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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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학산서원(鶴山書院)-미복설
   인천광역시 남구 학익동 83번지
   이단상(李端相), 이희조(李喜朝)
   1762년(영조 38)
   1768년
   불향
   
 
1762(영조 38)에 창건되었으며 이단상(李端相)의 위패를 모셨다. 1768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1786(정조 10) 이희조(李喜朝)를 추가 배향했다. 1870(고종 7)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 
문학산 사모지고개를 넘어 학익동 방향으로 내려가다보면 곧바로 50여채의 허름한 가옥이 몰려있는 마을이 나온다.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이 마을(남구 학익동 83번지 일대)이 형성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30여년전 쯤이다. 그전엔 23채정도의 가옥만 있었다고 한다. 이곳이 오래된 자연부락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곳은 과거 주거지역이 아니라 교육시설이 있던 자리다. 이 마을 한복판에 아름공예란 상호가 붙은 허름한 공장이 있는데 이 공장건물 담장 바로 옆에 초라한 비석하나가 서있다. ‘학산서원지라고 써 있는 이 비석은 이 일대가 과거 서원이 있었던 터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학산서원이 건립된 시기는 조선시대 숙종 28(1702)경이다. 서원에 관한 문헌인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이 서원은 숙종 28년에 건립되어 동 34(1708)에 사액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여기서 사액(賜額)이라 함은 국왕이 이름을 지어주고 서적, 노비, 토지 등을 지원해주는 것으로 당시 학산서원이 정부가 인정해준 교육기관이라는 뜻이다. 당시 학산서원의 규모는 향교와 비슷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서원 건축구조가 강당(학문토론장), 재실(숙소), 사당(성현위패모신 곳), 서고(도서보관), 제기고(제수용품보관), 누각(휴식장소) 등이었던 만큼 학산서원 역시 이런 건축구조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학산서원은 다른 지역의 서원과는 달리 설립과정에서 적지않은 우여곡절을 겪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향토사학자들에 따르면 숙종 당시 서원은 전국에 341개에 이를만큼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는데 유독 인천만 서원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영일정씨, 부평이씨 등 내로라하는 인천지방 유림들이 서원설립을 추진했으나 왕의 사액을 받지못해 서원설립이 지연됐다고 한다. 당시 서원의 과다한 설립으로 지방곳곳에서 적잖은 폐단이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따라 인천지방 유림들은 인천부사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고 주민교육에 공이 컸던 이단상(李端相, 연안이씨)을 기리고 후진양성을 위해 유림 수백명의 서명을 받아 숙종에게 서원설립을 요구하는 청원상소(민원)를 제출했다. 학산서원은 청원상소를 제출한 후 왕으로부터 건립인가를 받아 지어진 것이다. 이렇게 설립한 학산서원은 다른 지역의 서원과 마찬가지로 지방의 사설교육기관인 동시에 도서관, 제사의 기능을 맡고 있었다. 이중 서원에서 가장 주안점을 둔 것은 교육기능이다. 공교육기관인 향교가 과거시험을 보기위한 기초교육에 치중한 반면 서원은 과거시험과는 상관없이 선비들 스스로 학문을 연마하고 후진을 양성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그래서 교육내용도 향교보다 깊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성리학을 골자로 소학부터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주역, 춘추 등을 익힌다음 사물의 이치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가례, 심경, 근사록, 사기 등 수준 높은 학문을 다뤘던 것이다.
이와함께 학산서원은 향촌사회의 도서관 역할도 담당했다.
당시엔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아 지방에선 45경같은 기본도서외에 전문서적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사액서원이었던 학산서원은 국가의 지원으로 많은 도서를 구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산서원은 배움에 뜻을 둔 선비들이 언제든 찾아와 서적을 빌려보고 서로 의견 및 정보를 나누던 장소였던 것이다. 아울러 학산서원은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당시 조선사회는 충효를 중히 여기는 유교이념에 따라 지방향교 및 서원의 제사기능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따라서 이곳 학산서원도 인천부사 이단상과 그의 아들 이희조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숙종 36(1710)엔 양주에 있던 이단상의 묘를 용인으로 이장했는데 이때도 학산서원에서 인천의 유림들이 모두 모여 성대히 유교식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1)이단상(李端相)
1628(인조 6)~ 1669(현종 10).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연안. 자는 유능(幼能), 호는 정관재(靜觀齋)·서호(西湖). 할아버지는 좌의정 정구(廷龜)이며, 아버지는 대제학 명한(明漢)이다. 1649년(인조 27)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설서·부수찬·교리·지제교 등을 지냈다. 1655년(효종 6)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청풍부사·응교를 거쳐 인천부사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고 양주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1664년(현종 5) 집의가 되었다가 입지권학(立志勸學)에 관한 상소를 올리고 사직했다. 1669년 부제학으로 서연관(書筵官)을 겸했으나 곧 사퇴했다. 응교로 있을 때 언론의 개방을 주장하고, 정여립(鄭汝立)에게 아부했던 정개청(鄭介淸)의 서원 향사(享祀)를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 또한 자신의 6대조 이석형(李石亨)이 지은 〈대학연의집략 大學衍義輯略〉을 임금에게 권했다. 당시 교유가 있었던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을 등용할 것을 건의했으며, 호남 지방의 대동법 시행 문제에 대해서도 거론했다. 그의 문하에서 아들인 이희조(李喜朝)를 비롯하여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임영(林泳)·윤지선(尹趾善) 등의 학자가 배출되었다. 저서에 〈정관재집〉·〈대학집람 大學集覽〉·〈사례비요 四禮備要〉·〈성현통기 聖賢通紀〉 등이 있다.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인천 학산서원(鶴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뒤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2)이희조(李喜朝)
1655(효종 6)~ 1724(경종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동보(同甫), 호는 지촌(芝村). 우의정 정구(廷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명한(明漢)이며, 아버지는 부제학 단상(端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김수항(金壽恒)에게 허적(許積)을 탄핵하는 글을 보냈다. 1680년(숙종 6)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전설별검(典設別檢)·의금부도사·공조좌랑·진천현감·서연관·지평·천안군수·장악원정 등을 역임했다. 1707년 장령을 거쳐 해주목사로 있을 때 석담(石潭)에 있는 이이(李珥)의 유적을 찾아 요금정(瑤琴亭)을 세웠다. 그뒤 대사헌·이조참판·찬선·좨주(祭酒)를 지냈으나, 1721년(경종 1) 신임사화로 노론 4대신이 유배당할 때 영암에 유배되고 다시 철산으로 이배(移配)되던 중 정주에서 죽었다.
노론·소론이 나누어지기 전에는 박세채(朴世采)를 따랐으나 윤휴(尹鑴)를 이단으로 배척하고 윤증(尹拯)에 대하여 배사론(背師論)으로 일관하면서 송시열의 노론을 옹호했다.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 관하여 이이의 입장을 견지했으며 기발(旣發)에 있어서 성명(性命)과 형기(形氣)의 어떤 면에서 원인하는가에 따라서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으로 나누어지지만, 마음 가운데에 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작용하여 발(發)하는 것이라 했다. 또한 중용(中庸)의 중(中)이라는 의미는 정이(程頤)가 '불편불의'(不偏不倚)라 하고 주희(朱熹)가 '무과불급'(無過不及)이라 하여 미발(未發)과 기발(旣發)을 달리 해석한 것 같지만 정이는 미발과 기발을 함께 말하되 미발의 측면에서 말하고 주희는 정자의 말을 보충하여 기발의 중(旣發之中)의 입장에서 해석했다고 했으며 중이란 둘을 겸한 것이라 하여 이(理)로 표현했다. 그는 순경(荀卿)의 성악설(性惡說)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등 이단을 극력 배척했다. 저서로는 〈지촌집〉이 있으며, 편서로는 〈우서절요 尤書節要〉·〈주자대전차의 朱子大全箚疑〉 등이 있다. 1725년(영조 1) 신원되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인천 학산서원(鶴山書院), 평강 산앙재영당(山仰齋影堂)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영조 1년 을사(1725, 옹정3) 66(임신) 좌목
이희조(李喜朝)를 학산서원(鶴山書院)에 배향(配享)할 것을 청하는 경기의 진사 이대수(李大壽)의 상소
 
경기(京畿)의 진사(進士) 이대수(李大壽)가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우리나라는 문치(文治)가 밝고 아름다워 유현들이 배출되었습니다. 중종(中宗)과 선조(宣祖) 이후로 도학이 순수하게 갖추어져 백세의 종사(宗師)가 된 자가 십수 명이지만, 그중에 한 가문에서 연원하여 부자간에 도를 전한 경우는 또한 얼마 되지 않습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 부제학 증 이조 판서 이단상(李端相)과 그의 아들 고 이조 참판 증 찬성 문간공(文簡公) 이희조(李喜朝)는 가정에서 계통을 서로 이어 한 시대의 진유(眞儒)가 되었으니, , 훌륭합니다.
이단상은 고상하고 맑은 명망을 간직한 채 일찍 벼슬길에 올랐다가 하루아침에 망설이지 않고 물러나 문을 닫고 교외에 살면서 뜻을 전일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세운 뜻을 물어보면 다만 성인(聖人)이 되기를 기약하였으며, 학문은 격물치지를 급선무로 여겨 위로는 육경(六經)에서 아래로는 염락관건(濂洛關建)의 여러 책에 이르렀고, 그 밖에 자서(子書)와 사서(史書)에 이르기까지 이른 아침부터 밤늦도록 열람하여 온갖 이치를 궁구하여 몸에 체행하고 마음에 이회(理會)하였습니다. 비록 불행히도 하늘이 수명을 빌려 주지 않아서 모두 그의 뜻대로 하지는 못하였으나 도달한 경지는 이미 고원하였습니다.
이희조는 총명하고 영특하며 타고난 자품이 뛰어나서 15세에 벌써 문예가 이루어졌으며, 가정교훈을 물려받고 또 일찍부터 훈도(薰陶)를 받아 20세가 되기 전에 이미 명성이 드러났습니다. 이희조의 혁혁한 가문과 훌륭한 재주로 볼 때 과거에 급제하여 현요직을 역임하는 것은 지푸라기를 줍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는데, 도리어 일찌감치 과거 공부를 사절하고 사학(斯學 유학(儒學))에 종사하였으니, 내외와 경중의 구분을 깊이 아는 자가 아니라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수학할 적에 일을 주선하고 학문을 강마하여 그전에 듣지 못했던 큰 도의 근원을 더 들었습니다. 이로부터 선배들에게 크게 추중(推重)을 받아 고() 상신(相臣) 이단하(李端夏)가 일찍이 사우(士友)로서 인정하여 주연(胄筵)의 강관(講官)을 선발할 적에 의망하였고, 문정공(文貞公) 민유중(閔維重)이 경신경화(庚申更化)의 초기에 첫 번째로 이희조를 천거하여 벼슬에 나아가게 하였으며, 기타 이름난 재상들이 번갈아 천거하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이희조는 당시 겨우 20여 세였는데 선배들에게 추중을 받음이 이와 같았으니, 이희조가 일찍부터 중망을 받았음을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연로하여 중간에 뜻을 굽히고 어버이를 위해 벼슬에 나아갔지만, 만년에는 물러가 은둔하여 학문을 닦으려는 뜻이 더욱 간절하여 벼슬을 단념하고 동강(東岡)의 언덕을 굳게 지키면서 정밀하게 연구하고 깊이 생각하며 날마다 부지런히 힘써서 실천이 이미 독실하였고 조예가 더욱 높았습니다. 학문을 하면서 법도를 지키는 데 구애되지 않았으나 사물에 대응할 적에 자연히 법도에 들어맞았고, 집안에 거처하고 관직에 거하는 것이 모두 의리에 부합하였습니다. 어버이를 섬길 때에는 효성을 다하여 뜻을 봉양하고 구체(口體)를 봉양하는 것이 옛사람에 견주어도 부끄럽지 않았고, 정사를 할 때에는 청렴결백함으로 자신을 다잡아 빙벽(氷檗)처럼 청빈한 지조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습니다. 음악과 여색을 멀리하여 혼자 있을 때에도 속이지 않았으며, 사양하고 받기를 엄정하게 하여 작은 것이라도 반드시 신중히 하였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온화하고 평이하여 남들과 크게 다른 점이 없는 듯하였으나 그 마음을 헤아려 보면 강직하고 정대하여 확고하고 순수한 지조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세도(世道)가 사분오열되고 인심이 도탄에 빠졌을 때에 부정한 학설을 분별하여 물리치고 사문(斯文)을 지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위로 선정(先正)의 계통을 계승하고 우뚝하게 미친 물결 속의 지주(砥柱)가 되었으니, 세상을 근심하고 군주를 사랑하는 뜻은 은거하고 있을 때에도 일찍이 마음속에 간절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제현들의 주의(奏議) 중에 군주의 덕과 치도에 유익한 것과 경연(經筵)의 고사(故事)를 수집하여 책자로 만들어서 숙종에게 올려 어람에 대비하였습니다. 이는 치란(治亂)의 기미와 사정(邪正)의 구분에 뜻을 다하여 간림(諫林)금감록(金鑑錄)을 지어 올린 것과 똑같은 정충(精忠)이니, 어찌 산림에서 절개를 지키는 선비로서 세상일을 잊는 데에 과감한 자가 아니겠습니까. 이 때문에 후학들이 존경하여 우러르고 선왕조(先王朝)께서도 날이 갈수록 더욱 의지하고 중시하여 빈번하게 초빙하고 융숭하게 예우하였는데, 저 간신의 무리들이 엿보고 질시하여 철천지원수처럼 여겨서 이희조가 산림 속에 은거하고 있었음에도 뭇사람의 공격이 집중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끝내 참혹하게 무고(誣告)를 당하여 남쪽에 찬배(竄配)되었다가 서쪽으로 귀양 가서 천리 밖 변방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사도(邪道)를 막고 정도(正道)를 지켜 후세에 공이 있었으니, 진실로 공로가 우왕(禹王)의 아래에 있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 이희조 부자의 어짊은 진실로 한 세상의 종사(宗師)가 되었습니다. 또 일찍이 부자가 이어서 신들의 고을에 부임하여 다스렸는데, 정사를 함에 한결같이 주자(朱子)가 남강군(南康軍)을 다스린 것과 같았고 정씨(程氏)가 진성(晉城)을 다스린 것과 같았습니다. 신들이 문교(文敎)에 영향을 받아 예의의 방도를 다소나마 아는 것은 실로 이들 부자의 교화 덕분이니, 공경히 우러러 사모하여 세상을 떠났어도 잊지 못하는 것이 어찌 다른 사람과 구별이 있지 않겠습니까. 숙종조에 유생들이 일제히 호소하자 이단상의 사우(祠宇)를 신이 맡은 도()에 창건하도록 특별히 허락하시어 봄가을로 제사를 올릴 수 있게 하고 또 학산(鶴山)이라고 사액(賜額)하여 표창하셨는데, 지금 이희조가 죽었으니 이 서원에 배향(配享)하는 일을 또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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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國朝)에 유현의 의로운 덕을 기리는 사당이 없는 곳이 없지만 도가 같은 부자가 같은 사당에 함께 배향된 것은 연산(連山)의 돈암서원(遯巖書院)과 양주(楊州)의 석실서원(石室書院)이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합니다. 더구나 이희조가 행한 유학(儒學)의 교화와 은혜로운 정사는 선대의 미덕을 계승하여 그 유풍과 공렬이 온 고을에 길이 남아서 이단상과 이희조가 앞뒤로 차이가 없는 데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이희조를 이단상의 사당에 배향하는 것은 전례(典禮)를 상고해 보아도 합당하니, 어찌 다만 신들이 사사로이 흠모하는 것으로만 볼 수 있겠습니까.
현재 성조(聖朝)께서 보위를 이어받으시어 흉악한 자를 주벌하고 억울한 자를 풀어 주되 포장(褒獎)하여 추증하는 은전이 첫 번째로 이희조에게 미쳤습니다. 이에 유현을 숭상하는 도리에 있어서 별도로 사당 하나를 세워 향사(享祀)를 오로지 받을 수 있게 하는 일을 또한 그만둘 수 없는데, 더구나 이렇게 배향하는 것이 새로 서원을 창건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음에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신들이 이에 감히 서로 이끌고 와서 소장을 올려 대궐문 밖에서 우러러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숙종께서 이단상의 사당을 창건하도록 명한 뜻을 체찰하여 이희조를 그 사당에 배향할 수 있도록 윤허해 주소서. 그리하여 한 지방의 백성들이 추모하는 마음을 부치고 선을 흥기할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세교(世敎)를 고무시키는 데에 어찌 더욱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상소의 내용은 해당 조로 하여금 내게 물어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仁川鶴山書院賜額祭文 判決事李宜顯製
維歲次戊子十月朔初五日
國王遣臣禮曹正郞李秀英諭祭于贈參判李端相之靈山嶽亭毓篤生哲人氷玉襟懷水月精神淵源詩禮蔚乎虨彬早揚明廷望若鳳麟寧王在宥遹啓昌辰論思獻納協襄惟寅十載周旋庶贊臥薪世故邅廻志倦簪紳言旋我車寂寞之濱芻豢道義樂在顏貧妙契天人沿洄洛閩主靜居敬博約兩臻師友切磋德必有隣躚躚媚學善誘其諄令聞孔彰旌招繁頻側佇羽儀以佑斯民天不假年痛矣伯淳殄瘁之悲朝野惟均衿佩懷慕久而益新先朝寵遇屢降恩綸逮予贈官倍思舊臣眷茲邵城治化所馴朞月施敎沒世誦仁流風如昨軌躅可遵立祠揭虔載瞻奐輪英靈攸依俎豆斯陳藏修之規白鹿是循爰錫嘉扁寵章亟申崇德報功永綏千春遣官侑告冀格精禋(靜觀齋先生續集卷十附錄)
 
鶴山書院重修記
 
維仁川府治西鶴山之下筧溪之上有廟貌巋然享事肅若其將千百世而不可廢者曰靜觀齋李先生之所俎豆艮庵李先生之所追配也盖靜觀先生於己酉來莅玆土修文敎行儒化菀爲士林之所景慕其後艮庵先生以先生之賢嗣又繼絃歌之治學校丕興兩先生之於是邑便似明道之晉城晦翁之南康也肅廟辛巳一郡章甫籲于朝刱建院宇仍而追宣恩額矣及夫艮庵先生値世禍棄後學多士又申配享之請秩文如禮玆院之設日月未滿三紀而棟宇居然撓圮殆不可支在初事力之未裕結構之未堅盖可想已於是院儒之執綱者朴尊一鄭日賓李檍李大壽金天佐洪燦箕李成樑諸人及西齋生安琚相繼經紀自辛亥至丁巳七年而工告訖毁者完傾者正疎者緻䵝者明廟門孔侐堂齋增敞諸生乃具事始末請文于余余作而曰諸君子之意甚盛將以何辭答之哉惟我兩先生德行之純名節之高國史之紀載儒林之稱述備矣不學何容僭論至於海嶽溪山之勝天設地藏有若準備於芒藜所臨蕉荔攸奠之墟者不但余未嘗瞻謁而登覽無可摸狀設令强言亦何足爲斯院之重也又若諸君子之慕賢而禮饗之葺祠而力完之者有足感歎然今日之請余爲記者宜不在是矣自古聖王之敎人必以建學爲先<span style="background: rgb(255, 255, 255); letter-spacing: 0pt; mso-fareast-font-family: 함초롬바탕; mso-font-width: 1</body></html>
인천시 남구는 ‘학산서원(鶴山書院)’터 정비 및 훼손된 표지석 등 지속적인 지역의 문화자원 관리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27일 밝혔다.
학산서원터는 현재 심하게 훼손되어 재정비가 시급한 상황으로 기존의 필름 방식의 서원터 표지석을 부식에 강한 스텐레스로 교체하여 지역의 문화자원을 지키고, 비지정문화재의 소중함을 알릴 수 기회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문학산 북록에 있는 학산서원 터는 1708년(숙종34)년 창건 이래 1871년(고종8)에 단행된 서원 정리에 따라 훼철되기 전까지 인천 지역의 학문과 교육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기관이었으나 서구 제국의 조선침략과 일제의 조선강점 속에서 다시 재건되지 못하고 그 터만 남게 되었다.
이후 1949년부터 본격적인 학술조사에서 ‘학산서원(鶴山書院)’이라 새겨진 와편이 발견되고 그 주변에서 재실과 강당 그리고 사당의 건물초석이 확인됐다.
그러나 도시의 확장과 함께 다시 유실, 이후 문학산 터널공사로 인해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렵게 돼 인천시립박물관의 협조를 얻어 그 위치를 추적하여 2004년 인천시 남구와 학산문화원이 표지석을 설립하여 지역에 비지정문화재를 보존하는 사업을 추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