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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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연경서원(硏經書院)-미복설
   대구 북구 연경동
   退陶 李滉(1613년), 寒岡 鄭逑(1622년), 愚伏 鄭經世(1676년), 溪東 全慶昌(1639년), 梅巖 李叔樑(1647년)
   1564년(明宗 19)
   1660년(顯宗 1)
   미복설
   
퇴계의 문하생 이숙량(李叔樑, 15191592)은 아예 팔공산 자락으로 옮겨 와 서당을 짓고 제자를 길렀었다. 농암 이현보의 다섯째 아들로 안동 예안 출신. 대구 무태동 들연경 마을에서 지묘동 서원연경 마을 가는 길목 동화천변에 우뚝 솟아 있는 '화암'(畵巖) 근처가 서당 터라고 했다. 서당은 1563년 대구 최초의 서원으로 승격됐다. 연경서원은 매암(梅巖) 이숙량(李叔樑) 선생의 주도 하에 지역 유림과 관()이 힘을 모아 1563년부터 1565년까지 세 해에 걸쳐 연경동(硏經洞) 화암(畵巖) 부근에 세운 유림의 강학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 후 불과 30여 년 만에 임진왜란의 병화로 소실되고 말았다. 난이 끝난 후 태암 이주 선생께서 주관하여 다시 세우기 시작하였고, 태암 선생께서 별세하신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힘을 모아 수년에 걸쳐 중건과 중수를 계속하였다. 서원이 다시 모습을 갖추게 되자 비로소 사우(祠宇)에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위패를 주향으로 모셨고, 이후에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의 위패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선생의 위패를 배향하였다. 또한 별사(別祠)에는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 선생의 위패를 주향으로 모시고 매암(梅巖) 이숙량(李叔樑) 선생의 위패를 배향하였다. 국내 최초의 서원보다 불과 20여년 뒤지는 시기. 대구 권역에 있던 5개 사액서원 중 하나이기도 했다.
서원을 남겨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던 이숙량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4살의 나이로 몸소 창의해 임진년 10월 진주대첩에 참가했다가 순국했다고 '임진왜란기 영남의병 연구'(최효식)는 적어두고 있다. 그리고 연경서원도 전국 650개 서원 중 47개만 남길 때 함께 철폐됐다.

1) 퇴계 이황
도산서원 조 참조
 
2) 우복 정경세(1563 - 1633)
본관 진주(晉州). 자 경임(景任). 호 우복(愚伏일묵(一默하거(荷渠). 초시(初諡) 문숙(文肅). 개시(改諡) 문장(文莊). 경상북도 상주(尙州)에서 출생하였다. 1582(선조 15) 진사를 거쳐 1586년 알성(謁聖)문과에 급제, 승문원 부정자(副正字)로 등용된 뒤 검열·봉교(奉敎)를 거쳐 1589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워 수찬(修撰)이 되고 정언·교리·정랑·사간(司諫)에 이어 1598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광해군 때 정인홍(鄭仁弘)과 반목 끝에 삭직(削職)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부제학에 발탁되고, 전라도관찰사·대사헌을 거쳐 1629년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이르렀다. 이듬해 겸 춘추관지사로서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편찬을 담당하였다. 성리학에 밝았고 이기설(理氣說)에서 이황(李混)의 학설에 반대, 이이(李珥)에 동조하였으며 특히 예론(禮論)에 밝아서 김장생(金長生) 등과 함께 예학파(禮學派)로 불렸다. 시문(詩文)과 서예에도 뛰어났다. 찬성(贊成)에 추증되고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 강릉의 퇴곡서원(退谷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우복집(愚伏集)》《상례참고(喪體參考)》《주문작해(朱文酌解)등이 있다.
 
3) 계동 전경창(全慶昌)
1532(중종 27)1585(선조 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산(慶山). 자는 계하(季賀), 호는 계동(溪東). 판서 백영(伯英)의 후손으로, ()의 아들이다.
1555(명종 10) 사마시를 거쳐 1573(선조 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관직은 검열·정언에 이르렀다. 성리학의 태두인 이황(李滉)의 학통을 이어받았으며, 한때 가야산에서 학문 연마에 전념하기도 하였다.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중대함을 강조하며, 일반사신이 겸하여 추진하던 것을 전담사신을 파견할 것을 상소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계동집이 있다.
 
4) 매암 이숙량(李叔樑)
1519(중종 14) ~ 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경북 안동 사람이다.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대용(大用), 호는 매암(梅巖). 아버지는 호조참판 현보(賢輔)이다. 이황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문장은 청려전아(淸麗典雅)하고, 붓글씨가 뛰어났다. 1543(중종 38)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성리학 연구에만 전념했다. 후일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는 격문을 지어 의병의 궐기를 촉구했으며, 난중에 죽었다. 시조로 분천강호가 汾川江湖歌6수가 전하는데, 부자·형제·친척 사이의 도리를 온전하게 하라고 권고한 내용이다. 이현보의 풍류와 이황의 도학을 그 어느 쪽도 충실하게 잇지 못하고 관심을 좁혔다는 평을 받는다. 대구 연경서원(硏經書院)에 배향되었다.
 
5) 한강 정구(鄭逑)
1543(중종 38)1620(광해군 12
경학(經學)을 비롯해 여러 분야에 통달했으며, 특히 예학(禮學)에 뛰어났다. 그의 문하에서 많은 제자가 배출되어 영남 남인학파의 한 줄기를 이루었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아버지는 사중(思中)이다.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이다. 성주이씨(星州李氏)와 혼인하여 성주에 정착했다. 7세 때 〈논어〉·〈대학〉을 배워 뜻을 통했으며, 12세 때 그의 종이모부이며 조식(曺植)의 고제자였던 오건(吳健)이 성주향교의 교수로 부임하자 그 밑에서 공부했다. 1563년(명종 18)에 이황(李滉)·조식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1564년 상경하여 과거장까지 갔다가 시험에 응하지 않고 돌아와 그뒤로는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만 열중했다. 1573년(선조 6) 예빈시참봉에 이어 1578년 사포서주부, 그뒤 삼가·의흥·지례 등지의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580년 비로소 창녕현감에 부임했고, 이때 베푼 선정으로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다. 이듬해 지평이 되고 동복현감을 거쳐 1585년 교정청(校正廳)의 교정랑(校正郞)으로서 〈경서훈해 經書訓解〉를 교정했다. 1591년 통천군수가 되었는데, 그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각 군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일으키도록 했다. 그뒤 우승지·강원도관찰사·성천부사·충주목사·공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1608년(광해군 즉위) 대사헌이 되었으나 임해군(臨海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관련된 사람을 모두 용서하라고 상소한 뒤 고향에 돌아갔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기 위해 상소를 했다. 고향에 백매원(百梅園)을 세워 유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경학을 비롯해 산수·병진(兵陣)·의약·풍수·역사·천문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면에 정통했으며, 특히 예학에 뛰어났다. 그는 전통적인 영남학풍을 계승했는데, 그의 〈심경발휘 心經發揮〉는 이황의 〈심경후론 心經後論〉을 수정·보완한 것으로 〈심경〉을 중요시한 이황의 학문을 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오선생예설분류 五先生禮說分類〉는 정호(程顥)·정이(程)·장재(張載)·사마광(司馬光)·주희(朱熹)의 예설을 분류한 것으로 예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예를 통하여 이웃과 사회, 그리고 국가생활을 이롭게 한다는 도덕지상주의적 태도를 보여준다. 〈예기상례분류 禮記喪禮分類〉·〈가례집람보주 家禮集覽補註〉·〈오복연혁도 五服沿革圖〉·〈심의제도 深衣制度〉 등도 예학에 관한 저술들이다. 이밖에 역사서로 고금의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정치의 득실과 그 요체를 밝힌 〈고금충모 古今忠謨〉·〈고금치란제요 古今治亂提要〉 등이 있으며, 〈고금인물지 古今人物志〉·〈고금명신록 古今名臣錄〉 등과 같은 전기류도 있다. 안과 의서인 〈의안집방 醫眼集方〉과 산아와 육아에 관한 〈광사속집 廣嗣續集〉도 저술했다. 수령을 맡을 때마다 그 고장의 산천·물산·고적·인정·풍속 등을 조사·수집하여 7종의 읍지를 간행했는데, 그중 〈함주지 咸州誌〉가 남아 있다.
그밖의 저서로 〈한강집〉·〈성현풍 聖賢風〉·〈태극문변 太極問辨〉·〈수사언인록 洙泗言仁錄〉·〈무이지 武夷志〉·〈곡산동암지 谷山洞庵志〉·〈와룡지 臥龍志〉·〈역대기년 歷代紀年〉·〈고문회수 古文會粹〉·〈경현속록 景賢續錄〉·〈관의 冠儀〉·〈혼의 婚儀〉·〈장의 葬儀〉·〈계의 稧儀〉·〈갱장록 羹墻錄〉 등이 있다. 인조반정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성주 동강서원(東岡書院)·회연서원(檜淵書院)·천곡서원(川谷書院), 충주 운곡서원(雲谷書院), 창녕 관산서원(冠山書院), 성천 학령서원(鶴翎書院), 통천 경덕사(景德祠) 등에 제향되었다. 제자로는 이후경(李厚慶)·서사원(徐思遠)·황종해(黃宗海)·허목(許穆) 등이 있는데 이들은 김성일(金誠一)·유성룡(柳成龍)·장현광(張顯光)의 문하와 함께 영남 남인학파를 이루었다. 한편 그의 사상 가운데 경세론 분야는 허목 등 근기학파(近畿學派)에 속한 학자에게 계승되어, 이익(李瀷)·안정복(安鼎福)·정약용(丁若鏞) 등에 의해서 더욱 심화·발전되었다. 당대의 명문장가로서 글씨도 잘 썼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대구 연경서원(硏經書院)기문/매암 이숙량
명종계해(1563)년 여름 향시에 필요한 학업을 익히는 향중 선비들이 학당에 모여 글을 읽고 짓는 여가에 서로 팔을 잡고 탄식하여 이르기를 서원(書院)이 우리나라에 있어서 전후에 들은 바가 없었더니 무릉(武陵)주선생(周先生)이 처음으로 백운동(白雲洞)에 세움에 시청을 고동시키고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였으니 참으로 우리나라 위대한 사업의 으뜸이었다
그 소문을 듣고 일어난 것으로 해주의 문헌서원(文憲書院)과 성주의 연봉서원(迎鳳書院)과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과 경주의 서악서원(西岳書院) 같은 것이 있다.따라서 크고 작은 고을에 파급되어 서로 다퉈가며 추모하고 점차 확장하였으니 이러한 것들이 어찌 모두 수령들에 의해서 건립되었으며 또 어찌 모두 반드시 어진이의 숭배를 위주하여 설치한 것이겠는가
고을 사람들이 능히 스스로 분발하여 강학의 장소로 세운 것이 간혹 있었으니 도의를 강마하고 풍속을 격려하는 데에 있어 어찌 도움이 적다 하겠는가
우리 고을은 한 도() 가운데 선비의 후손이 많은 데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몸을 사사롭게 하고 선비들은 그 학문을 사사롭게 하여 활과 말의 기예에만 따르고 문학에는 힘쓰지 않았다. 그 사이에 또한 어찌 호걸스런 재목과 기위(奇偉)한 사람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 퇴폐한 풍습속에서 능히 스스로 분발한 사람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풍속이 이로 말미암아 아름답지 못하고 인심이 이를 예사로 여겨 날마다 나빠졌으니 이 어찌 다만 우리 고을의 수치였겠는가 또한 국가의 불행이었다
지나간 것을 따를 수 없고 다가오는 것을 힘쓸 수 없으니 지금 어진 임금을 만났으며 하잖은 고을에서 어진 성주를 얻었으니 이것은 진실로 고을 풍속을 혁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옛말에 이르기를 [모든 공인(工人)이 제자리에 있으면서 그 일을 이룬다]고 하였으니
학문을 하는 데에 있어서만 어찌 그렇게 하겠는가 그렇다면 선비가 있을 자리는 서원이 아니고 어디겠는가
이에 목욕 제계하고 성주에게 들어가 뵙고 서원 세울 뜻을 고하였으니 이때 성주는 밝은 성주 박응천(朴應川)이었다
그 향약의 마음을 아름답게 여기고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루어 주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즉시로 명령하여 이르기를 [내가 비록 능히 주관할 수는 없으나 그 일로써 와서 말하면 들어 주겠다]고 하였으니 또 이르기를 [집을 세우는 데에는 기와가 가장 큰 일이니 이것은 내가 마련해 주겠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일을 하는 데에는 유사(有司)보다 더 앞서는 것이 없으니 유사의 우두머리를 선택하라]하였다
제생들이 그 명령을 듣고 뛸듯이 기뻐하며 물러 나왔다
다음날 향사당(鄕射堂)에 향중 부호들을 모아놓고 역시 서원 세울 뜻을 말하니 모두 말하기를 [감히 동심협력하지 않겠는가]하였다
이에 일을 주관할 사람을 세우고 또 재력(財力)의 규모를 계획하여 대소인원을 차례로 써서 그 빈부에 따라 돈과 곡식을 거두었으며 노력을 내는 데에도 역시 이와같이 하였다 이에 공인(工人)들을 먹일 곡식과 노임으로 줄 포백들이 단시일에 집합되었다
이에 마땅한 기지를 살펴 팔공산 기슭에 세우도록 작정하였다
고을에서 20리쯤 떨어진 곳에 마을이 있어 위의 마을은 지묘(智妙)라 하였고 아랫마을은 무태(無怠)라 하였으며 서원은 그 사이에 자리를 잡고 이름을 연경(硏經)이라 하였으니 당초에는 잡초가 우거진 묵밭이었던 것을 전임 성주가 공유지로 교환하였다
한 줄기의 맑은 냇물이 그 남쪽을 지나 잔잔하게 흐르며 구비구비 산을 따라 서쪽으로 10리를 체 못가서 호()에 이르렀다
그 상류의 두 마장쯤 되는 지점에 왕산(王山)이 있어 웅장하게 서려있고 높이 솟아 아름다운 기운이 매우 짙었다
그 왕산을 호위하듯 그 남쪽에 벌려섰는 중첩된 봉우리가 마치 용이 날으고 봉이 춤추는 듯 굽고 방박한 것은 서원의 동남쪽 경관이다
서원의 북쪽산을 성도(成道)라 일렀으니 봉우리가 높이 솟고 골짜기가 아늑하고 깊어 흰 돌과
푸른 소나무가 은은하개 비추었으며 서쪽으로 달리다가 갑자기 큰 바위가 깍은듯이 높이 서있어 화암(畫巖)이라 일렀으니 이는 즉 서원의 서쪽 진()이라 붉은 언덕 푸른 절벽이 높이 서 있어 기괴한 형상들이 저절로 아름다운 그림을 이루었으니 화암이라고 한 이름이 이 때문이었는가? 그 아래 푸른 못이 잇어 깊고 맑아 잠겨있는 고기들이 헤아릴 수 있었으니 이는 즉
서원에서 굽어보는 경관이다.
갑자년 봄 삼월에 상량하여 그 명년겨울 시월에 공사를 마쳤으니 집이 모두 40여칸이었다
그 정당(正堂)은 세칸으로 기둥이 높고 처마가 날으는듯 하였으며 산과 물의 형세가 다 그 안을 밝혀 읍하는 듯 하였으니 참으로 인자(仁者)와 지자(知者)가 좋아할만한 곳이라 그 이름을 인지당(仁智堂)이라 하였다
그 왼쪽 채는 넓고 깊어 그윽한 형세가 존엄하였으므로 수방재(收放齋)라 일렀으며 오른쪽 채는 상쾌하고 시원하여 마음이 저절로 가다듬어졌음으로 경타재(警惰齋)라 일렀다 그리고 동쪽 집을 보인(輔仁) 서쪽 집을 시습(時習)이라 일렀으며 긴 행랑의 중간에 초현문(招賢門)이 있고 초현문의 서쪽 곁에 동몽재(童蒙齋)가 있으며 그 동쪽의 양헌(涼軒) 두 칸을 양정당(養正堂)이라 일렀으며 그 서쪽 온실 세칸을 유학재(幼學齋)라 일렀다
그 밖에 주방과 창고를 동편에 붙여 세우고 원장은 서쪽으로 둘려있다 이러한 것을 모두 합하여 [연경서원]이라 일렀다
집은 이미 이루어졌으나 모든 용품이 미비하였다 이에 또 권고하는 안을 내어 향중 동지들과 의논하고 스스로 원하는 바에따라 받아드렸으니 적게는 소반과 기명이요 크게는 돈과 곡식과 서책들이었다 그들의 재력에 따라 드려 놓았으니 한 고을의 동심합력이 참으로 가상할만 하였다
대개 서원의 건립이 비록 지방사람들의 공통된 소원에 근본하였으나 모든 계획과 처치에 있어서는 전후 성주의 힘이 많았다
당초 재목을 모으고 기와를 구울적에 힘이 미치지 못하면 성주가 담당하여 엄한 호령으로 순하게 인도하고 태만한 것을 이끌었으며 토지 노속의 배치 선비를 기르는 경비의 근본대책 등유 식염의 규정에 이르기 까지 모두 용의조치 하다가 완수하지 못하고 전임됨에 고을 사람들이 실망하고 중도폐지 될까 염려하였더니 우리 유학에 행운이 깃들어 또다시 어진 성주를 만나게 되었다
부임하자 곧바로 서원건립에 마음을 기울여 모든 고하는 것을 그대로 들어주었다
인부들이 부역이며 경비의 계속에 용의주도 하였으며 수호하는 군정과 주방의 식모들 까지도 힘써 주었으니 문학을 숭상하고 교화를 일으키는 뜻이 전임자와 후임자가 똑 같았다 우리 고을 많은 선비들의 다행스러움이 어떠하겠는가
그러나 두분 성주의 공적이 어찌 다만 구구하게 집을 짓는 사이에 베푼 조치의 말단에만 있었겠는가
뒷날 원근에서 이 서원을 찾아와 노는 사람들이 두분 성주의 근념과 서원을 건립한 뜻을 생각하여 글을 읽는 데에는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으로 근본을 삼고 문장을 서술하는 데에는 미사여구로 다듬는 것을 말단으로 삼아 학문은 자신의 수양을 위하고 외부의 물욕에 뜻을 빼았기지 말며 진실을 알고 성실하게 시행하여 다른 잡기에 현혹되지 아니하며
맑은 냇물에 임하거든 [가는 것이 이와 같다]고 한 공자의 말씀을 추모하고 높은 바위를 우러러서는 맹자의 기상을 상상하여 뛰어난 사람은 심오한 학문의 진리를 얻게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도 오히려 어진 것을 잃어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궁하여서는 가문과 시속의 모범이 되고 현달하여서는 임금을 존경하고 백성을 비호하여 충과 효를 다하는 인재가 많이 나올 것이니 두분 성주의 공적이 이에 커져서 장차 화암과 더불어 우뚝 솟아 떨어지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지금 성주의 이른은 승간(承侃)이니 전임 성주와 성이 같으며 아름다운 치적도 잘 이었다
이 때 고을사람들이 나를 무능한 사람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공사를 주관토록 하였으며 완공된 뒤에 또 나에게 서원건립의 내력을 써서 퇴계선생에게 기문을 청하도록 책임을 지웠다 이에 퇴계선생에게 청하였더니 선생이 병환으로 사양하시면서 내가 쓴 내력이 기문에 적합하다 하시고 칭찬하시며 발문을 뜻 깊게 써 주시고 반드시 기둥사이에 같이 계시도록 하였다
내가 감히 안된다고 사양하면 이것은 졸작인 나의 글 때문에 발문까지 버리게 되며 나의 글을 버리고 발문만을 취하면 서원건립의 전말을 알 수 없게 된다 이에 감히 옳지 못한 죄를 범하면서 마침내 썼으니 뒷날 군자들은 못난 사람의 글이라 하여 버리지 말고 특별히 관용하여 주면 매우 다행이겠다.
명종22(1567)정묘 1016일 진사 이숙량 기()
 
 
한강(寒岡)을 연경서원(硏經書院)에 봉안할 때에 퇴계 선생(退溪先生)에게 고유한 글
우리 유도가 동쪽으로 전해 옴에 / 吾道之東
선생이 대성을 하셨습니다 / 先生大成
실천하고 발휘하여 / 踐履發揮
정학이 이에 밝아졌습니다 / 正學以明
누가 그 전함을 얻어 / 孰得其傳
우리 선비들의 맹주가 되었는가 / 主吾黨盟
바로 한강이 / 乃有寒岡
여러 영재들 중에 빼어났습니다 / 拔出群英
어린 나이에 문하에 올라 / 幼齡登門
들어 받음이 이미 정하였습니다 / 聽受已精
마음으로 좋아하고 정성으로 복종하여 / 心悅誠服
단비를 맞은 듯 바람이 지나간 듯하였습니다 / 雨化風行
돌아와 이를 체험해서 / 歸來體驗
이미 진실하고 평이하였습니다 / 旣實且平
독실히 믿고 확충하와 / 篤信充擴
여러 봉사들을 자세히 가르치니 / 指掌群盲
그 규범을 헤아려 보면 / 揆厥模範
실로 선생에게서 나왔습니다 / 實出先生
일찍이 우리 서원을 방문하여 / 曾過吾院
배알하고 정성을 폈으며 / 展謁伸誠
물러가 여러 어린이들을 권면하여 / 退勖諸幼
나아갈 길을 거듭 가르쳤습니다 / 申指行程
이에 높이고 사모하여 / 于今景慕
올려 배향함이 참으로 정당하옵니다 / 躋配惟貞
공경히 처음 제사함을 아뢰오니 / 齊告始事
사문이 길이 형통할 것입니다 / 斯文永亨
硏經書院請額疏[乙亥十月] ( 硏經書院請額疏[乙亥十月] )
伏以[]本愚㝠學未有聞悲歎窮廬朝暮待盡迺於頃者竊聞本道觀察使關據禮曺奉承傳行移若曰近來師友之教專廢學校勸奬之事依法爲之可也未知教官訓蒙着實爲之乎别加飭勵以恢勸奬之道雖或法典之外亦爲禀行也云云聖主之所以畱意於斯文也至於如此誠作人興化之盛德也[]竊誠歡誠喜以爲三代教化何幸於吾身親見也旋聞觀察使關又以備邊司啓下各官書院獘端滋蔓其所屬人口幾何曁賜額與未賜額查覈狀啓也云云廟堂之所以鄙薄於儒生也至於如此此又傷風敗教之一端也臣竊私憂過計以爲叔季澆漓不幸於吾身遂見也憂喜交深不知所定敢冐萬死請獻其說㐲願殿下試垂察焉嗚呼凡天下國家書院之設初非偶然也昔在三代之隆家有塾黨有庠州有序國有學以造士降及後世教化崩壞國學鄕校僅有文具家塾黨庠其制遂絕何幸南康創建白鹿洞書院以爲國庠宋朝因之遂有四大驛送九經官其洞主及其南渡百戰搶攘猶尙書院處處增置御書扁額祠祀聖賢奬勸封植如恐不及盖不假有廟則無所矜式不加崇奬則無以示後故也雖以胡元之蠢爾而亦立太極以倡道學逮于大明當天遍置天下使隱求之士講道之倫抱負墳典得以蔵修而出爲世用尊主庇民作成之效於斯爲盛是則士之爲學非惟得力於書院也國家之得人亦必由於書院故知道之士願治之主莫不於是乎眷眷焉此歴代書院皆所以廣教思敦化源以續夫三代黨庠之遺制也惟我國家雅尙文治其於迪教一遵華制有學有校而先儒臣周世鵬又倣中朝書院廼建於白雲洞一如朱熹白鹿洞故事旣立規範又祀鄕賢事聞自上命名紹修作記刋下加賜書籍以示榮寵於是凡大小州縣聞風興起爭立書院敦尙詩書以賁王化此則我朝書院之教無愧宋朝有光上國實東魯萬世之宏模也豈不盛哉不幸亂離規範廢墜士習日卑不務藏修惟事游嬉徒爾哺啜一味荒怠者間或有之至使議者肆作指目直欲上聞一切革罷然後己焉誠可歎也千巖萬壑琳宮梵宇無君無父不知幾何而莫之或禁惟吾學爲忠孝蔵修道德者絕無僅有乃反剥之至於斯極不亦異乎㳟惟方今聖上臨御其於經世之務致治之道無不講究深思爲國之本在於先立教化夫旣畱意於學校之政而遂以禀行法外别加飭勵丁寧爲教則凡在廷之臣所當依聖教有可以闡揚斯文者雖在於法典之外乃敢討論隨事陳達有以作興可也况此書院乃三代盛時之所遺制歷代帝王之所封植先朝列聖之所奬勸古今大賢之所尊崇顧惟聖明之世方興學校之政而獨於書院之教非惟不爲之崇奬也廼反比擬於宮家圡豪之無忌憚作弊者與之同科遂爲查覈而其在宮家則聖上猶慮夫有乖於親愛之道而不之問也至於書院則廟堂不恤其有垂於勸奬之道而迺首加焉是則廟堂之所以待儒生者亦不可謂不鄙薄也其可乎嗚呼書院亦學宮也雖末流不能無獘而夫旣名之曰學宮則須是維持點檢革其舊而新是圖可也其於古今天下寧有查覈學宮底道理乎而况查覈二字近於苛刻若施於宮家圡豪則彼有以自取之固其所也倘加於所謂學宮(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