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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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도포서원(道浦書院)-미복설
   강원도 춘천시 서면 신매리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 문정공 신흠(申欽), 증도승지(贈都承旨) 김경직(金敬直)
   1650년(효종원년)
   
   신숭겸 묘역에서 향사
   
강원 춘천시 서면 신매리에 있었다.
도포서원은 강원도 춘천부 서쪽 15리쯤인 소양강 위 도장포(道藏浦)의 고산(孤山)에 있었다.
효종 원년(1650)에 강원도 관찰사 박장원(朴長源)이 비방동(悲方洞) 장절공(壯節公) 묘소 아래에 창건하여 고려태사(高麗太師)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을 향사하였는데 숙종 20(1694) 갑술에 강원도 관찰사 후예손인 신양(申懷)이 이 곳으로 이건하면서 후손인 영의정 문정공 신흠(申欽)과 증도승지(贈都承旨) 김경직(金敬直)을 배향하였는데 고종 8년에 훼철되었다.
원우(院宇)의 편액은 방동 재실에 보존하였는데 19766월에 장절공 묘소 및 신도비와 함께 강원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 신숭겸(申崇謙)
?~ 927(태조 10). 고려 초기의 무신.
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능산(能山). 고려사에 의하면 광해주(光海州지금의 춘천) 출신이며, 체격이 장대하고 용맹이 있었다고 한다. 태봉 말기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복지겸(卜智謙) 등과 함께 기병대장으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918년에 고려를 개국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개국공신 1등에 봉해지고, 대장군이 되었다. 927(태조 10)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과 공산(公山지금의 경북 달성군 팔공산) 동수(桐藪)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대장군으로 군사를 이끌고 참여했다. 견훤의 군대가 태조를 포위하여 형세가 매우 위급해지자, 원보(元甫) 김락(金樂)과 더불어 싸우다가 전사했으며 그 덕분에 태조는 간신히 피신했다. 태조는 그의 동생 능길(能吉), 아들 보()를 원윤(元尹)으로 등용하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그의 명복을 빌게 했다. 994(성종 13) 태사(太師)로 추증되어 개국장절공(開國壯節公)으로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1120(예종 15) 그와 김락을 추도하여 예종이 도이장가 悼二將歌라는 향가를 지었다. 시호는 장절(壯節)이다.
 
2) 신흠(申欽)
1566(명종 21)~ 1628(인조 6). 조선 중기의 문인·정치가.
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이식(李植)과 함께 '월상계택'(月象谿澤)이라 통칭되는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敬叔), 호는 상촌(象村현헌(玄軒방옹(放翁). 아버지는 개성도사 승서(承緖)이며, 어머니는 은진송씨로 좌참찬 인수(麟壽)의 딸이다. 7세 때 부모를 잃고 장서가로 유명했던 외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경서와 제자백가를 두루 공부했으며 음양학·잡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개방적인 학문태도와 다원적 가치관을 지녀, 당시 지식인들이 주자학에 매달리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이단으로 공격받던 양명학의 실천적인 성격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문학론에서도 시()'형이상자'(形而上者)이고 문()'형이하자'(形而下者)라고 하여 시와 문이 지닌 본질적 차이를 깨닫고 창작할 것을 주장했다. 특히 시에서는 객관 사물인 경()과 창작주체의 직관적 감성인 신()의 만남을 창작의 주요동인으로 강조했다. 시인의 영감, 상상력의 발현에 주목하는 이러한 시론은 당대 문학론이 대부분 내면적 교화론(敎化論)을 중시하던 것과는 구별된다. 1585년 진사시·생원시에 합격하고, 158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589년 춘추관원에 뽑히면서 사헌부감찰·병조좌랑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는 도체찰사(都體察使) 정철의 종사관으로 있었으며, 그 공로로 지평(持平)으로 승진했다. 이후 선조에게 뛰어난 문장력을 인정받아 대명(對明) 외교문서의 작성,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의 제작에 참여했다. 1599년 큰아들 익성(翊聖)이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의 부마가 되었고, 1601춘추제씨전을 엮은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예조판서가 되었다. 47세 때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라 하여 파직되었다. 이후 10여 년 동안 정치권 밖에서 생활했다. 1616년 인목대비의 폐비사건으로 춘천에 유배되었다가 1621년 사면되었다. 이 시기에 문학을 비롯한 학문의 체계가 심화되어 청창연담 晴窓軟談·구정록 求正錄·야언 野言등을 썼다. 1623년 인조반정과 함께 대제학·우의정에 중용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좌의정으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로 피난했으며, 같은 해 9월 영의정에 올랐다가 죽었다. 1651년 인조묘정에 배향되었고, 강원도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에 제향되었다. 6322책 분량의 방대한 상촌집을 남겼는데, 1981년 경문사에서 구두점을 찍어 영인본을 펴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3) 김경직(金敬直)
1567(명종 22)1634(인조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 자는 이정(而正), 호는 우정(憂亭). 아버지는 사직(司直) 광계(光啓)이다.
1590(선조 23)에 진사가 되고 1610(광해군 2)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다.
그뒤 전적·은계찰방 등을 역임하였으나 광해군의 난정에 실망, 관직에서 물러나 춘천 우두촌(牛頭村)에 은거하며 계축옥사로 그곳에 유배중이던 신흠(申欽)과 교유,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낭천현감에 기용되어 선정을 베풀었으며, 이어서 병조좌랑·사도시정 등을 역임하였다.
도승지에 추증되고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에 제향되었다.