 시인 백운자(白雲子), 권상일(權尙逸) 선생이 학관(學官)으로 있었던 일도 있다. 그 때 석계선생은 문풍조성과 사자양성(士子養成)에 힘을 써서 향내 유림과 더불어 영산서당을 서원으로 승격시킬 것을 주창하여 1655년(孝宗6)에 서원으로 승격 되었으나 1871년(高宗 8), 대원군의 서원철거령에 의하여 철거되고 지금은 서당과 서원의 옛 터만 현 1동에 있다.

영산서원은 1638년에 세운 영산서당을 1655년(孝宗6)에 석계 이시명 선생이 당장(堂長)으로 있을 때 서당을 서원으로 승격 시킬 것을 주창하여 서원이 되었다. 그 때 영산서당을 일부 수리하고 후면에 묘우(廟宇)만 새로 세우고 서당은 종전의 것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 때 영산서당에 보관된 서적, 재산까지 서원으로 인계하였으며, 숙종 20년에 사액(賜額: 임금이 서당 이름을 지어준 것) 하였다. 그러나 서원으로 승격된 뒤에도 종전과 같이 춘추로 강신(講信)하였지만, 학자의 춘추 혹은 삼동 강학(講學)과 매월 초일일 강회(講會)는 종전보다 규모가 커졌다. 서원에 유사(有司) 또는 원임(院任), 원장(院長)을 선임하여 강회 때에는 반드시 성주(城主:현감)와 교관(敎官) 또는 학우의 강관(講官)으로 유사(有司)와 같이 회합,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 등을 강론하여 그 뜻과 비결을 배웠다.

본군에는 복현될 때까지 향교가 없었으므로 향내 선비들의 수학처(修學處)로는 영산서원 뿐 이었으나, 숙종 9년에 복현이 되고 영산하에 관아를 영건하고 객사를 신축할 때 건물이 퇴락하므로 부득이 현동으로 이건하게 되었다. 이건한 연대는 상고(詳考)할 수 없으나 복현한 1683년(숙종9)에 서원으로 승격한지 28년째이니 이때를 전후하여 이건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새로 세운 서원은 마루와 행랑채가 훨씬 넓고 시장과 떨어졌으며 배산임수(背山臨水)하고 앞에는 층암절벽의 경치가 있으며 강이 있어 학도(學徒)의 수양과 공부하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이 서원에는 주향(主享)으로 문순공(文純公)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종향(從享)으로는 문충공(文忠公)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로 향사를 지냈었다. 퇴계선생은 주자학을 집대성한 우리나라의 성리학자인 대유학자이며 학봉선생은 영산서당 창건에 공헌한 청계(淸溪) 김진(金璡)선생의 4자로서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일본에 수신사의 부사로 갔던 학봉 김성일선생이며 퇴계 선생의 수제자이다. 이 서원에서는 두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享祀)를 지내 내려오다가 1871년(高宗8)에 대원군 서원철거령이 공포되어서 철거되어 현재는 옛터만이 남아있어 서원터라 전해 내려오고 있다.
참고문헌: 영양군지


1)
이황 (李滉 ; 1501~1570)
도산서원 참조
 
2) 김성일 (金誠一 1538~1593)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본관은 의성, 호는 학봉(鶴峰), 자는 사순(士純)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 시호는 문충공 서애 류성룡과 함께 퇴계의 학문을 이어받은 수제자로 임진왜란 때 초유사로 순절하였다. 안동에 자리한 학봉종택은 안동의 대표적인 양반가옥의 전형으로 유명하다.
1562년 승려 보우(普雨)의 말에 따라 문정왕후가 희릉(禧陵)을 옮기려 하자, 유생의 신분으로 이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지었다. 1564년 진사시, 1567년 대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부정자에 임명되었다.
이후 정자·대교·봉교 등을 역임하고, 1572(선조 5)에는 상소를 올려 사육신을 복관시키고 종친을 등용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1573년 전적·수찬 등을 시작으로 병조좌랑·이조좌랑 등의 요직을 거쳐, 1577년 종계변무를 청하는 사행(使行)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왔다. 사행 길에 요동에서 정학서원(正學書院)을 방문하여 중국 선비들과 학문하는 목적을 놓고 토론하였다.
1579년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어 시사를 과감하게 비판하고 종실의 비리를 탄핵하여 대궐의 호랑이[殿上虎]’라는 별명을 얻었다. 1579년 함경도순무어사가 되어 영흥·함흥·삼수·길주·명천 등의 고을을 순행하면서 민정을 살피고 수령들의 근무태도를 점검하였다. 1583년 특지로 나주 목사가 되어 도내의 민폐를 해결하였다. 당시 김여물이 순무어사로 나주에 파견되어 민가에서 술을 마시고 밤에 관아로 오자, 그를 꾸짖고 문을 열어주지 않는 강직함을 보였다.
1589년 의정부 사인으로 있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보낸 겐소(玄蘇소 요시토시(宗義智-혹은平義智라고도 불림) 등과 일본과의 통호문제를 의논하였고, 15891118일 일본 사정을 탐지하려고 파견된 조선통신사 행에서 부사(副使)로 임명되었다. 15903월 일본에 들어간 직후부터 정사 황윤길(黃允吉) 등과 관백(關伯)에게 예를 표하는 절차를 놓고 심한 의견 대립을 보였는데,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국왕이 아니므로 왕과 동일한 예를 베풀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1590년 일본에 갔던 통신사 일행이 이듬해 돌아와 한 보고는 서로 상반된 것이었다. 각처에서 활약하던 일본의 무사들을 정리하고 중앙집권화를 이루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선조가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고 정탐을 위해 사람을 보냈는데, 조선에서 정탐꾼이 파견된다는 보고를 듣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경계와 검문을 강화하자 선조는 공식적인 사절단을 파견한 것이었다.
이때 통신사 중 정사는 서인인 황윤길이었고 부사는 동인인 김성일이었다.1591년 음력 2월 부산에 돌아와 각기 조정에 상소를 올릴 때, 황윤길은 반드시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고, 김성일은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또 풍신수길의 인상을 묻는 선조의 질문에, 황윤길은 '눈 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이라고 평하였고, 김성일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그의 눈은 쥐와 같아 마땅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류성룡이 김성일에게 "그대가 황윤길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후일 병화가 있다면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김성일은 다음과 같은 말로 무마하였다.
"나도 어찌 왜적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불안에 휩싸일까봐 그런 것입니다."
이와 같은 김성일의 보고에 서인 황윤길을 비롯해, 조헌 등이 기필코 왜적이 침입할 것리고 주장하였지만, "(西人)들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인심을 요란시키는 것이다"라고 매도 하여 배척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이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 볼 때 당시 김성주 등의 동인이 정국을 주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발언 때문에 후일 안방준(安邦俊) 등에 의해 왜란을 불러온 장본인으로 매도되었고, 왜란 초에 파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발언이 일본이 틀림없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장담한 황윤길의 발언으로 인하여 민심이 혼란해지는 것을 완화하려는 의도였다고 해명하였다.
실제 황윤길의 발언이 있은 직후 조정은 각지에 성을 쌓고 장정들을 징집하는 등 급작스런 대비책을 강구하였는데, 이는 당시 민심을 상당히 동요시켰다. 이에 상소를 올려 오늘날 두려운 것은 섬나라 도적이 아니라 민심의 향배이니, 민심을 잃으면 견고한 성과 무기가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여 내치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직후의 음력 628일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김성일을 비꼬며, 그 정도(징후 운운) 이상의 말을 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김성일은 통신사로서 일본에 갔다가 막 돌아와서, “왜적들이 틀림없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지혜가 미치지 못한 바가 있어서 그러했던 것인가. 동시에 사신으로 갔던 황윤길(黃允吉) · 허성(許筬) 같은 사람은 왜적들이 틀림없이 쳐들어올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왜적들이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보장하기 어렵다고 하기도 하였는데, 김성일만이 유독 왜적들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괴이하다."[3]
임진왜란의 상이한 보고에 대해 붕당정치의 폐해라는 인식이 많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선조 당시에는 아직 붕당이라는 개념이 그리 심각하지 않은 수준이었고 학봉 김성일의 경우 오히려 서인의 억울한 누명을 풀어주기 위해 임금 앞에서 직언을 하였다(단종 복위를 위해 단종 사후 100년이 넘은 당시에 최초로 직언을 하기도 하였다) 일본에서의 통신사 이야기도 여기에서는 자세히 쓰고 있지 않으나,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기 전 몇개월 동안이나 기다리면서도 정사인 황윤길과 서장관 허성이 두려움이 앞서 말을 꺼내지 못할 때도 부사 김성일 만이 만남을 독촉하였고, 최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만한 답서에 대해서는 부사 김성일 만이 이의를 제기했다 한다. 지금도 통신사가 묵었던 곳에 부사를 기리는 비석이 남아있다.
어전 회의에서 정사 황윤길은 "앞으로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옵니다."라고 일본의 침략을 예고하였으나, 부사 김성일은, "전혀 그러한 조짐이 없었사옵니다."라고 상반된 대답을 하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인상을 묻는 질문에도 황윤길은, "눈에 광채가 있고 담략이 남달라 보였사옵니다."라고 한 대 비해 김성일은 "눈이 쥐와 같고 생김새는 원숭이 같으니 두려울 것이 못 됩니다."라고 다르게 대답하였다.
 
김성일은 도요토미에게서 성리학적 학식과 예를 찾으려 했겠지만 그를 간바꾸로 만든 것은 성리학적 학식과 예가 아니라 칼과 천하를 상대하겠다는 담략이었다.
전란 초기1592년 왜란 초 경상도 일대가 왜군에 의하여 유린되자, 사태 수습을 목적으로 다시 경상도 초유사(招諭使)에 임명되었다. 퇴계 이황의 학문적 적통을 이어받은 수제자로서 왕실의 권력이나 당파에 구애받지 않고 백성을 위한 직언을 하기로 유명하여 경상도의 흩어진 민심을 모으기에는 가장 적합하다는 류성룡 등의 천거에 의해 선조의 사형 명령이 철회되고 경상도 초유사로 임명된 것이다.
이후 즉시 경상도로 내려가 격문을 지어 흩어진 백성을 불러모으는 한편, 이미 어지러워진 군율을 바로 세우는 데에 몰두한다. 관군이 궤멸된 상황에서 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 등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들을 의병장으로 삼아 서로 협동하게 하고, 용맹한 자를 선발하여 수령이 없는 고을의 행정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또 각지를 순행하면서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뿌리고 군량으로 쓸 양곡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곽재우와 경상감사 김수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생기고 조정에서 곽재우를 처벌하려는 기색이 있자, 양자를 화해시켜 이를 원만히 수습하기도 하였다.
진주성 전투와 전사왜란 초기에 피폐해진 경상도 지역의 행정을 바로 세우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진주대첩으로 유명한 김시민 장군은 당시 군관으로서, 진주 목사와 산에 숨어 있다가 초유사의 명을 받고 진주성을 지키게 되었다. 초유사는 당시 곡창지대였던 호남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고 왜군이 반드시 경상도에서 호남으로 넘어가기 위해 진주성을 침략할 것임을 내다보고 진주성의 방비를 튼튼히 하는 한편 관군과 의병이 함께 진주성을 지키도록 해 임진왜란의 3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1차 진주성 전투)을 진두지휘했다. 이후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병사했다.

영산서원 이건 상량문 뒤를 이어 게제함.
 
要使山荒之域, 變爲文獻之區.
 
옆 줄기 우뚝 드러나 터로 할 만 하기에 형편은 장차 터를 택하여 자리를 잡으려는데 무너 지고 기우는 누추함이 점점 더하였으나 하려는 일이 이치에 맞으므로 쉽게 자재를 구하여 고쳐 세웠다. 이에 南康 옛 일의 예 대로 마침내 봄가을로 학문을 닦는 규칙을 따르고 이에 서원을 세우는 뜻을 늘어놓으니 어찌 덕을 숭상하는 방법을 말하지 않으랴.
오직 퇴계 이선생께서 온화하고 진실하며 너그러운 자질로 誠敬義의 학문을 독실히 밝히시 어 나라의 운수를 점치시니 크도다! 임금을 바로잡고 백성을 교화시킨 길이여; 儒林에 우뚝 하시니 지극하도다! 옛날을 이어 내일을 여신 학문이여. 또한 학봉 김선생께서는 강직하고 바른 기운으로 공손히 가르침을 받으셨다. 의젓하고 단아하신 자태는 늠름히 범할 수도 없 고 숨길 수도 없는 기품이었고 외국에까지 깃발을 펼쳐 우뚝이 바로 대할 뿐 욕보일 수 없 는 자질이셨다. 임금께서 친히 보시고 사액을 내리셔서 칭찬하여 높이시니 푸른 도포 날리 는 선비들이 또한 다투어 사당에 서서 높이 우러른다.
생각해보면 英陽은 한쪽에 치우친 땅인데 다행히 安禮과 이웃해 있다. 陶山과 가까이 있어 서 흠모하고 우러르며 옛날을 따를 수 있고, 학봉 노인께서 지나시던 곳을 지나며 오늘도 같이 읊으며 생각할 수 있다. 높은 산과 큰 길은 이미 모두가 아름답게 여기던 바요 성대한 덕과 지극한 선은 진실로 마땅히 세상이 다해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비록 神靈께서 이 마 을에 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精舍가 유독 이 땅에만 없으니 이제 제사를 올릴 의논을 하여 예에 맞게 서둘러 온당한 약속을 잡았다. 이에 황무해진 궁벽을 없애고 멋진 집을 고쳐 지 어서 선비들이 귀의하여 돌아보고 느끼는 곳, 父老들이 제사와 제향을 올리는 정성을 드릴 수 있는 곳으로 삼는다. 엄숙한 齋室에서는 공부하는 소리가 거의 끊이지 않고, 나는 듯한 廟宇는 우두커니 바라보며 감격하기 그지없다.
다만 옛 건물을 편안히 이용하기만 했을 뿐 멀리 내다보는 계획을 생각하지 못하고 다만 눈 앞의 상쾌함에 빠져 제대로 살피는 것을 놓쳐버렸다. 그래서 일을 마친 지 30년도 되지 않 아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에 지금은 폐쇄한 縣府의 한쪽에 옛날 학교 터를 잡고 지세를 두루 살펴보니 진실로 儒宮祠廟를 세우기에 합당하였다. 경내가 한쪽에 떨 어져 있고 맑고 깊어서 藏修하며 학문을 닦을 장소로 적합하였으나, 버려두고서 잠궈 두고 세월을 보낸 지 오래라 풀을 베어 내고 지저분한 것들을 날라 새롭게 했다. 재목을 늘어놓 고 기둥에 합당하게 재료를 준비하니 구름과 아지랑이 펼쳐지고 평야와 냇물이 쭉 둘러 감 기니 물굽이 감싸 흐른다. 마주 앉아 잠잠히 생각하니 오묘한 도가 묵묵히 떠오르고, 산에 올라 탄식하니 남기신 가르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흰 바위 푸른 구름 어찌 趣味로 함 께 얻은 것이 아니며, 빛난 바람 갠 달 따로 참 전함을 없앰이 있으리오.
생각건대, 白鹿서원·紹修서원이 처음 만들어짐은 진실로 紫陽退陶의 깊은 뜻에서 나온 것이다. 자기를 위한 학문[爲己之學]을 기준으로 하니 어찌 벽에 걸린 원규를 보지 않을 것 이며 행동과 말을 삼가 조상이 남기신 한 끝을 따르리로다. 그 사람을 높이면 그 도를 스승 삼는 것이요 그 덕을 흠모하면 그 조목에 따르는 것이 마땅하니, 앎을 진실로 하고 힘써 행 하여 이치를 궁구하고 몸을 닦는 가르침을 따르며 을 도타이하고 삼가 지켜서 절에서 부 처를 받드는 것 같이 해야 할 것이다. 노닐며 한가히 쉬는 것은 관아의 감독과 관계가 없고 道義로 서로 갈고 닦는 것은 어찌 문자에만 얽매이겠는가. 재목을 갖추고 공을 모으는 것은 대개 모두가 한마음으로 원하는 것이었는데, 터를 고치고 옮겨 짓는 것은 여러 선비들의 공 통된 의논이 필요하였다. 힘을 모으고 마음을 함께 함은 길옆에 집을 짓는 것과 같지 않았 고 다투어 함께 달려옴은 澤門興謳가 있었다. 그렇게 하니 이에 좋지 못한 땅이 널찍한 거리와 같이 되어 마침내 높고 밝은 터가 이루어졌다. 사람들 끝없이 이어지고 위엄 있는 자태가 널리 미침을 이 때에 몸소 볼 것이며, 푸른 산 높고 높으며 흐르는 물 도도히 흘러 가니 내세까지 영원토록 함께 할 것이다. 우선 짧은 운을 내어 대들보 올림을 돕는데 쓴다.
 
어기야 동쪽에 떡 던지니
아침해 우뚝 솟아 용마루 붉게 한다
가는 구름까지 다 없애길 기다려
속마음 까지 환히 밝히리라
 
어기야 서쪽에 떡 던지니
처마 끝 은미한 달 주렴 안에 들도다
그 가운데 참된 보배 말로 하기 오묘하니
뜬 생각 맑은 때 온 몸이 가지런하다
 
어기야 남쪽에 떡 던지니
구름 그림자 빛난 하늘 연못과 한가지로다
다시 근원 있어 도도히 흐르나니
저문 강 푸른 벼랑 뜻을 머금었도다
 
어기야 북쪽에 떡 던져라
허공을 움켜 하늘 음료 마시리라
牛山에 싹이 나는 것을 보니
밤 기운이 진실로 마음에 좋음이 징험되누나
 
어기야 위쪽에 떡 던져라
빛나고도 밝아 왕성하게 되리라
하늘과 땅에 부끄러운 마음 없으려는 듯
밝은 정성으로 함께 나아가 서로 공경하도다
 
어기야 아래쪽에 떡 던져라
진흙을 밟고 밟아 틈이 없게 되리라
言行은 어른 기다려야 허물이 적게 되니
을 허락한 후에야 小中華 행해지리
 
바라건대 들보를 올린 후에, 문마다 詩書를 읽고 집마다 仁義를 논하며, 子弟를 청하여 먼 훗날 그릇 되길 바라며 博約한 길을 가는 데 힘썼으면 좋겠다. 父兄은 영원토록 순수한 근 원을 보존하여 일찍이 높은 자리 오르는 것을 부러워하지 말아서 이 황무한 땅을 변화시켜 文獻의 지역으로 바꾸어 주었으면 좋겠다.
 
원문에서, 두 글자가 합해져서 한 글자로 되어야 하나 그런 문자가 없어서 우선 [交子]라고 표시해 둔다.
 
 
 
英山書院 退陶 鶴峯 兩先生 奉安 祭文
 
孔孟正軌 孔孟의 바른 길
洛建是鉥 낙동강 가에 전해졌으나
寥寥久哉 세월이 오래되어
皇蹃卼臲 위태로울 때에
象山大拍 육상산의 학설 크게 치고
王陳紺起 왕진의 이단 학설 고쳤도다
不絶如線 선처럼 가늘게 이어질 뿐
止派之骫 유학의 발자취 그치게 되었어도
魚目混珍 魚目이 보물과 섞여 있으니
孰距楊墨 누가 양주·묵적을 막을 것인가
中州如此 중국도 이와 같은데
矧惟東國 하물며 우리나라랴
懿哉先生 아름다우시도다 선생이여
隻手障瀾 한 손으로 이를 막으시며
規步矩趨 법된 걸음 걸으셔서
指南新安 남쪽 新安을 가리키셨도다
體認中正 中正體行하시고
上下鳶魚 상하로 오묘히 실천하셨도다
斯世何忘 이 세상 누가 잊으랴
時應安車 때에 따라 수레를 편히 타시어
聖學進圖 임금님께 星學十圖를 올려 가르치셨고
原廟釐序 原廟를 고치시고
幷泮敎曙 함께 학교에서 가르치셨도다
闤闠倫敍 저자에도 윤리를 행하니
魯幾一變 魯나라처럼 거의 변했도다
家家禮讓 집마다 사양의 예가 있고
進退有道 나고 물러남에 도가 있도다
亦非長往 또한 멀리 가지 않아도
處家何樂 처하는 집마다 즐거웠도다
得英才育 英才를 얻어 길러서
戶屨齧趾 지게문이 다 닳았다
如飮滿腹 물만 마셔도 배부른 듯 했으니
何理不叩 무슨 이치든 묻지 않으며
何疑不釋 무엇인들 의문을 풀지 못했으랴
蔚爲儒宗 우뚝이 儒宗이 되셨도다
斯文大闡 斯文이 크게 열려
從享聖廟 聖廟從祀하도다
四賢竝興 四賢 나란히 일어나
外而俎豆 조정 밖에서도 향사를 올리려고
南北競先 南北이 앞을 다투며
眷彼英山 英山을 보았도다
眞城與壤 참으로 좋은 땅에
始今建學 비로소 오늘 서원 세우니
亦旣靡嚮 또한 이미 이를 향하였다
不謀而同 의논하지 않아도 한마음이기에
輪粤敞朗 수레 소리 이어지도다
冥尊師處 스승이 머물던 곳 높이니
如奉函丈 스승을 실제 받드는 것처럼 하도다
粤惟鶴峯 우리 鶴峯선생은
若孔游夏 공자 문하의 자유나 자하와 같도다
變化氣質 기질이 변화함은
實賴親炙 참으로 친히 가르치심에 힘입음이라
胾許我嚌 우리에게 그 맛을 봄 허락하시며
最深朱書 朱書를 가장 깊이 살피셨도다
浸灌一唯 오직 한 가지에만 힘을 써서
依歸自初 벼슬하는 뜻 유지하셨도다 .
昔胡豹剛 전에 그리 사납더니만
今佩其柔 (생략)
英山書院 告諭 諸生文[代宣敎公作]
 
夫書院之作, 何爲也. 爲尊賢講學而作也. 賢不尊則無以感發興起而有所準則焉, 學不講則無以格物窮理而有所成就焉, 書院之設, 顧不重歟. 蓋天地儲精, 萬物化生, 而得五行之秀者人也. 是故粹然在中, 而爲仁義禮智信五常之性, 燦然著外. 而有父子君臣夫婦長幼朋友五倫之道. 惟其粹然於內, 是以能燦然於外, 固未嘗豐嗇於智愚存亡於古今也. 然而人之氣稟, 不能無淸濁粹駁之不齊, 故有性焉安焉而自誠明者焉. 有學焉修焉而由敎入者焉. 自非聰明睿智能盡其性者, 未有不待敎而成者也. 是以上自唐虞, 下及三代之隆, 莫不有敎, 其曰司徒也典樂也學也校也庠也序也, 其所以爲敎者, 槩可見矣.
逮于後世, 斯學不立, 斯敎不明, 五常之性, 汩而不全, 五倫之道, 塞而不達. 貿貿焉千有餘年, 而程·朱子出, 旣以主敬窮理而全此性矣, 建則敦敍而明此倫矣. 於是表章乎大學, 蒐輯乎小學, 其所以培根達葉, 羽翼風化者, 無所不至. 而又於南康, 修起白鹿書院, 宏其規範, 詳其節目, 揭敬義之符, 示明誠之訣, 儼然兆一代之敎而垂萬載之法, 此中朝書院之所始, 而曁乎元明之世, 多至數百所者, 蓋亦倣此而爲也.
惟我東方, 越在海表, 而禮讓文物, 無愧中華, 仁賢輩出, 前後相望. 圃隱先生唱之於前, 言出當理, 行可底績, 州庠國學, 皆所創建. 當此之時, 世極否而道益顯, 見而興者, 吉先生也; 聞而知者, 佔畢公也. 自是厥後有若寒暄·一蠹·靜庵·晦齋, 皆是聞風而作者. 而至于我退陶先生而有大焉, 明誠兩進, 博約兼擧, 其所以養其性厚其典者至矣.
於是深慮敎道之未明, 士風之頹敗, 思欲作育成就, 以敦興化之本. 而又念國學鄕校在城郭朝市之中, 前有學令之拘, 後有外物之誘, 未若書院之寬閒靜棲而可以歌詠. 先王深究義理, 有以熟其仁蓄其德, 故因周武陵世鵬之創而恢張白雲之院, 以倣白鹿之規而爲一邦矜式之地.
蓋吾東書院自白雲始, 而儒先播芬之鄕, 爭自立院, 到于今尤盛也. 然而人亡道喪, 斯敎昧昧, 挾書遊院之士, 從事乎記誦, 綴緝於章句. 自髫齔以至於白紛, 而終始爲利甚, 或事口舌相訾嗷, 蔑棄遜讓之風, 反成爭勝之場, 不亦悲乎. 向所謂尊賢講學而設者, 果安在哉. 寧之英縣, 僻處山水之區, 爲民者儉而質, 爲士者直而諒, 恨未有君子之彬彬也. 縣之父兄, 是用爲慮, 謀諸同志, 營建祠宇, 奉享退陶先生, 而配之以金鶴峯先生, 旣虔旣肅, 洋洋如在, 自此士有依歸而知所慕矣.
況其境界淸絶, 迥出塵囂, 奧而有林壑之幽, 曠而有軒楹之敞, 眞所謂息焉游焉而談義理於燕閒者也. 游于是者, 其將何所事而得以成父兄之望, 副立院之意哉. 亦曰尊賢而講學也, 尊之如何. 學先生而已, 誦先生之言, 服先生之行, 以到志其志學其學. 而動靜云爲, 無所不法, 則其所以尊之者, 不亦大乎. 然徒有尊賢之志而不有講學之實, 則未免有還珠買櫝之譏矣. 故道必講而後明. 而其所以講之者, 亦將讀書而窮其義理, 考古而辨其得失, 處事而審其是非. 而又當講磨乎師友, 思索乎吾心, 終之以力行, 以求至焉, 則所講者能爲吾有, 而粹然之性得矣, 燦然之道行矣. 天之與我者, 於是可全, 而先賢設敎之意, 庶幾無負矣.
嗚呼, 靈於萬物者人也, 秀乎凡民者士也, 生於天地之間, 而得其靈且秀焉者, 亦幸耳. 今諸君旣靈而人矣, 又秀而士矣, 旣有此二幸, 而又能感發於君子之風, 俛焉孶孶, 蔚然爲他日思皇之美, 則又幸之幸矣. 吾所以告諸君者, 若是而已矣. 諸君其各勉焉.
 
대저 서원을 만든 것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先賢을 높이고 講學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선현을 높이지 않는다면 감동하여 떨쳐 일어나 기준으로 삼을 것이 없게 되며, 학문을 익히 지 않으면 格物致知하여 성취하는 바가 없으니, 학원을 세움이 중요하지 않으랴. 대개 천지 의 精氣가 모여 만물이 만들어 졌는데 그 중 五行의 빼어난 것을 얻은 것이 사람이다. 이런 까닭으로 순수하게 그 마음에는 ····이라는 五常의 성품이 있고, 찬란히 밖으로 드러나서 父子·君臣·夫婦·長幼·朋友이라는 五倫의 도가 있다. 오직 순수하게 그 마음에 있는 것이므로 찬란히 밖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이지 진실로 지혜롭고 어리
英陽 英山書院 移安 祭文
 
英陽一隅, 密邇宣洛, 舊無祠宇, 而寓羹墻, 秉彛所同, 咸願報事, 維爼豆享, 於乙未冬. 惟急其成, 不暇詳擇, 仍故學舍, 作廟增修, 處地高寒, 側峻騰露, 曾未卅載, 弊已難勝, 不合妥靈, 且妨典守. 百爾籌度, 宜莫如遷, 爰卽縣東, 經營數歲, 今幸就訖, 奧衍寬閒. 涓吉移安, 有侐其廟. 玆率故典, 奠以告虔. 以鶴峯先生金公配神從享, 惟靈鑒臨, 永寧無斁. 謹告.
 
한쪽 땅 영양은 예안이나 낙동강과 매우 가까워 옛날에는 사당에 제사지내며 祭需를 올릴 데가 없었지만 떳떳한 아름다움 모두 같기에 제사 올리기를 모두다 원하였다. 마침내 제향을 올리니 이때가 을미년 겨울이다. 오직 급히 하다 보니 상세히 살필 여유가 없어서 이에 옛 學舍를 사용하여 廟宇增修하였다. 지대가 높고 차우며 옆의 산이 높아 이슬에 자주 젖는 관계로 삼십년을 지나지 못하여 폐허가 됨을 막을 수 없을 정도였기에 神靈을 모시기에 합당하지 못하였을 뿐더러 또 맡아 지키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의논을 모아서 마땅히 옮기기로 하였다. 마을의 동쪽으로 옮겨서 일을 한 지 몇 년만에 오늘 다행히 마칠 수 있었으니 그 안이 널찍하면서도 한가하다. 길일을 택하여 옮겨 봉안하니 廟宇가 조용하다. 이에 앞선 예에 따라 제사하며 고합니다. 鶴峯 金公을 함께 배향하니 神靈께서 강림하여 살피어 영원토록 해 주십시오. 삼가 고합니다.
禮安의 옛 이름이 宣城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을 따왔고, 은 낙동강을 가리킨다.
 
 
英山書院 移建 上梁文
 
側埈騰露之可虛, 勢將擇址而移卜, 壞陋傾圯之有漸, 事合易材而改爲, 肆遵南康按故之儀, 聿追春秋修學之義, 玆申立院之旨, 庸述尙德之方. 恭惟退溪李先生以溫良愷悌之資, 篤明誠敬義之學, 蓍龜邦國, 大哉匡君化民之猷, 喬獄儒林, 至矣繼往開來之業. 亦惟鶴峯先生金公, 禀剛方正直之氣, 受欽恭祗栗之銘, 儼笏臺端, 凛凛有犯無隱之操, 張旃海外, 卓卓專對不辱之才, 自丹扆旣勤宣額而褒崇, 維靑衿亦爭立祠而尊尙. 顧惟英陽僻壤, 幸爲安禮鄰邦, 密邇陶山, 欽仰慕悅焉從昔, 經履鶴老, 稱思誦說於如今. 高山景行, 旣同秉彝之攸[交子] , 盛德至善, 固宜沒世而不㤀. 雖孕靈匪屬於玆鄕, 而精廬獨闕於斯土, 載謀蘋藻之薦, 式遄妥侑之期. 爰卽蕪沒之宮墻, 增修傑渠之厦屋, 爲士子依歸觀感之所, 寓父老羹墻嚮慕之忱. 肅肅齋房, 庶幾絃誦之不絶, 翼翼廟宇, 佇見肹蠁之無竆. 第緣仍舊便宜, 不念永久之計, 惟耽目前爽塏, 殊失審擇之規, 經營未三十年, 患害難一二數. 玆焉廢縣之側, 卜取故學之墟, 體勢周遭, 允合儒宮祠廟之攸置, 境落淸邃, 端宜藏修皷篋之所於, 抛棄荒榛, 鎻寒烟者久矣, 芟闢菑翳, 輦糞壤而新之. 列峀當楹而拱瓌, 雲嵐舒卷, 平川繞檻而襟帶. 灣漪淪漣. 坐對潛思, 縱歉黙契乎妙道, 登臨發歎, 莫不慨想於遺風. 白石靑雲, 豈無趣味之同得, 光風霽月, 別有消息之眞傳.
奧惟白鹿紹修之創開, 實出紫陽退陶之深意, 爲已敦典, 盍觀揭壁之規模, 飭行謹言, 請考遺沈之尺牘. 尊其人, 則師其道, 慕其德, 宜率其倏. 眞知力行, 克遵窮理修身之訓, 篤信謹守, 當存奉刹報佛之心. 游息燕閒, 不係州家之程督, 道義磋切, 豈專文字雌黃. 鳩材僝功, 蓋出一方之輿願, 改卜移建, 要皆羣彦之僉謀, 幷力齊心, 非若道傍之築室, 爭趨共赴, 寧有澤門之興謳. 乃使撲地闤闠之㕓, 遂成拱極高明之址. 冠屨莘莘, 威儀棣棣, 宛若親見於當年, 靑山峨峨, 流水洋洋, 相期永存於來世. 聊抽短韻, 用助升梁.
 
抛梁東
旭日朝朝射棟紅
直待纖雲掃卷盡
分明臨照皎如衷
 
抛梁西
簷端微月入簾低
箇中珍重難言妙
浮念澄時百體齊
 
抛梁南
雲影天光共一潭
更有源泉來混混
暮江蒼壁意中含
 
抛梁北
挹取虛危天漿液
看彼牛山萌孽生
驗玆夜氣良心息
 
抛梁上
赫赫明明及爾王
俯仰若爲不愧心
明誠偕進敬維相
 
抛梁下
脚踐平塗方免罅
言行待夫寡悔尤
許君然後行夷夏
 
伏願上梁之後, 戶說詩書, 家談仁義, 請子弟期做遠器, 從事博約之塗, 而父兄永保淳源, 莫羡騰之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